[미디어스=이정희] 조선의 '정치적 기초'를 설계한 정도전이 구상한 나라는 이상주의적 유교국가였다. 사극에서 흔히 등장하듯, 조선의 왕은 유교적 군주가 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배움을 게을리하면 안 되었다. 또한 왕의 결정은 의정부와 6조 그리고 홍문관, 사간원 등을 통해 견제되고 조정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렇게 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중심에는 고려 말에 형성된, '사대부'라는 유교적 이념으로 무장한 관리들이 있었다. 그리고 유교중심적인 국가관은 중앙의 정치 제도만이 아니라 왕실은 물론, 가족 관계에도 적용됐다.

하지만, 유교가 조선 사회에 정착하기까지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상대적으로 자유분방했던 고려에 이은 조선 초기에는 여전히 그러한 관습적 분위기가 남아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저 역사적 스캔들로 알려진 세종조의 세자빈 봉씨라든가, 양반가 유씨 부인의 일들은 <조선왕조실록>의 유교적 해석을 통해 지탄받을 일로 후대에 알려졌지만, 과연 당시에도 그랬을까? 12월 3일 방영된 <KBS 드라마 스페셜 2021> ‘그녀들’은 세자빈 봉씨 사건을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해 본다.

궐에서 쫓겨날 위기, 소쌍의 선택

KBS 드라마 스페셜 2021 ‘그녀들’ 편

드라마의 시작은 '소쌍'이라는 나인부터이다. 남동생은 있지만 집을 나가 생사를 알 수 없고, 4살 때 궁에 들어온 소쌍은 가장이 되어 병든 아버지를 보살펴야 하는 신세이다. 그녀의 말대로, 소쌍은 궁궐 밖보다 두 배의 돈을 벌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린 나이에 궁에 들어와 지금껏 버티고 있었다.

그리고 나인 소쌍은 궁궐 안 여성들은 모두 '왕의 여자'라는 규율을 어기며 군관과 밀애 중이었다. 그런데 그 밀애 장면을 하필 세자의 후궁인 승휘에게 들켰다. 당연히 곤장을 맞고 궐 밖으로 쫓겨날 상황. 하지만 집안을 책임지는 소쌍은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소쌍은 자신이 들은 승휘의 비밀, 세자빈의 임신을 막기 위해 약을 쓰고 있었다는 걸 알고 있다며 자신이 승휘의 사람이 될 것이라 간청한다.

승휘의 사람으로서 세자빈을 유산시킬 임무를 띠고 들어온 세자빈의 처소. 그런데 따귀를 때리며 난폭하게 구는 세자빈의 시험에 소쌍이 통과한다. 시아버지인 임금이 세자빈에게 내린 열녀전에 대해 '세자빈이 했던 말'을 그대로 답하며 마음을 얻은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술 마시기를 즐기며, 때로는 술에 취해 시중드는 나인의 등에 업혀 궐 안을 돌아다녔다는 세자빈 봉씨. 그래서 시아버지인 세종은 그녀의 괄한 성정을 다스리고자 열녀문을 내렸다고 한다.

봉씨가 된 세자빈 스캔들의 재해석

KBS 드라마 스페셜 2021 ‘그녀들’ 편

드라마는 정숙하지 못한 여인이라는, 역사 속 세자빈 봉씨에 대한 프레임을 벗겨내 자유로운 성정으로 궁궐이라는 공간에서 상처받은 여성으로 재해석해낸다. 그런 봉씨와 함께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 소쌍은 살아남기 위해, 가장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기꺼이 간자가 된 여성으로 그려낸다.

알고 보면 '적'인 두 사람. 하지만 역사 속에서 그랬듯, 드라마에서도 소쌍과 세자빈은 서로에게 연민을 느낀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 나뭇가지로 칼싸움을 즐기는,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지아비를 위해 평생 수절하는 행위를 시아버지 앞에서 거리낌 없이 답답하다고 말하는 세자빈. 그에게 따귀를 맞으면서도 꼿꼿하게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소쌍은 궁궐 안에서 유일하게 세자빈을 이해해주는 '벗'이 되었다. '너무 쉬워서 기억도 안 난다’는 소쌍의 말처럼 스며들듯 서로에게 마음을 연다.

세자빈 봉씨의 파렴치한 스캔들 역시 관점을 달리한다. 세손 잉태라는 궁궐 여성들의 권력 싸움으로 초점을 달리한 사건은, 세자빈의 패륜이 아니라 세자빈이 되고자 하는 승휘의 ‘조작 사건’이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조작의 중심에는 소쌍이 있다. 소쌍은 승휘의 계략에 맞춰, 세자가 세자빈을 찾은 날 옷고름을 풀어 헤치며 세자빈이 자신을 범했음을 만천하에 알린다. 당연히 세자빈은 폐서인이 되고, 소쌍 역시 곤장 70대를 맞고 궐에서 쫓겨난다.

KBS 드라마 스페셜 2021 ‘그녀들’ 편

그런데 드라마는 반전이 선사한다. 궐에서 쫓겨나던 날, 소쌍은 자신에게 사례를 한다며 쌀자루를 쥐여주는 승휘에게 외려 고맙다고 전한다. 고맙다? 승휘의 하수인으로서 세자빈의 동성애를 폭로했던 소쌍, 하지만 알고 보니 그건 소쌍과 세자빈 봉씨의 선택이었다. 소쌍은 세자빈에게 숨겨왔던 비밀을 고백하고, 그럼에도 자신을 용서하려는 세자빈에게 ‘우리 둘’이 걸어서 이곳을 나가자고 한다.

즉, 드라마의 제목 '그녀들'은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을 그저 왕가의 대를 잇는 도구로, 권력의 하수인으로 소모하려는 ‘궁궐'이라는 세계를 스스로 버린 것이라고 말한다. 드라마는 봉숭아 물을 곱게 들였던 두 여인 소쌍과 봉씨가 눈 내리던 날 손을 잡고 궐을 떠나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조선 초 사회를 뒤집어 놓았던 스캔들은 ‘그녀들’의 로맨틱한 순애보로 각색되었다.

KBS 드라마 스페셜 2021 ‘그녀들’ 편

역사 속에서 세자빈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친정으로 쫓겨났지만, 소쌍은 목숨을 건질 수 없었다. 신분사회가 가진 비극적 결말이다. 정사에서 세자빈은 그저 친정으로 돌아간 것으로 끝나지만, 야사에서 전해진 세자빈의 결말 역시 친정아버지에 의한 '명예 살인'이었다. 사실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유교가 지배한 조선 시대였기에 등장한 '루머 아닌 루머'인 것이다.

그렇게 궁궐 속 화초가 되기에는 어울리지 않았던, 세자빈 봉씨로만 알려진 여성의 이야기는 역사 속 스캔들로 기록되었고, 그 기록은 이제 21세기의 드라마를 통해 시대와 조우할 수 없었던 한 여성의 자기주도적 삶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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