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 겨레의 명절, 추석이다. 농경 사회에서 한 해 농산물을 수확하는 절기는 일 년 중 가장 풍성한 시절이다. 그해의 수확물을 거둬들여 올해도 무사히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감사의 시간을 가지는 건 농경 사회의 가장 큰 의식이었다. 그렇게 농경 사회를 거친 세계 여러 나라들은 저마다의 '추수감사절' 행사를 치른다. 그러다 추석은 산업사회에 들어서며 변모한다. 산업의 중심인 도시로 떠난 이들이 추석 명절을 기회로 '고향'을 찾게 된 것이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가지만 '귀경 전쟁'이라 하여, 서울역 앞에 표를 사기 위해 밤을 새워 줄을 서던 시절은 바로 '산업사회' 한국의 자화상이다.

4차 산업혁명을 운운하는 시절이 된 2019년의 추석은 어떨까? 고향을 가더라도 차례만 지내고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기 위해 역귀성 전쟁이 추석 당일부터 벌어지는 시절, 취업과 결혼의 통과의례를 건너지 못한 젊은이들에게 가족들이 모이는 시간은 피하고 싶은 번거로운 요식 행사가 되었다. 그래도 가족이 모일 수 있다면야 괜찮지만 '가족 해체'와 '일인 가구 증가'가 현실이 되어가는 시절에 명절 분위기는 소외감을 에스컬레이션시키는 시끌벅적한 이벤트일 뿐이다. 바로 이 추석이라 더 외롭고 슬픈 이들, 드라마 속 인물들 가운데 누가 있을까?

차라리 그에게 고향 가는 차표 한 장을

OCN 드라마틱 시네마 <타인은 지옥이다>

얼마 전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한 종우에게 다가올 추석은 언감생심이다. 버스에서 내리다 자신을 치고 가는 승객 때문에 노트북이 망가지고 그 수리비 등으로 인해 언제 헐릴지 모를 재개발 지구의 19만 원짜리 고시원에 들어가 있는 처지. 선배의 도움으로 겨우 회사라고 들어 갔지만 온갖 잡일을 도맡아 해야 하는, 앞날이 보장되지 않은 인턴. 심지어 대표인 선배는 도움인지 비아냥인지 모를 과거를 끄집어내고, 실장이란 명칭의 직원은 디자이너 유정이 호감을 보이는 종우를 사사건건 못마땅해한다.

하지만 정작 심각한 건, 조금만 참자며 버티고 있는 고시원이다. 친절한데 묘하게 불편한 분위기의 주인아줌마를 비롯하여 306호, 313호의 동거인들. 그리고 하나둘씩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가는 사람들. 모처럼 취향이 같은 사람을 만나 반가워한 것도 잠시, 자신을 지켜보는 그의 시선이 어쩐지 따가운 304호 서문조(이동욱 분)까지. 아니 그저 그들이 보이는 불편한 분위기뿐만이 아니다.

자신의 방에 있어도 마음대로 핸드폰조차 통화할 수 없는 얇은 벽. 또한 방안의 상태가 사라진 310의 불만처럼 누군가가 자신의 방에 들어온 것 같은 의심. 거기에 4층 불탄 여성 고시원 층에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음, 그리고 동거인들이 나르는 이상한 짐부터 시작하여 그들의 행동에서 풍겨 나오는 범죄의 냄새. 그 모든 것들이 군대 시절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종우의 예민한 신경을 건드린다. 그의 작품에 드러난, 아니 그에게 잠재돼 있는 도덕적 경계를 흔든다.

OCN 드라마틱 시네마 <타인은 지옥이다>

비정규직 인턴, 그리고 개인적 공간조차 제대로 허용되지 않는 고시원에서의 삶은 이 시대 '가난한 청춘'의 자화상이다. <타인은 지옥이다>는 바로 갑갑한 이 시대 젊음의 상황에 '고어'한 장르의 설정을 더하며 벼랑 끝으로 내몬다. 그렇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자기 삶의 벼랑으로 발을 내딛는 종우에게, '구원'의 동아줄은 없을까?

아직도 귀경이란 단어가 어색하지 않은 추석 명절, 종우에게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는 차표 한 장의 기적이 일어났으면 어떨까? 그가 타고 올라왔던 그 고속버스를 타고, 종우를 노리며 조금씩 다가오는 고시원 사람들을 두고, 사사건건 그의 발목을 거는 회사 사람들을 두고 훌쩍 '추석'을 핑계로 고향으로 내려갈 기회가 있다면 어떨까?

다시 고향에 내려가 모처럼 어머니가 해주는 따뜻한 밥한술을 뜨고, 자기 방에 벌러덩 누워, 생각해 보니 왜 내가 그 지옥에서 아둥바둥대야 하나, 이러고. 어차피 꿈이 소설가라면 굳이 그 지옥 같은 타인들이 옭죄여 오는 도시 생활을 고집할 필요가 있을까라며 돌아볼 여유가 생기면 좋겠다. 제아무리 종우에게 내재된 폭력적 금단의 욕망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거기에 불을 지피는 '충분조건'이 필요한 법. 추석 귀경표 한 장이 그런 욕망의 제동 장치를 느슨하게 해줄 수 있었으면 종우의 비극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그러면 드라마가 안 되긴 하겠지만, 대신 사람 하나, 아니 여럿의 목숨을 살릴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꼭 피를 나누어야 가족인가

그래도 돌아갈 고향이 있는 종우에겐 선택의 가능성이라도 있다. <왓쳐>의 영군이(서강준 분)는 돌아갈 곳조차 없는 천애고아이다. <왓쳐> 그 모든 것의 시작인 15년 전의 그날, 영군의 눈앞에서 엄마가 칼에 찔려 죽었다. 그리고 영군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였다고 증언했다. 그렇게 홀로 남겨진 영군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랐지만 결국 다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때는 감옥에 있어도, 미워는 했지만 아버지가 있었다.

그런 아버지 김재명이 15년 만에 출소했다. 집으로 돌아왔다. 집이 낯선 건지, 훌쩍 커버린 아들이 어색한 건지, 아니면 아내가 죽은 집에 돌아온 게 면구스러웠던 건지, 아버지는 거실에서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웅크려 잠을 잤다. 그런 아버지에게 영군이 먼저 다가선다. 자신의 이름이 담긴 핸드폰을 사드리며 전화 꼭 받으라며. 방에 들어가 제대로 이불 덮고 자라며 잔소리 아닌 잔소리도 한다. 아버지 역시 다 큰 아들을 위해 밥을 짓고 계란찜도 하고 푸짐하게 아침상을 마련해 줬다. 아들의 운동화 끈도 묶어주며 아버지처럼 묶으면 절대 안 풀어진다며 호언장담을 했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아니 어머니보다 더 처절하게 손가락이 잘린 채 목욕탕에서 피투성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아버지는 영군을 지키기 위해 항소도 하지 않은 채 감옥에서 15년을 썩었다. 그리고 영군을 지키기 위해 출소했지만 결국 죽음을 당했다. 자신의 딸이 범죄자에게 손가락 절단을 당하자 그를 보복하기 위해 스스로 누군가의 손가락을 자르는 킬러가 된 거북이 장해룡에게도 가족은 지켜야 할 첫 번째 대상이었다. 하지만 이 아버지들은 결국 가족을 지키지 못한다.

그런데 어디 꼭 피를 나누어야만 가족인가. 영군이 김재명이 아들이라는 걸 알고 도치광(한석규 분)은 그를 자신의 팀으로 불렀다. 그가 오상도에게 총을 발사한 이유 역시 영군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자신이 김재명에게 덮어씌운 범죄에 대한 죄책감일 수도 있다. 하지만 16부 내내 도치광은 영군을 보호하기 위해 애쓴다.

한태주(김현주 분)는 어떨까? 검사 시절 단독으로 맡은 첫 사건에 대한 의욕으로 어린 영군을 부추겨 증언하게 만들었던 검사 한태주. 하지만 그 후 그 사건에 대한 의혹을 가졌던 한태주는 손가락과 함께 남편도, 가정도, 자존감도 잃었다. 이제 비리조사팀의 일원이 된 한태주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진실을 찾기 위해 언제든 누구와 협잡할 태세를 갖추었지만, 영군이에게만큼은 오랜 빚이 있다. 영군의 손가락을 절단하려는 남편에게 자신의 손가락을 먼저 자르라 애원할 만큼.

거북이를 발견하고 그를 향해 돌진하는 영군을 도치광과 한태주는 말린다. <왓쳐>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마치 아빠처럼 엄마처럼, 너는 그러지 말라며 영군을 부둥켜 안은 도치광과 한태주. 하지만 이 보호자 같은 두 사람과 영군은 드라마 내내 밥 한 끼도 나누지 못한다. 겨우겨우 이제 세상천지 홀로 남은 영군이 걱정되어 찾아온, 한태주와 조수연(박주희 분)만이 캔맥주를 나누었을 뿐.

추석, 오갈 곳 없이 어머니도 가고 아버지마저 간 그 집에 덩그러니 남겨진 영군. 그렇다고 도치광이 집은 있다지만 어디 갈 곳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이제 남편 전화조차 차단해 버린 한태주라고 나을까. 가짜 남자친구를 떨쳐버린 조수연은. 이럴 때 이들이, 16회 내내 회식 한번 못해본 이 비리수사팀이 영군이네 집에 모여 밥 한 끼라도 하면 어떨까 싶다. 꼭 추석 차례상을 함께 차려야 가족인가. 피를 나눠야 가족인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따뜻한 밥 한끼라도 나누어 먹으면 그게 바로 2019년다운 추석 풍경이 아닐까. 모르는 사람끼리도 모여 밥을 먹는 '소셜다이닝'도 하는데, 같이 부대끼고 수사한 한 팀인데, 굳이 홀로 긴 명절을 보낼 필요가 있겠는가. 이럴 때 한태주가 도와줬던 홍재식(정도원 분)의 아들이 소년원에서 출소라도 해서 함께한다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있겠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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