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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하는 ‘서정시인 vs 쌈마이’다[주말, 그리고 말랑한 미디어] 영화 '쌍화점'의 쌍곡점③
남현지.완군 | 승인 2009.01.17 10:26

유하는 ‘서정시인’이다.  - by 남현지

내게 유하라는 이름은 ‘영화감독’보다는 ‘시인’ 뒤에 위치하고, <천일馬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 등 90년대 키치시의 개념을 등장시키고 풍자시로 유명했던 시인이기 보다는 빼어난 연애시를 썼던 시인의 이름이다.

유하가 뛰어난 연애시인인 이유는 언어적 재능에 있지 않다. 실연의 고통 속에 놓여 있을 때 그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연애 시는 외려 감정적 몰입을 방해할지도 모른다. 그의 수다스러운 풍자도 과도할 정도로 넘쳤던 비유도 간 곳이 없고 그 기교 사이를 흐르던 자기연민의 정서도 연애 시에서만큼은 없다. 떠나가는 연인을 두고 ‘아아 온 천지에 그대 수없이 물들고 나서야 비로소/ 그대 떠내려가는 모습 내게 눈부심이었습니다/ 그대 떠나보내야 내 사랑 자란다는 걸 알았습니다/(…)/ 떠나는 그대 눈부신 명상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유하라니.

   
  ▲ 영화 '쌍화점' 포스터 및 스틸컷  
 
그 간극 사이에는 ‘나도 네 이름을 간절히 부른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결국/ 내가 내게 깊이 취했던 시간이었다’ 라는 직접적인 사랑의 반성이 있다. 사실 이 반성은 위험하다. 많은 시인들이 이 지점에서 사랑을 도덕으로 만들어버리거나 대승적 사랑을 설파하는 길을 게으르게 선택하고는 했다. 하지만 주체의 증상과도 같은 사랑의 동일한 반복은 교훈이 아니라 ‘끝내 그녀에게 다다르지 못하리’라는 단 하나의 앎에 도달해서야 끝난다. 그 앎은 대상에 대한 자기 투사를 멈추고 비로소 삶에 타자를 등장시키며 새로운 사랑의 공간으로 진입하게 만든다. 하지만 타자라는 한 축의 등장은 주체에게서 인식의 차원을 옮기는 소동, 몸을 바꾸는 고통이기도 하다. 사랑은 그래서 존재와 존재의 위무라기보다는 차라리 혁명과도 같다.

유하의 연애 시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겪어낸다. ‘그녀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이 감염되고 싶’고, ‘그녀의 전부를 앓고 싶었’다고 지금은 부끄러울 편지 제법 썼을 이 시인은 ‘내가 날아들었던 당신이라는 불꽃’이 실은 ‘나를 비추는 거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가지도 더 들어가지도 못하는 마음의 잉잉거림’이라는 ‘사랑의 지옥’에서도 ‘욕정이 끝난 자리에도/ 사랑이 살구꽃처럼 피어나기를’ 꿈꾸면서 자기 자신에게로 회귀하는 동일성의 욕망을 가로질러 마침내 사랑이 가리키는 본질, 동일성의 불가능을 긍정하기에 이른다. 소유의 불가능, 소통의 불가능, 합일의 불가능, 영원의 불가능을 긍정할 때 대상은 안타까움이자 그리움이며 놀라움의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존재가 되고 다만 느낄 수밖에 없는 서정시의 근원적인 대상이 된다.  

나 그대를 느끼네/ 한순간 햇살에 찔려./ 그대, 내 몸이 아니기에/ 이 아픈 매혹이여.// 나 그대를 느끼네/ 입 안에 맴도는 휘파람처럼./ 그대, 소멸하지 않는 흥얼거림이여.// 나 그대를 느끼네/ 한순간 물살에 두 무릎 꺾이듯.// 그대,/ 흘러가도 흘러가도/ 마침내 그대로인/  강물의 움직임이여// (‘느낌’ 전문)

그리하여 유하는 ‘그대’ 뿐만 아니라 세상 곳곳의 ‘겨우 존재하는 슬픔, 보이지 않는 그 목숨들의 건반을 딩동딩동 두드릴 수만 있다면!’ 이라고 탄식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 곳에서 유하는 더 이상 세상도 사랑도 내 맘 같지를 않아 서러웠던 청년이 아니라, 네 마음과 함께 흐르고 싶은 서정 시인의 손길로 세상을 만진다. 시는 설명할 수 없고 볼 수 없는 세계, 한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고 마는 그 찰나의 존재를 드러내는 형식이고 우리는 시를 통해 그 미지를 매번 새롭게 경험한다. 그리고 그 경험이 다시 우리의 삶과 사회를 재구성하는 동력이 된다. 그럴 때 시는 뒷방노인네의 풍류나 멋 부린 낭만의 기호도, 자기연민에 취한 독서도 아니다. 비록 지식과 교훈은 아니지만 사랑과 같은 ‘앎’인 것이다.

그렇듯 뒷모습으로 돌아간 파도들/ 또다시 부서지러 몰려 옵니다/ 한번 부서져본 사랑/ 대단한 권세인 줄 알았습니다/ 그대여/ 내 사랑 더도 말고/ 저 파도 같을 겁니다 (‘끝없이 부서지는 파도같이’ 中)

하지만 2000년의 마지막 시집 이후로 시인 유하는 멈추어 있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전복하면서 나아가는 몇 안 되는 시인이었다. 언제고 다시 그가 사랑을 못 다한 얼굴로 돌아와 시를 쓴다면 이제는 세상의 모든 연인들이 그를 알아보리라 전한다.

유하는 ‘쌈마이'이다.  - by 완군

1.
솔직히 ‘언어보다 더한 것들 그러나 결국 언어인 것’들의 세계에 살았던 유하를 난 잘 알지 못한다. 다만, ‘현실보다 더한 것들 그러나 결국 현실인 것’들의 세계로 건너온 그 사람에 관해 조금 알 뿐이다.

   
  ▲ 영화 '쌍화점' 포스터 및 스틸컷  
 
2.
유하의 영화는 반복이다. 그는 폭력이라는 ‘자명한 악’에 반대한다. 그의 전략은 아주 간단하고 또 명료하다. 그의 영화는 일단 무감하다. 그러나 집요하다. 그는 언제나 ‘폭력보다 더한 것들 그러나 결국 폭력인 것’들에 집착한다. 결국, <결혼의 미친 짓이다>는 ‘가족’이라는 폭력에, <말죽거리잔혹사>는 ‘학교’라는 폭력에, <비열한 거리>는 ‘사회’란‘ 폭력에 반대하는 영화였다.

3.
쌍화점을 보지 않았다. 회의가 일었다. 과연, ‘자명한 악’을 반대한다는 것의 동시대적 가치와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주 비겁한 선택은 아닐까? 그렇다. 어쩌면 그건 악을 상대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 가운데 하나다. 아무리 이명박을 반대해봐야 경인운하를 막을 순 없다. 들뢰즈는 “사형은 폐지되는 경향을 보이고 학살은 같은 이유로 증가한다”고 충고한 바 있다. 그런 혐의를 두고 보면, 실제로 그의 필모그래피가 또 그렇다. 그는 언제나 이미지화된 악에 대해서만 반대해왔다. 더군다나 예술의 권력이 언어에서 영화로 완전히 넘어온 이후에 투항해온 그 아닌가. (물론, <바람 부는 날에는 압구정동에 가야한다>가 있긴 하지만.)

4.
옳거니. 그 투항, 너무 상투적이었다. 예컨대, 세련됨과 영리함만으로 스타일이 보증되는 것도 아니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결국 결혼이 객관적 조건에 의한 것인가, 주관적 사랑에 의한 것인가를 묻는 영화였다. 엄정화가 물었기에 망정이지 소녀들을 위한 패션잡지에서나 수행할 수준의 질문이었다. “대한민국~ 학교! 다 좆까라 그래~!”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는 <말죽거리잔혹사>는 학교를 잠재적 상태의 폭력으로 이해하는 대중적 인식론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않았다. <비열한 거리> 역시, 잔인하게 권력을 즐기는 아버지에 의한 폭력의 악순환이 지배하는 사회를 담담하게 관조할 뿐이었다.

5.
게다가, 유하는 언제나 여자 주인공을 통해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선언해왔다. 엄정화는 속물이었고, 한가인은 가출했고, 이보영의 순애보는 유부남과의 사랑 이후에나 찾아온 것 이었다. 말하자면, 사랑학적 관점에서 그의 영화는 물질적 동물이되 비물질적 욕망을 지닌 남자와 정치적 동물이되 물질적 욕망을 지닌 여자의 사랑 이야기였다. 

6.
그렇다. 유하는 끝내 이 모든 것을 극복할 꿈을 꾸지 않는다. 다만, 자신 앞에 주어진 것들 앞에서 모두 필연적으로 희생시킬 뿐이다. 감우성은 옥탑방에 유폐되었고, 권상우는 사회로의 적응을 택했고, 조인성은 죽었다. 가혹하리만큼 담담한. 반대하되 저항하지 않았던(혹은 못했던) 자들에 대한 기록. 이 비감하되 아슬아슬한 행보이다.
 
7.
그렇다면, 유하 영화의 미덕은 무엇일까? 현실적인 것들의 언어적 구성. 저항의 망설임. 혹은 그저 그런 양념들을 잘 버무리는 한 편의 멋진 기획. 그것도 아니라면 뻔한 망설임에 대한 정밀화. (갑자기 뭘 쓰려고 했는지 가슴이 답답해온다.) 결론은 유보한다. 난 아직 쌍화점을 보지 않았다는 비겁한 변명이 있으니. 다만, 한가지. 이질적인 것들이 만나서 지극히 안정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죽음 직전까지의 ‘삶’이다. 유하는 그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쌈마이’이다.

 

남현지.완군  mediaus@media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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