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이다, 싸구려라서

내가 신문방송학을 ‘전공’하지도 ‘연구’하지도 않았음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만약, 그랬다면 ‘앎’이 ‘삶’을 배반한 지금 이 순간의 오욕 앞에서 치가 떨려 감히 키보드를 두드리지도 못했을 것이다. 맞다. 그렇다. 분명, 차마 감당할 수 없어서일 테다. 수를 헤아리기 힘든 신문방송 ‘전공’, ‘연구’자들이 지금, 이 순간을 애먼 침묵으로 삼키고 있는 이유는. 그 참을 수 없는 비감함 이해한다. 그리고 기꺼이 연대한다. 또한 심심한 위로도 전한다. 다만, 한 번 참기가 어렵지 그렇게 자주 참다보면 참는 것에도 인이 박혀 비위도 강해지고, 두루 마음도 평안해져, 뭐 한 몇 년간 세숫대야에 고여 있는 물 마냥, 그냥 완전히 썩어가지고, 이거는 뭐 감각이 없어져, 눅눅한 비닐장판에 쩍 달라붙어, 이제는 아무렇지 않은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도 그 절룩거리는 ‘앎’에 건투를 빌얼 줄 수 있을지, 미지근한 속이 적잖이 쓰려올 뿐이다.

필요충분조건의 성립

▲ 이춘근 MBC PD가 서초경찰서에서 서울중앙지검으로 이송되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 화면 캡처.
MBC 시사교양국 이춘근 PD가 긴급 체포됐다. ‘명예훼손 및 업무방해’ 혐의다. 누구의 명예, 어떤 업무의 방해냐고. 복잡할 건 없다. 이유는 그게 아니니까. 조선일보가 전했다. 검찰도 명예를 훼손할 의도는 중요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그는 단지 <PD수첩>의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의혹’을 만든 이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그가 긴급체포 되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은 그거 하나로 성립된다.

섬뜩한 간단함

수사(rhetoric)없이 질러가자. 그가 모독했나? 아니면 음란했나? 그것도 아니라면 국내 한우업체와 결탁이라도 했나? 미국에서 소를 키우는 농부들에게 악의를 품기라도 했냐는 말이다. 뭣도 아니다. 아시다시피 촛불 때문이다. 질리도록, 1년 째, 촛불이 <PD수첩> 때문이라고 우기더니, 결국 그렇다는 거다. 정확하게는 비틀거리는 소 영상 때문에, CJD를 vCJD로 썼기 때문이란 거다. 그러니까 <PD수첩>은 바이러스였는데, 그 바이러스에 감연된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좀비가 되어, 사회 혼란을 야기하고, 결정적으론 정부와 조중동을 비롯한 그 지지 세력을 공격했다는 거다. 그 간단함, 이젠 섬뜩하다.(▷ 참고기사 : 동아일보의 ‘바이러스 퍼뜨리기’ 전략)

자유 같은 건 없다

정부의 개입 없이 표현을 통해 사상, 의견, 정보를 전달하는 것을, 흔히 전통적 의미에서 언론의 자유라고 정의한다.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왜, 정부뿐이냐고. 자유라면, 자본, 법, 윤리 뭐 등등 ‘○○로부터’에 들어갈 기준들은 많지 않으냐고. 한가한 소리다. 지금 이 순간 그런 무제한적인 기준 나열은 결국, 언론의 부자유를 위해 복무할 뿐이다. 정부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면, 무엇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정부는 절대적 기준이다. 언론 자유 기준을 다양화해내는 건, 획일적 정부 권력을 극복해낸 이후의 문제이다. 단언하건대, 이제 언론에겐 자유 같은 건 없다.

그때, 이미 시작된

MB는 끝까지 반드시 개입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않는다. 오죽하면 농림부 장관과 정책관이 고발하겠나. 표현이 마음에 안 들면 긴급체포해간다. 영장 청구한다. 언론은 과정은 물론 결론으로도 정권에 적대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협박이 기세등등하다. 새삼스럽진 않다고. 이럴 줄 알았다고. 그럼, 여태 무얼 했나? 난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 임수빈 검사가 사표를 낼 때까지도. 떠들기만 신나게 떠들었지, 어떠한 행정적 조치도 취하지 않던 검찰이었다. 난 그게 워낙 ‘건’이 아니어서라고, 생각했다. 순진했나? 고작해야, 겁주고 구슬르고 타이르고 뭐 이러다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이용해서 징계하고 경고나 하고…. 아, 맞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어쩌면 이 모든 문제는 이미 그때 시작 된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때, 이미 완료된

지난해 7월 16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PD수첩>에 대해 중징계에 해당하는 ‘시청자에 대한 사과명령’ 결정을 내렸다. ‘영어 인터뷰를 일부 오역했고, 미국소비자연맹이나 휴메인소사이어티 관계자 인터뷰만을 방송한 점’ 등의 사유였다. 물론, 얼토당토않은 사유, 가당치않은 결정이었다. 언론 자유의 핵심이 자율적인 편집권에 있다는 것은 언론학 교과서 맨 첫 장에 나오는 기본 중에 기초이다. 언론이 정부와 친화적이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이들 조차, 우리 사회 언론의 자유가 일정정도 수준에 이르러 있다고 떠드는 이들 조차도 부정하지 않는 대원칙 같은 거다. 그런데 수십 년간 언론학을 가르쳐 온 이들이 참여한, 방송의 공정성과 공공성을 보장하기 위한 목적으로 존재하는 기구가, 정권에 충성을 보여주겠다며, 그걸 헐어버렸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자율적인 편집권에 정면으로 반하는 결정을 내렸을 때, 바로 그때부터 ‘표현의 자유’ 뭐 이런 민주적 전통과는 하등 상관없는, 새로운 퇴행의 질서는 이미 완료된 것이었다.

정부와 우애로운 언론만 생존하는

제 기능을 하는 언론은 때때로 당대의 권력과 불화한다. 언론의 무조건적인 정부 적대가 반드시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언론의 자유가 모든 제약으로부터 완전히 절대적인 언론 상황이란 믿음 역시, 낭만이다. 언론은 당대의 ‘상식’과 친화하면 그 뿐이다. 정부와의 적대 여부보단 과민하고 논쟁적인 저널리즘의 존재 그 자체가 사회적 목적이란 것이다. 정책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요구하는 정부와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이 부조화를 이루는 상황이 바로 민주주의다. 당대의 언론이 정부와 우애로운 조화를 이루고,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상황이라면 의심을 품어야 한다. 더군다나 그래야만 생존할 수 있다면, 가혹한 비정상이다.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물론, 그 모든 언론 행위에도 반드시 제약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정부에 의해서가 아닌 바로 언론에 의해서. <PD수첩>의 내용에 대해 과민하게 논쟁할 수 있다. 조선일보가 사설로 <PD수첩>을 조질 수 있고, 동아일보가 선동적 취재원을 활용하여 그 제작진을 조롱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미 그렇게 했다.

한 마디로, 싸구려

이춘근 PD가 잡혀갔다. 정부와 언론의 친화와 적대의 정치적 상황은 언제나 뒤바뀔 수 있다. 하지만 본질로서의 긴장은 영원한 것이어야 한다. 급진적 정부가 들어선 반대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 원리원칙이 무너지면, 사회는 급격히 불행해진다. 방송통신위원회가 <PD수첩>에 낙인을 찍고, 그 낙인을 조중동이 질리도록 선전하고, 검찰이 이를 근거삼아 긴급체포를 집행하는 구조의 사회는 비판적 언론인의 신체를 물리적으로 구속하는 정부는, 엄숙하게 말하기도 그렇다. 한 마디로, 싸구려이다. 반드시 타도된다. 도태된다. 눈속임은 오래가지 못한다.

별일없이 산다

감시자를 파괴하는 정부, 국민을 감시하는 정부, 그래도 다행이다. 당신들이 별일 없이 사는 것 같아서, 나는 이 글을 쓰며 장기하의 노래를 들었다. 싸구려라서 나는 역시 별일없이 산다.

니가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들려주마
아마 절대로 기쁘게
듣지는 못 할 거다
뭐냐하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니가 들으면 십중팔구
불쾌해질 얘기를 들려주마
오늘 밤 절대로 두다리
쭉뻗고 잠들진 못할거다
그게 뭐냐면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뭐 별다른 걱정없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이렇다 할 고민 없다

이건이건 니가 절대로
믿고 싶지가 않을거다
이것만은 사실이 아니길
엄청 바랄거다
하지만
나는 사는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하루하루 즐거웁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신난다
좋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나는 별일 없이 산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나는 사는게 재밌다
매일매일 하루하루 아주 그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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