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론은 언제나 '위기'를 과장한다. 단순히 과장만 하는 것이라면, 언어의 한 속성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때때론 위기론은 없는 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위기가 아닌 것을 위기라 칭하기도 한다. 위기론은 언제나 필요에 따라 위기를 재조합해 낼 수 있을 때만 생명력을 갖기 마련이다.

MBC가 위기란다. MBC의 위기, 다시 돌아온 그리고 참 오래된 얘기다. 몇 년 전부터인가 매해 빠지지 않고 미디어계를 달구는 고정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기억하기로 2005년에 MBC의 시청율과 점유율의 하락폭이 KBS 보다 훨씬 가파르다는 사실이 수치로 확인되고, <신강균의 사실은>의 '구찌백 파문'까지 겹쳐지면서 심각한 위기론이 있었던 것 같다. 곧 이어 MBC 드라마의 심각한 부진과 정체가 이어지자 또 한 차례 위기론이 나왔던 것 같다. 어디 그 뿐이랴, 2006년 월드컵 때의 경이로운 '몰빵' 편성 당시에도, 황우석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전개되던 때에도 MBC는 언제나 위기였다.

▲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신임 방문진 이사들의 모습ⓒ송선영

사실, 돌이켜보면 KBS와 함께 독과점 하던 구조에 SBS가 보태졌을 때도 위기였고, 인터넷이라고 하는 새로운 환경이 도래한 것 역시 더할 나위 없는 위기였을 테다. 비교적 최근만 하더라도 상대적으로 MBC의 경쟁력을 더 갉아먹는 케이블 방송 체제의 구현 역시 MBC의 존폐를 가르는 위기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위기인가? 외부 요소는 적다. 철저히 MBC의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이하 방문진)때문이다. 더욱 범위를 한정하면, 김우룡 신임 방문진 이사장을 비롯한 한나라당 추천 몫의 이사들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조중동을 비롯한 이명박 정부가 MBC에 갖고 있는 편견과 억하심정 때문이다.

방문진 이사들이 임명되면서, 첫 업무 보고가 이뤄지자 마자 MBC 위기론이 눈덩이처럼 부풀어지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쟁점은 '프로그램의 공정성, 효율경영, 노사관계'이고, 변희재가 발행하고 있는 미디어워치에 따르면 세부적으로는 'MBC 이사회 구성, 노사단체협약 개정, ‘PD수첩’ 구상권 청구'가 핵심이란다. 그리고 이 위기론의 임계점에서 엄기영 사장이 끓고 있다. 현재 만들어진 방문진의 회로는 결국 어떻게든 정연주 사장을 잘라야 했던 작년 KBS 이사회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KBS 이사회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방문진 이사가 아무리 날고 긴들 보도국장을 직접 갈 순 없다. 본부장들을 입맛대로 교체하긴 더 까다롭다.(물론, 전혀 불가능하단 얘기는 아니다.) 오로지 한 점, 사장만 갈아치울 수 있다. 그렇다고 싫다고 막무가내로 내칠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럴싸한 핑계거리를 찾아야 한다.

정연주 해임 때 동원됐던 논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얼마 전 1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정연주 사장의 해임 근거는 '업무상 배임'이었다. KBS가 마땅히 돌려받아야 할 세금 1500억을 정연주 사장이 자리를 보전하기위해 포기했다는 무시무시한 논리였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그 무시무시한 논리가 왜 귀신 씨나락 까먹은 소리인지를 조목조목 짚는 이례적이고 모범적인 판결문을 제시하였다. 법조계와 언론계에서 지적해왔던, 해임은 물론 기소의 꺼리가 아니라는 주장이 사법적으로 확인된 것이다.

꼼꼼히 환기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당시 정부는 정연주 사장의 개인비리까지 샅샅이 뒤지고 또 뒤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감사원에서 찾아냈던 것이 서울고등법원의 세무소송 조정 권고를 KBS가 받아들인 '업무상 배임' 혐의였다. 이 혐의가 확정되기 전에 이사회는 회의 장소를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일사천리로 정연주 사장을 해임했었다. 까놓고 말해서 '축출'이었고, 노골적인 장악 드라이브였다. 이 전개를 MBC에 대입해보면 답이 나온다. 방문진 이사 교체는 순조롭게 이뤄졌으니, 누군가들을 '축출'할 것이고, 이후 노골적인 장악 드라이브를 걸 것이다.

그 축출의 대상이 엄기영 사장인가?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그렇다. 그러나 아직 단정하긴 이르다. 진짜, 목표가 무엇인지는 아직 속단할 수 없다. 다만, 지금 엄기영 사장의 진퇴는 저들이 말하는 위기 아닌 것의 위기가 진짜 위기로 닥쳐올 수도 있음에 대한 암시이다. 정연주 사장 해임이 정연주 개인의 물러섬이 아니라 KBS 전체의 후퇴로 귀결된 것을 바로 봐야 한다. 아직, 위기를 없다. 과거의 위기들이 그랬던 것처럼 위기는 위기임을 인정하고 직시하는 순간 해결할 수 있고, 스스로 해소되기도 한다. 만약, 정연주를 지켜낼 수 있었더라면, KBS가 광장에서 내쳐지는 수모는 없었을 것이다. 정연주 사장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를 쫒아낸 논리가 관철되고 관철되지 못하고의 차이 때문이다. MBC의 위기론 역시 마찬가지이다. 위기 아닌 것을 위기라고 싸잡는, 매도하는 논리가 관철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어진다. 일단은 엄기영 사장의 진퇴, 바로 그 자리에서 싸워야 하고, 또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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