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입장에서는 언제나 명쾌한 것처럼 보이겠으나 언론이 복잡한 사안을 어떻게 보도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 만사가 잘했다 못했다로 나뉘어 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론이 관점을 가질 때에는 기준이 필요한데, 그게 ‘저널리즘’이다. 24일 보수언론 지면은 이들이 저널리즘의 문제를 어떤 수준에서 얼마나 고민하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든다.

청와대 우병우 민정수석 문제다. 이 사안의 성격은 이제 ‘조선일보 대 박근혜 정권’이라는 구도로 규정된다. 이런 구도는 MBC가 이석수 특별감찰관과 조선일보의 유착관계를 암시하는 보도에 가세한 이후부터 형성돼 청와대가 ‘부패한 기득권과 좌파’를 언급한 이후 완전히 굳어진 걸로 보인다. ‘부패한 기득권’이라는 표현은 여러 언론 보도를 종합할 때 조선일보가 산업은행-대우조선해양 비리에 직접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을 청와대가 너무나도 말하고 싶었던 결과로 보인다. 즉, 청와대가 주장하는 도식대로 하면 부패연루자가 될 위기에 처한 조선일보가 이석수 특별감찰관과 작업(?)을 해 별다른 근거도 없이 우병우 민정수석을 모함하며 정권을 흔들려고 한 셈이다.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22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진동 특별감찰관 사무실로 출근을 하며 취재진의 질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계속 강조하지만, 잘못한 사람은 책임을 지면되고 잘못된 사실은 바로잡으면 된다. 그러나 정권이 이런 정공법이 아닌 ‘프레임 전쟁’을 선택하는 것은 정치를 퇴행시키고 장기적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약화시킨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정치를 넘어 더 지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저널리즘의 문제다. 심판의 역할을 맡아야 할 언론들이 각자 선수가 돼서는 뛰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저널리즘은 공공성과 공정성을 요구받고 있다. 공공성은 보도 자체가 공적 문제의식을 바탕에 두고 이뤄졌느냐 여부로 판단한다. 기자 본인의 어떤 사적 욕망이나 언론사의 이해관계가 보도 내용을 좌우해서는 안 된다. 공정성은 언론이 특정 관점에 도달하기까지 얼마나 공정하게 사안을 다뤘느냐로 판단한다. 관점 자체는 편파적으로 비칠 수 있으나 이것이 한쪽의 주장만 들은 결과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공성이나 공정성은 칼로 무 자르듯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보도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객관’을 갖추기 못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성과 공정성의 가치를 지키는 여러 언론의 다양한 관점이 필요하다. 즉, 다양성이다. 그러나 여러 언론이 오직 다양하기만 해서는 잘못된 정보가 유통되거나 ‘기울어진 운동장’을 극복할 수 있는 공론 조성이 어려울 수 있다. 그래서 이 다양한 언론을 비평하는 ‘미디어 비평’이 있어야 한다. 물론 여기에도 공공성과 공정성이라는 원칙은 적용되어야 한다. 이 구조가 바로 설 때에야 현대적인 언론 생태계가 지속 가능한 형태로 유지될 수 있다.

이를 전제하고 물을 수밖에 없는 건 조선일보의 우병우 민정수석에 대한 최초보도다. 청와대의 도식대로만 본다면 조선일보의 이 보도는 회사의 이해관계에 의한 것으로 공공성을 훼손했다. 공공성을 훼손해야만 했던 바로 그 이유가 우병우 민정수석의 입장을 의도적으로 반영하지 않는 공정성의 훼손으로 이어졌다. 이런 면에서 조선일보의 보도는 ‘완전한 객관’에 의한 게 아니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미디어 비평의 관점으로 본다면 조선일보의 보도 내용은 최소한의 공공성을 갖추고 있다. 우병우 민정수석 처가 부동산 문제와 같은 의혹을 알게 됐으면서도 의도를 의심받을까 두려워 쓰지 않는 게 더 문제이다. 이 의혹은 우병우 민정수석의 공직자로서의 자격을 의심케 만든다. 만일 이 의혹 제기가 사실이 아니라면 우병우 민정수석이 적절한 해명을 하는 것만으로도 사태는 마무리될 수 있다. 그런데 우병우 민정수석의 해명은 오히려 의혹을 키웠고 이후 언론이 경쟁적으로 여러 의혹을 제기하면서 공직자로서 우병우 민정수석의 위치는 누더기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언론의 정상적 기능으로 충분히 볼 수 있다.

그러나 ‘프레임 전환’의 반환점이 된 MBC의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감찰 내용 누설 의혹 보도에 대해서는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다. MBC의 보도는 ‘기본이 갖춰지지 않았다’는 지적을 수차례 받았다. 누설 의혹을 입수한 경위와 전후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을뿐더러,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어떤 점에서 현행 법령을 위반한 것인지도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니 여의도 안팎에선 MBC가 청와대의 ‘하명 보도’를 자임한 게 아니냐는 얘기까지 돌아다닌다. 언론이 스스로 신뢰도 훼손을 자초한 것이다. MBC의 이 보도가 정권의 입맛에 맞는 부분만 일방적으로 보도하려 한 결과라면 공공성과 공정성을 명백하게 훼손한 게 된다.

이 사안에 대한 동아일보와 중앙일보의 태도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두 신문은 조선일보와 함께 ‘보수언론’으로 묶이는 신세이다. 애초 이들은 우병우 민정수석의 사퇴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계속 지적해왔다. 그런데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감찰 내용 누설 의혹이 제기되고 청와대가 ‘부패한 세력과 좌파’를 언급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감찰 누설 의혹이 제기된 다음날 지면 보도에서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이번 일로 ‘몸값’을 키워 야당의 공천을 받으려 한다는 취지의 정치권 인사 발언을 인용했다. 이런 관점은 ‘의도가 불순하다’는 청와대의 시각에 ‘조응천 배후론’이라는 양념을 얹는 상황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동아일보가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어떤 선거에서 무슨 공천을 받으려 한다는 것인지조차 분명치 않은 얘기를 무책임하게 인용한 것이야 말로 그 의도를 의심케 하는 행위다.

동아일보 24일자 지면 칼럼

동아일보는 24일 송평인 논설위원이 쓴 <특별감찰관의 어리석은 성실함>이란 제목의 칼럼을 지면에 배치했는데, 여기서도 이해할 수 없는 논리를 발견할 수 있다. 우병우 민정수석 거취는 정치적 선택의 문제였는데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끼어들면서 ‘법적 문제’가 돼 ‘정면대결’의 구도가 만들어 져 문제라는게 이 글의 핵심 내용이다. 동아일보의 이러한 인식이 옳은 것이 되려면 청와대가 정무적 판단을 통해 우병우 민정수석을 사퇴시킬 예정이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정치적 문제’를 ‘법적 문제’로 만든 것은 오히려 청와대다. MBC에 일종의 ‘제보’를 해 이석수 특별감찰관을 정조준했기 때문이다.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감찰’ 행위를 하는 것은 자기 본분인데, 거기에 성실하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 수 있겠는가. 왜 프레임 전환의 책임을 ‘어리석게 성실한’ 이석수 특별감찰관에게 묻는가.

중앙일보 24일자 지면 칼럼

황당한 것은 중앙일보도 마찬가지다. 중앙일보는 이날 김진 논설위원이 쓴 <채동욱, 조응천, 이석수…위험한 화살>이란 제목의 칼럼을 지면에 배치했다. 우병우 민정수석 관련 의혹을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감찰 누설과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의원이 청와대 공직기강비서관이던 시절의 정윤회 문건 보고, 채동욱 검찰총장의 혼외자 문제를 같이 묶어 “공직사회 기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결론을 내린 거다.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하나로 묶을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진 논설위원은 이석수 특별감찰관이 감찰에 경찰이 협조하지 않는다는 의혹을 무책임하게 제기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그 의혹을 어디에 어떻게 제기했다는 것인가. MBC가 보도한 ‘문건’이란 이석수 특별감찰관과 기자가 대화한 내용을 내부보고 형식으로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증거 없이 대통령 청와대 경찰을 의혹의 구렁텅이로 몰아 넣았다. 이는 명백한 국기 문란”이라고 쓰고 있으나, 정작 이 내용을 당사자들의 동의 없이 공개해 문제제기의 수준으로 끌어 올린 것은 어찌됐든 MBC다. 중앙일보식 논리라면 국기문란은 MBC가 저지른 것이다.

조응천 의원 문제도 마찬가지다. ‘시중에 이런 얘기가 돌아 다닌다’는 첩보를 묶어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보고한 것은 자기 직무를 충실히 한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이 의혹은 실제로 온갖 형태의 ‘지라시’로 돌아다니며 박근혜 정권의 통치를 어렵게 했다. 문건의 유출에 대해 지적하고 싶다면 경찰들의 문제를 지적할 일이다. 당시 사건을 판결한 재판부의 결론을 봐도 이 점은 분명하다.

채동욱 전 검찰총장 얘기는 더 황당하다. 국정원 선거개입 수사라는 문제와 채동욱 전 검찰총장의 혼외자 문제는 따로 다뤄야 할 일이다. 둘을 뒤섞어 놓고는 ‘채동욱 전 검찰총장이 검찰 독립의 수호자인 양 행세했지만 혼외자 의혹이 사실로 드러나면서 할 말이 없게 됐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은 도대체 어느 세상의 논리인지 알 수 없다. ‘검찰 독립의 수호자인 양 행세했지만 사실은 권력의 주구였다는 게 드러났다’거나 ‘사생활이 깨끗한 성인군자처럼 행동했지만 혼외자가 있었던 걸로 드러났다’고 하는 게 이성과 합리의 세상에서 통용되는 논리다.

이 신문들이 이런 무리수를 남발하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추측하기로는 두 가지다. 첫째는 이번 기회를 틈타 자기들끼리 ‘1등 신문’이라고들 하는 조선일보를 밟고 올라가보겠다는 것이요, 둘째는 이를 위한 디딤돌로서 박근혜 정권에 잘 보여 예쁨을 좀 받겠다는 것 아닌가 한다. 그러나 결론을 말하자면 이런 풍경은 똥 묻은 개가 또 다른 똥 묻은 개를 나무라는 우스운 것에 다름 아니다. 조선일보의 운명이 어찌될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차기 ‘1등 신문’의 타이틀은 제발 저널리즘 원칙에 충실한 모범적 언론이 차지했으면 하는 불가능한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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