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부터 한국 영화 2편의 흥행 질주가 눈부시다. <과속스캔들>은 ‘가족’이라는 불변의 주제와 기획영화의 저력을 유감없이 과시하며 600만 관객을 돌파했다. 그리고 또 한편의 문제적 영화 <쌍화점>은 3주 연속 예매율 1위를 기록하며, 300만 관객을 사뿐히 넘어섰다. 이번 주, <주말 그리고 말랑한 미디어>는 바로 ‘<쌍화점>의 쌍곡점’이다.

한 편의 영화를 말하기 위해선 한 마디로 충분할 때도 있고, 책 한 권으로 모자랄 수도 있다. 쌍화점은 현재, 그 모호한 경계에서 첨예하게 논쟁 중인 영화다. 미디어스는 쌍화점을 이해하기 위해 언어-유하-조인성-이미지로 이어지는 관계의 하이픈들을 택했다. 어쩌면 쌍화점은 이성과 광기 그리고 서사와 이미지의 현재값이다.

즐감하시라. 예술연대의 오늘형식을. 그리고 논쟁하시라. 참을 수 없는 조인성의 엉덩이와 주진모의 눈빛에 대해.

※ 백승찬 기자와 짝이 되는 글을 주기로 했던 허지웅 프리미어 기자가 개인적인 사정으로 글을 주지 못하셨습니다. ‘<쌍화점>의 쌍곡점’이란 제목을 100% 반영하지 못한 점 사과드리며, 홀로 청청하게 된 백승찬 기자에게도 심심한 위로(!)의 인사를 건넵니다. 꾸벅~

<쌍화점>은 삼각 관계를 중심에 둔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좀처럼 다뤄지지 않던 고려 시대의 복식과 연회를 눈여겨 볼 수도, 외세의 압력을 받는 고려에서 현대의 한국을 유추할 수도, 팔과 다리가 잘려나가는 액션을 즐길 수도 있다. 하지만 영화의 고갱이는 왕-호위무사-왕후가 맺는 삼각 관계의 구축과 파열이다. 다만 그 중 한축이 남성 사이의 동성애라는 ‘특이’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 여느 드라마, 영화와 다를 뿐이다.

▲ 영화 '쌍화점' 포스터 및 스틸컷

그래서 “진부하다”는 평도 없지 않았다. 이것 저것 다 거둬내면 남는 것은 닳고 닳은 사랑 싸움뿐이라는 이유에서다. 아침 드라마나 주중 미니시리즈에서 지겹게 보아온 그런 관계를 다시 극장에서 봐야할 이유란 조인성같은 스타의 존재, 개봉전부터 소문난 ‘화끈한’ 베드신뿐이라는 주장이다.

진부한 것은 볼 만한 가치가 없을까. 삼각 관계를 진부하다고 평한다면 호메로스는 진부하고 세익스피어도 진부하다. <일리아스>가 그리는 트로이 전쟁이란 것은 결국 메넬라오스와 파리스와 헬레나의 삼각 관계가 요란하게 번진 것 아니었던가. <오셀로>란 데스데모나와 캐시오의 관계를 오해한 오셀로의 눈먼 질투를 그린 치정극 아니었던가. 진부해 보이는 것이 반복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잠자리의 아이에게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는 지겹게 반복된다. 하지만 아이는 매번 같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른다. 알면서도 또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야기의 힘이다. 관건은 진부한 것을 얼마나 흥미로운 시선으로 정밀하게 묘사했느냐에 달려있다.

쌍화점은 얼마나 신선하고 흥미로운가. 유하 감독 스스로 밝혔듯 쌍화점은 “육체성의 축제가 근간이 되는 영화”다. 상업영화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빈번한 섹스신이 등장하고, 남성간의 진한 키스 장면도 볼 수 있다. 일부 관객은 “내일 자시에 다시 오겠다”는 왕후의 대사에서 보듯, 등장 인물들이 ‘육욕’을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장면에서 웃음을 터뜨린다고도 한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있었던 일이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강의 시간에 교수가 포르노그래피를 틀어주자, 젊은 대학생들은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이 때의 웃음은 두 가지 기능이다. ‘신성한’ 강의 시간에 포르노를 보고 있다는 당황스러운 감정을 무화시키는 동시, 자신은 포르노를 즐겨보지 않는다는 결백의 증명. <쌍화점>에 표현된 직설적인 욕망을 마주하며 터뜨리는 한국 관객의 웃음도 이와 무관치 않다. 반면 일부 관객은 더 급진적인 퀴어 영화가 되기를 포기한 쌍화점의 상업적 전략에 실망감을 표하기도 한다. 쌍화점이 양측에서 조롱받는 현상이야말로 이 영화가 상업영화의 주요 타깃인 대중이 허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육체성’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왕은 호위무사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무사의 사랑은 충(忠)의 도움을 받아 지탱됐다. 왕후와 함께 맛본 열락의 경지는 충의 기반을 허물었으니, 자연스레 왕에 대한 사랑도 사라졌다. “몸 가는데 마음 간다”는 통속적 교훈을 이처럼 진지하게 전해주는 한국영화는 최근에 볼 수 없었다.

유하 감독은 스스로 “100% 언어적인 인간”이라고 밝혔다. 이 말은 “기억에 남는 장면이 없다” “액션이 약하다”는 류의 비판에 대한 겸허한 반성이자, ‘시인’이라는 ‘출신성분’에 대한 알리바이다. 상업영화는 이야기와 그림이 찰떡같이 달라붙어 서로가 없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경지를 꿈꾼다. 감독은 아직 스스로가 그 경지에 오르지 못했음을 자인한다. 그러나 완벽한 이야기꾼이자 솜씨 좋은 화가인 사람이 대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유하 감독은 전자의 위치를 노릴 것이다. 단점을 감추기보다 장점을 극대화하는 편이 쉽고 안전하다는 건 많은 예술가들이 전해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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