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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재화’- 공황장애 그녀의 ‘쥐구멍에도 볕들 날’ 만들기, 어떻게?[미디어비평] 톺아보기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 승인 2021.12.20 18:46

[미디어스=이정희]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김준완 교수는 친구 동생 익순이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실을 찾는다. 그런데 병실의 익순은 자신을 걱정하는 오빠를 위해 티슈로 비둘기를 만들어 성대모사까지 하며 날리고, 그 모습이 이성적인 인간 김준완으로 하여금 첫눈에 반하도록 만든다. 배우 곽선영은 티슈로 비둘기를 만들어 날려야 하는 개그스런 장면과 그럼에도 사랑스러워야 하는, 그 어려운 미션을 거뜬히 해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1 내내 시청자들의 뜨거운 응원을 받은 커플이 탄생한 순간이다.

마찬가지다. 십여 년 만에 만난 대학동창 수진은 출생의 비밀을 지닌 듯한 아이를 데리고 남편 앞에 나타났던 재화에게 어이없어하며 말한다. “니가 예전부터 좀 엉뚱했잖아”. 사귀던 자신을 두고 그것도 자기 절친과 바람이 나서 결혼까지 해버린 남자를 '더는 참고 싶지 않다'며 십여 년 만에 찾아가 복수하려는 여자. 그런데 그 여자가 미친년 같기보다는, 연민과 응원하도록 만들기가 어디 쉬운가. 그 어려운 걸 재화 역을 맡은 곽선영 배우는 해낸다. 

12월 17일 방영된 <KBS 드라마스페셜 2021> ‘보통의 재화’ 편은 배우 곽선영의 포텐을 터트리며 ‘억울하다 못해 마음의 병을 가지게 된 재화’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재수 없는 여자, 재화

KBS 드라마 스페셜 2021 ‘보통의 재화’ 편

산통 끝에 제왕절개로 태어난 재화는 사는 게 참 여의치 않다. 말 그대로 재수가 없다. 모처럼 운동하겠다고 나섰는데 산책 나온 견공이 그녀의 신발에 쉬를 하는 식이다. 모든 게 그렇다. 직업은 텔레마케터, 감정 노동의 나날은 늘 욕받이 같은 처지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쭈욱 늘어선 긴 줄 뒤에 선 그녀가 갑자기 쓰러진다. 엘리베이터를 탈 수 없다. 이 시대의 병인 공황장애이다.

정신과 상담을 하게 된 재화. 타성에 젖은 의사 최병모(최대훈 분)는 그녀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약 처방에 연연한다. 그런데 그 앞에서 재화가 묻는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요?” 

‘보통의 재화’는 정신과 상담실에서 이루어진 재화의 ‘공황장애 이유 찾기’ 상담을 줄기로 그녀의 삶을 그린다. 

공황장애에 딱히 이유가 없다며 약을 먹으라는 의사의 말이 무색하게, 그 이유 찾기에 골몰하던 그녀는 결국 대학시절 실연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이제 더는 참지 않겠다고 선언한 재화는 예의 해프닝을 만든다. 

KBS 드라마 스페셜 2021 ‘보통의 재화’ 편

드라마는 이제 보편적 현상이 되어가는 우리 시대의 병, 공황장애에 걸린 재화를 통해 서른 중반 여성의 삶을 복기한다. 재화는 첫 상담에서 말한다. 자신이 가장 잘하는 건 '참는 것'이라고. 왜 참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나만 참으면 되니까. 내가 한번 꾹 참고 넘어가면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라고 말한다. 텔레마케터 상담에서 고객의 욕설을 한번 꾹 참듯이 말이다. 

재화는 오래도록 참아왔다. 거슬러 대학시절 자신을 보기 좋게 배신한 남친과 절친부터,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현관문을 탕탕 두들기며 온 치킨 배달에까지. 그래서 이제 더는 참지 않겠다고 한다. 

전 연인을 찾아가 한 방 먹이듯 그렇게 재화는 자기 삶에서 꾹 눌러왔던 감정들을 조금씩 드러내 보인다. 십여 년이 지나도 미안하다는 말 대신,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도 똑같은 선택을 할 거라는 친구에게 따귀를 한 방 먹인다. 어느덧 재화의 ‘친구 아닌 친구’가 되어버린, 재화의 딸 노릇을 해준 희정(김나연 분) 친구들과도 한 판 걸지게 붙는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은 어떻게 만들까? 

KBS 드라마 스페셜 2021 ‘보통의 재화’ 편

많이 좋아졌다며 웃지만 재화는 여전히 엘리베이터를 타지 못한다. 그래서일까. 늘 약 타령을 하던 의사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다. 바로 '가족'이다.

가족이란 말이 나오자 도망쳤던 재화. 의사의 말처럼 '대상 관계'인 가족은 재화의 묵은 상흔이다. 그 상흔 속에는 재화의 깊은 후회가 있다. 아버지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어린 재화는 그걸 엄마한테 말했고, 그로 인해 엄마가 오래도록 고통받았다는 후회가 재화의 트라우마가 됐다. 그래서 그 트라우마는 어떤 상황에서도 참으면 된다고 자꾸 그녀를 억누르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 모임에서 묵은 감정을 풀어놓게 된 재화. 그래서 재화는 치유됐을까? 더는 참지 않겠다며 그간 자기 안에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을 꺼내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엘리베이터는 '난공불락'이다. 그래서 재화는 약 먹기를 자처한다. 이제는 먹기 좋게 가루약을 타온 그녀가 약봉지를 앞에 두었을 때 의사가 전화를 한다. 

상담 과정은 재화 스스로 자신의 아픔을 살펴보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매너리즘에 빠졌던 정신과 의사 최병모가 직업적 소명을 깨닫는 시간이다. 전화를 한 의사는 재화에게 말한다. 아빠의 외도처럼, 당신 잘못이 아니라고. 당신은 그저 열심히 살아왔을 뿐이라고.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살피려 애썼을 뿐이라고. 그런 당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운동화에 쉬를 한 견주가 사과도 없이 지나쳤듯 자기중심적인 사람들 때문에 당신이 상처 입은 거라고. 당신은 열심히 살며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느라 애써오는 동안 지쳤을 뿐이라고. 그러니, 힘들면 이젠 좀 자신도 돌보면서 살아가라고.

KBS 드라마 스페셜 2021 ‘보통의 재화’ 편

상처 입은 주인공이 더는 참지 않고 나서는 해법은 드라마에서 새롭지 않은 방식이다. 그런데 <보통의 재화>는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야수처럼 변해 자신의 감정을 분출하면서도 주인공은 “왜 그럴까요?”라는 질문은 놓치지 않는다. 자신이 아픈 이유, 고통스러운 이유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리고 그 이유를 배려심 없는 타인은 물론, 그런 타인을 배려하느라 애썼던 자신 모두에게서 찾는다. 

거기엔 열심히 애쓰며 살아온 한 개인이 있음을 알고 다독인다. 그렇다. 우리는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애를 쓴다. 제멋대로 하려는 게 아니다. 어울려 살아보려 애쓰는데 그런 과정에서 나를 돌보지 못하니 문제가 생긴 것이다. 

매번 문 앞에 놔달라고 하는데도 문을 두드리던 치킨 배달부에게 쪽지를 붙여 자신이 하고픈 말을 다 풀어냈던 재화. 거기서 끝이었을까? 아니다. 다시 온 치킨 배달부는 그녀의 부탁대로 조심스레 문 앞에 치킨을 두고 간다. 그때 재화가 문을 연다. 감사하다며 드링크 한 병을 내민다. 엄마에게 속엣말을 토해놓던 재화가 결국 엄마의 말대로 돈을 부치고 아빠 옷을 사서 보낸 것처럼 말이다. 아웅다웅하던 희정을 위해 싸워주고 함께 밥을 먹듯이.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재화'식의 해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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