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의 공정성’ 시비가 KBS에 이어 MBC도 마구 흔들어놓고 있다. 엄기영 MBC 사장은 31일 아침 확대간부회의에서 ‘방송의 공정성’ ‘효율경영’ ‘구조조정’ 등 세 가지 의제를 담은 발언을 했다. 방문진 다수 이사들의 ‘퇴진’ 압박에 맞서 내놓은 방안이다. 압박이 없었다면 내놓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효율경영’과 ‘구조조정’은 조직의 볼륨을 다루는 문제이지만, ‘방송의 공정성’ 시비는 MBC 편성.제작 주체들의 영혼을 건드리는 문제다. 긴장이 비교가 안 된다.

엄기영 사장은 엄한 잣대, 리뷰 보드, 공정성위원회 등을 키워드로 ‘방송의 공정성’을 언급했다. 이같은 엄기영 사장의 공정성 대책은 MBC의 전통을 잇는다는 맥락에서 나온 것으로 일단 굴복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후하게 치자면 공정성 시비와 관련한 향후 싸움의 여지를 마련했다고도 볼 수 있다. 특히 외부 인사의 참여를 통한 공정성위원회 설치 건은 굿 아이디어다.

“먼저 방송 측면입니다. 공정성을 더욱 높입시다. 모든 프로그램에 엄한 잣대를 우리 스스로 들이대서 공정성이 미흡한 프로그램은 전파를 타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보다 믿을 수 있는 방송, 보다 사랑받는 MBC를 만들기 위한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라고 봅니다. 저는 제가 중심이 된 리뷰 보드(Review Board)와 같은 것을 상설 운영하고 그동안 안팎으로부터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서 외부인사가 참여하는 공정성위원회를 설치하겠습니다.”

▲ 서울 여의도 MBC 방송센터ⓒ미디어스

방문진 이사 다수의 ‘공정성’ 시비

방문진 이사 다수는 이사 선임 시점부터 틈 날 때마다 ‘PD수첩’을 거론했다. 집요하게 공정성 시비를 걸어왔다. 이들은 8월 19, 20, 26일 MBC 경영진의 업무보고를 받는 자리에서도 공정성 문제를 집중 거론했다. 가령 남찬순 이사는 “문화방송을 언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황당하다는 느낌이 든다. 회사의 체계, 조직상 그렇게 해서 공정보도를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럽다”며 공세를 펼쳤다.

이같은 공정성 시비의 발단을 짚자면 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2007년 4월에 이른바 강동순 녹취록이란 게 세상에 공개됐다. 강동순은 ‘방송의 공적 책임, 공정성, 공공성을 실현하고, 방송 내용의 질적 향상 및 방송 사업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도모한다’는 방송위원이었다. 강동순은 “정말로, 이제 우리가 정권을 찾아오면 방송계는 하얀 백지에다 새로 그려야 됩니다... 새로 건물을 새로 지어야지. 방송이 그렇다는 거에요. 지금 최문순이나 정연주나 이거 껍데기야”라고 말했다. 당시 강동순은 녹취록 사태가 불거지자 자신은 정당원이 아니고 사석에서 한 말이기 때문에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강동순은 ‘빼앗긴 정권’ ‘빼앗긴 방송’을 ‘빼앗긴 공정성’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따라서 방송위원 자격 문제가 논란이 될 수밖에 없었다. 강동순은 이윽고 2008년 8월 KBS 사장 후보로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작년 촛불의 열기가 막을 내리던 7월 즈음,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PD수첩’이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방영한 미국산 쇠고기 관련 방송을 심의한 후 ‘시청자에 대한 사과’라는 중징계를 의결했다. ‘PD수첩’이 “방송의 객관성과 공정성 규정을 위반했기 때문”이었다. 박명진 방통심의위 위원장은 ‘PD수첩’ 제작진에게 “이리저리 불려 다니지 않을 팁을 드릴까요? 공정성을 지키시면 됩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PD수첩’에 대한 공정성 시비가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다.

2008년 9월 방송의날 행사에 나타난 이명박 대통령도 ‘공정성’에 대한 소신을 피력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방송의 공익성과 공정성에 대한 국민의 요구 수준이 매우 높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은 이 자리에 있는 우리 모두의 몫”이라고 말했다. YTN과 KBS 사장을 교체하고 특히 KBS의 인적 개편과 시사교양프로그램의 재편 등을 예고한 시점이었다. 예의 공정성을 바닥에 깔고 ‘편향된 방송’을 공격함으로써 방송 장악의 유리한 여론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다.

작년 가을에는 미디어발전국민연합(미발연)과 공정언론시민연대(공언련)가 잇따라 출범했다. 김우룡 씨를 고문으로 한 공언련은 명칭에 아예 ‘공정언론’을 내달고 나왔다. 당시 변희재 정책위원장은 “민영방송이라면 상관없지만 국민이 주인인 공영방송은 편파성을 띠면 안 된다. (‘미디어포커스’의 사례를 들어) 시청료는 보수적 국민도 내는데 보수시민단체의 주장은 한 번도 보도하지 않았다”며 불평을 터뜨린 적 있다.

변희재 씨는 방송의 공정성에 대해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일반 국민이 공감하는 보도를 하고, 그런 상식적인 실력을 갖추기 어려우면 양적 균형성이라도 우선 맞춰야 한다”는 생각이었고 사회적 갈등이 첨예한 이슈에 대해서도 “양쪽 진영이 살벌하게 싸우더라도 중간 지점이 있기 마련이고 그 중간지점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국가보안법 같은 경우가 그렇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가보안법에 대해 KBS 시사프로그램은 ‘폐지’를 이야기했으므로 공정하지 않다는 판단이었다. 변희재 씨는 수량적 공정성의 측면과 대립물 사이의 특정한 가치 지햐을 삼가는 것을 ‘공정성’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기계적 중립이라는 장치나 규범의 작동에 있어 수량적 공정성과 균형성은 그 자체로 검토될 수 있다. 이는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 스스로가 정체성으로 삼는 바이기도 하다. 가령 MBC 보도강령의 시사보도프로그램의 경우에도 정확성과 공정성을 강조하고, 공정성에 있어 양적 공정성과 질적 공정성을 엄히 다루는 데서도 확인된다.

▲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과 신임 방문진 이사들의 모습ⓒ송선영

‘양적 공정성’ 만으로 ‘공정성’ 대체하면 곤란

그런데 시사보도프로그램의 편성 제작에 있어 수량적 공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형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방송이 활자와 다른 전파라는 점에서 질적 공정성, 사회적 공정성, 프로그램의 가치의 문제를 공히 살피지 않으면 곤란하다.

홍성일 연구자는 일전에 한 토론회 자리에서 “근대성에 기원을 두고 있는 인쇄 저널리즘의 공정성이 단일한 소실점을 전제하는 회화적 원근법의 문자적 전환과 자기 참조적 관습 체계라면, 텔레비전은 그와 같은 문자적 전환의 단일한 재현 양식을 벗어나는 움직이는 영상을 활용함으로써 다면적인 시점의 발생을 가능케 하고 공정성을 분산시킨다”며 비교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특히 PD저널리즘을 이야기한 대목에서 근대적 저널리즘의 가치에서 일탈된 저널리즘 관습의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다. 가령 “PD는 텔레비전의 특성에 맞게 원고보다는 영상을 중심으로 사건을 보도하고, 스스로의 시각을 기자라는 익명에 감추지 않으며 시청자의 감정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문예적 태도를 취한다”고 말하고, 이같은 태도에 대해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이며 공정한 보도를 취하려 했던 근대적 저널리즘에서는 피해야 할 가치”였지만 “PD는 적극적으로 이러한 관습을 취함으로써 근대적 저널리즘의 공정성을 탈근대적으로 유동화시킨다”고 주장했다.

사회적으로 갈등이 되는 쟁점을 시사보도프로그램에 담을 경우, 편성.제작 주체는 주관적으로 옳다고 판단하는 방향으로 제작하는 ‘사회적 공정성’의 문제에 도달하게 된다. 이처럼 제작.편성 주체가 프로그램에 주관과 의지를 반영하는 순간 ‘양적 공정성’과의 충돌이 불가피한데, 현실 방송의 시사보도프로그램은 그와 같은 충돌 양상을 얼마든지 보여준다.

이근행 MBC 노조위원장은 한 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방문진 이사들이 밖에서 말하는 공정성은 정치적인 수사일 뿐이다. 방송 프로그램은 사안에 대해 비판의 양적 균형을 맞추는 것이 아니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것이다. 진실의 문제가 중요하다. 정량적인 균형성을 공정성이라고 이야기한다면 언론은 가치판단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다”라며 수량적 공정성 논란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처럼 제작.편성 주체의 주관과 의지가 반영된 방송의 ‘사회적 공정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1년 전에 만들어진 KBS 시사보도프로그램은 편파 시비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마찬가지로 이병순 체제 구축 이후 만들어진 시사보도프로그램도 그러하다.

시종일관 공정성을 문제삼아온 이명박 대통령, 강동순 전 방송위원, 박명진 전 방통심의위원장, 미발연과 공언련 인사들, 그리고 방문진 이사 다수, 이들이 공영방송 시사프로그램 제작.편성 주체에 주목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공영방송 정치적 장악의 타겟은 가치 판단을 담아 시사보도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제작하는 주체들이었다. 강동순 녹취록은 이를 원색적으로 보여준다.

“지금 선거 앞두고 무슨 드라마가 어떻게 됐든 무슨 쇼가 코미디가 어떻게 됐든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시사보도 교양 프로그램, 시사보도 프로그램의 PD가 누구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시사보도 프로그램의 PD가 전부다 정빠란 말이야. 걔네들을 갖다가 속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부장급 이상밖에 없어요. 걔들이 어떻게 사악한 짓을 하는지 부장급 이상은 다 알거든. 그거밖에는 방법이 없어.”

‘공정성’ 시비의 본질, 사회구성원 간 이념과 생존의 대립

근대 부르주아는 매스미디어의 계몽을 통해 스스로를 공중의 담지자로 격상시켰으며, 그들이 주도해서 대의제적 질서를 완성했다. 그들이 그러한 지위를 가지게 된 것은 미디어 생산시스템의 근대적 성격에 기인한다.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공영방송의 시사.보도프로그램 제작.편성 주체들은 대의제 미디어 질서 내부에서 상식과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미디어에 있어 상식과 보편의 가치 실현은 민주주의 발전에 조응하며 이루어졌는데, 이 성과에 힘입어 대의제 미디어 내부의 생산 주체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지난 1-20년간 축적된 방송(언론)개혁 운동의 성과이다.

이윽고 신자유주의 모순의 심화와 이에 따른 사회구성원간 이해의 대립이 첨예한 문제가 빈번해졌다. 공영방송의 편성.제작 주체들은 기존 방식의 상식과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 있어 크고작은 걸림돌을 만나게 됐다. 말하자면 공영방송의 제작.편성 주체들은 지금까지 보수와 개혁으로 양분된 대의제적 프레임 속에 자본, 권력과 일정한 긴장 관계를 유지하면서 보편과 상식의 민주주의 가치를 실현해왔지만, 정치권력이 본격적인 미디어의 자본화.시장화 추진에 나서게 되자 기존의 상식과 보편의 가치를 유지, 재생산 하는 것 자체가 어렵게 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한편으로는 공영방송의 정치적 장악과 재편을, 한편으로는 자본이 직접 프로그램을 편성.제작하고 유통함으로서 미디어를 이윤 창출의 수단으로 쓸 수 있도록 가능한 모든 여건을 제공해왔다. 국회에서 재투표, 대리투표 논란을 일으키고 공이 헌재로 넘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방송법 시행령 발표와 종편채널 허용 등 노골적인 조중동 특혜를 마련해주고 있다. 이처럼 미디어정책의 강력한 밀어붙이기는 오늘날 대의제 미디어가 맞닥뜨린 위기를 더욱 심화시킨다. 공영방송은 기계적 중립이라는 방송의 ‘양적 공정성’조차 위협받을 뿐 아니라 시나브로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서의 대의제 미디어의 정치권력에의 완전한 종속을 예고한다.

‘공정성’ 시비, MBC 울타리 넘어 사회적으로 논쟁해야

▲ MBC 엄기영 사장ⓒMBC
엄기영 사장이 31일 ‘정도’를 다시 강조한 것은 변화된 미디어환경과 정치 지형에도 불구하고 방송민주화운동의 성과로서의 MBC의 골격을 유지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의 지위를 보전하겠다는 의지의 확인인 것이다. 정연주 전 KBS 사장이 신파조를 곁들여 조언한 것도 적지 않은 힘이 되었을 테고, MBC 전사적으로 미래위원회를 구성하자며 노조를 포함해 내부를 챙긴 것도 대응 태세의 일환으로 보인다.

특히 ‘엄한 잣대’ ‘리뷰 보드’ ‘공정성위원회’ 등 ‘공정성’을 언급한 대목은 의미가 각별하다. 공정성위원회는 외부 인사의 참여를 열어놓았다. 방문진 이사 다수가 걸어온 공정성 시비에 백기를 들지 않고 저항의 여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런데 유감스럽지만 이 싸움은 패배한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방문진 이사 다수가 집요한 공정성 시비를 통해 MBC 시사보도프로그램 편성.제작의 체질을 바꾸는데 전력을 다할 것이란 점이다. KBS, YTN의 사례에서 보이듯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으로 인적 재편 감행에 나설 텐데, MBC 구성원들의 현재 조직력, 단결력으로는 방어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는 ‘효율경용’과 ‘구조조정’의 측면인데, 하반기에 사실상 MBC를 겨냥한 공영방송법과 민영미디어렙 추진으로 MBC 민영화를 추동하게 되면 버틸 재간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와 방통위가, 방문진 이사 다수가 현재의 미디어정책을 강행하는 한 지금까지 구축해온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의 틀은 어떤 형태로든 깨지게 되어 있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가 중요하다.

엄기영 사장이 ‘정도’를 이야기한 데 대해 긴장을 유지하며 힘을 실어야겠다.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을 사수해보겠다는 MBC의 수장으로서의 의지를 깎아내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다만 편성.제작 주체들은 그 이상의 저항의 모습을 시민사회와 미디어운동 진영에 보여주어야 한다. 후자가 가시화되지 않으면 MBC의 ‘정도’는 순식간에 허물어지게 되어 있다.

언론개혁시민연대는 31일 엄기영 사장이 ‘방송의 공정성’ ‘효율경영’ ‘구조조정’ 의제를 밝힌 데 대해 성명을 내고 “방문진 다수 이사들이 줄곧 제기해온 부당한 요구에 떠밀리거나 타협하는 방식으로 전개될 소지가 다분하다”는 우려를 표명했다. 이 세 가지 의제는 MBC나 엄기영 사장 스스로 설정한 의제가 아니라 방문진 이사 다수의 압박에 의해 강제되었다는 점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MBC 구성원 전체가 시민사회와의 교감을 통해 대의제 미디어로서의 공영방송의 합리적 가치를 사회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고, 편성.제작 주체들은 특히 안팎의 연대를 통해 ‘사회적 공정성’의 가치를 실현할 컨텐츠 생산의 물적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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