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명의 선생님이 파면·해임됐다. 3명의 사립학교 선생님들도 결과는 이미 나와 있고, 절차만 남겨두고 있다. 서울시교육청은 또 한번 명확한 메시지를 던졌다. 국제중 설립 강행, 현대사 특강에 이어 시간을 계속 뒤로 밀어가겠다는 확고한 의지의 표현이다.

교육은 ‘현실’이다. 그리고 ‘미래’이다. ‘교육’은 생활의 문제이고, 정체성의 문제이고, 실천의 문제이다. 우린 ‘교육’을 통해서만 과거를 반성할 수 있고, 미래를 현실화해 낼 수 있다. 교육의 문제는 곧 미디어의 문제이다. 미디어가 사회의 감각이라면, 교육은 사회의 이성이다.

<미디어스>는 속절없이‘나를 해임하라’란 문패의 릴레이 기고를 진행한다. 뒤로 가는 시대라면 차라리 해임당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들을 초조하게 기다린다. 해직 교사는 오늘 우리 모두의 존재론적 반영이다. 사회의 시간대가 자꾸 뒤로 밀려나면 결국, 우리 모두는 설 자리를 잃을 것이다.

▲ 전교조 교사들이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서울시교육청의 중징계 방침 철회를 촉구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아이들을 좀비로 만드는 일제고사

올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온 나는 중학교에 없었던 모의고사를 보면서 일어나는 아이들의 변화를 보며 일제고사가 이런 시험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중학교 때의 아이들은 그게 허풍일지언정 에너지가 있다. 자신이 대통령, 교육부 장관, 축구선수, 연예인, 카피 라이터, 드라마 작가, PD, 요리사 등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는 나중에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공부는 한 중간쯤 해도 그렇게 기죽어하지 않는다. 그런 자신감 속에 나오는 기를 통제하는 것이 사실 중학교 교사의 힘든 점이다. 어떤 때는 아이들의 그러한 기를 견디지 못해 애들이 차라리 자기라도 했으면 싶지만, 아이들은 자지 않는다.

그런 중학교 교사로서 생활을 뒤로 하고 올해 고등학교에 왔다. 나는 1학년 담임을 맡았다. 중학교에서 갓 올라온 아이들과 함께 고등학교 생활에 적응하는 셈이었다. 처음에 아이들은 의욕으로 가득차 있었다. ‘성적 올려 좋은 대학에 가보겠다’ ‘동아리 활동 등 여러 가지 재밌는 활동들도 해보겠다’ ‘남자 친구도 사귀어보겠다’…. 그렇게 새로운 공간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을 가지고 왔던 아이들의 기를 가장 먼저 죽이는 것은 3월 모의고사이다. 그래도 중학교 내신으로 중간이었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변두리 학교의 중간은 전국 꼴찌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되고, 중학교 때 90점이 넘는다고 생각했던 아이들은 전국적으로는 내가 중하위권 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꿈꾼 대통령, 교육부 장관, 축구선수, 연예인, 카피 라이터, 드라마 작가, PD, 요리사 등은 수도권 근처의 4년제나 전문대를 나와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모든 꿈은 ‘in 서울’로 수렴된다. 아이들이 꿈이 없는 것은 정말 꿈이 없어서가 아니라 일제고사를 통해 자기가 꿈을 꿀 자격도 없고 필요도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아이들은 학교 좀비 생활을 시작한다.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하는 아이들대로 ‘경쟁의 신’에 영혼을 판다. 실질적으로 자신의 입시능력을 올려주는 곳은 학원이기 때문에 학교에서는 내신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만 수업을 들으며, 수행평가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하지 않고, 수업 외에 선생님이 뭔가 얘기를 할 때는 단어장을 꺼내든다. 학원에서 공부를 집중하기 위해 잠을 청하기도 한다. 공부를 안하는 아이들은 ‘태업의 신’에 영혼을 판다. 학교 밖을 나가 있는 시간에, pc방이나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에, 아르바이트 시간에 살아있기 위해 학교에서는 정말 단 한 시간도 깨지 않고 자기도 한다. 아니면 학교에서 자기보다 약한 존재를 괴롭히며 자기의 존재감을 확인하기도 한다. 즉 학교에서 아이들이 보여주는 모습은 ‘좀비’로서의 존재이다. 졸업장을 따기 위한 매트릭스에 일시적으로 몸의 회로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좀비’로 살기를 강요당하는 아이들은 자신의 이런 스트레스를 약한 존재를 공격함으로써 해소하기도 한다. 가끔씩 신문을 떠들썩하게 하는 10대의, 끔찍한 범죄나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 왕따나 학교폭력은 ‘좀비’로서의 삶을 강요당하는 아이들의 공격이다. 이런 일제고사가 초등학교에 부활하는 것은 17살 때부터 좀비로 사는 아이들을 10살 때부터 좀비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 우리가 아이들의 생명력을 빼앗아 피가 돌지 않는 하얀 좀비로 만들고 있으니, 앞으로 이들의 복수는 더 끔찍해질 것이다.

10명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어쨌든 일제고사의 날은 왔고, 나는 이틀 전에 학교 앞에서 하교길의 아이들에게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학생들이 일제고사날 함께 등교거부의 행동을 하자는 선전물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일제고사 날에는 시감을 거부하지는 못하고 아이들에게 일제고사의 문제점을 알리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쓰고 조퇴를 했다. 몇몇 아이들이 나와 함께 조퇴를 하고 싶어했지만 무단조퇴가 입시에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나 혼자 니네 몫까지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학교에서 배운 것>
유 하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런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

오랜만이구나. 중간고사를 맞이하여 공부가 안된다고 칭얼대면서도 열심히 공부를 하는 모습들을 보며 뭐라고 말을 붙여야할지 왠지 뻘쭘해져서…… 오늘은 전국 학업성취도 평가의 날이구나. 두 달에 한 번씩 모의고사라는 형태의 일제고사를 보는 너희에게는 ‘빨리 끝난다’는 것이 가장 의미있는 날인지도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오늘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가 학생들의 성적을 근거로 줄서는 날이겠지.
대학을 가려면 줄서는 게 너무 익숙해서 이게 무슨 문제인지 잘 모르겠다고 느낄 수도 있겠지만, 가끔은 너무나 재미없는 것도 모의고사에 나올까봐 두려워서 가르치고 있는 나의 모습을 보며 그런 수업시간에 3분의 2 이상이 자는 너희들을 보며 이 시험이 나와 너희들을 얼마나 억누를까 또 고민해본다.
너희들을 처음 만난 3월을 기억해. 너희들은 정말 고등학교 생활을 열심히 해보겠다는 의욕자체였지. 무엇이든지, 설렘과 떨림으로 가득한 너희들을 보며 나도 너희들을 열심히 사랑해보겠다고 다짐했었지. 근데 지금 너희들의 모습을 보면 고등학교 생활에는 익숙해진 것 같은데 3월의 설렘과 생기는 어디론가 사라진 것 같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반복된 시험과 오르기는커녕 너희의 발목을 잡는 성적이 우리의 힘을 다 빼놓은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해.
너희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뿐이야. 학생부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잘 싸워주지도 못하고 (2번 찾아가서 깨지고는 나도 의욕을 잃고 있지) 시험이 너희를 압박해도 지켜주지도 못하고, 애들이 자든 어쩌든 재미없는 것만 시험에 나온다고 줄줄 읽으면서 8년째 교사를 하는 지금 내가 왜 그리도 선생님이 되고 싶었나 생각해본다.
오늘 일제고사를 거부하기 위해 등교 거부하는 학생들 중에 선생님이 아는 학생이 있어. 따이루라는 청소년 인권활동가인데, 오늘 기자회견을 하고 촛불 집회를 할 거야. 아마 장학사들이나 교장, 교감들이 그들을 방해하려고 하겠지. 오늘 그 학생들과 함께 하러 조퇴를 하려고 해.
아마 이런 나의 생각과 다른 사람도 있을 것이고(어차피 경쟁사회면 시험을 자주 볼수록 자극이 되니 좋은 거 아닌가?), 1학기 때 촛불집회가 그렇게 많았는데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현실을 보며 반대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거야. 아님 담임은 우리가 입시에서 이기도록 지름길을 알려주지 않고 왜 저런데 관심을 갖나?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한 가지 확실한 건 너희가 입시에 이기든 지든 누군가 이기는 사람이 있다면 지는 사람도 있을 거고, 그 진 사람도 내 학생일 거라는 거지. 그리고 아무 소용없다고 생각하는 속에서도 조금이나마 계속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기에 느리게나마 뭔가 변화가 있다고 생각해. 뭔가 다른 사람을 억압하는 사람들은 반대의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잘 모르거든.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드는 것이 너희를 사랑하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 너희가 경쟁에 지더라도 최소한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 공부못하는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소외되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것!
늘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너희와 자유롭게 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잔소리하는 것도 미안하고, 늘 흔들리는 너희를 차라리 억압해서 입시에 몰두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도 미안하다.

그날 많은 조합원들이 나처럼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일제고사에 저항했다. 어떤 사람은 담임 편지글을 보내고, 어떤 사람은 시감을 거부하고, 어떤 사람은 체험학습을 안내하고, 그러던 중 사립까지 포함 열 분의 선생님들이 파면·해임 처분을 받았다. 그들의 징계사유는 다음과 같다.

징계사유 1. 성실의 의무 위반 - ‘정부시책인 국가수준학업성취도 평가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담은 가정통신문을 학교장 승인 없이 발송하여 응시여부를 회신하게 함으로써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학생을 양산하였다’.

징계사유 2. 명령 불복종 - ‘시험당일 체험학습을 불허한다는 명령을 어기고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담임편지에 소개하여 학교장 승인 없이 임의승인하고, 체험학습 참가아동을 무단결석 처리하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은 점’.

징계사유 3. 자료제출 불응 - ‘일제고사와 관련된 경위서 작성 및 문답 확인 감사를 거부한 점’ 이라는 요지의 징계 사유에 대한 답변입니다.

▲ 서울시교육청으로부터 '부당 중징계 처분'을 받은 초등학교 교사가 부당함을 호소하고 있다. ⓒ민중의소리
나는 담임을 하면서 아이들의 소소한 일상을 담임편지로 보냈지만 한 번도 학교장의 결재를 받은 적이 없다. 그리고 체험학습의 경우도 갑작스레 생긴 집안일로 가는 경우가 많아서 다녀온 후 사후결재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가장 황당한 것은 세 번째 징계사유이다. 잘못이 없으니 없다고 말한 것이 죄목으로 추가된다는 것이 어느 사법체계에 있단 말인가? 징계를 당하신 어떤 선생님의 경우에는 교장실에서 언성을 높였다고 품위유지의 의무를 어겼다는 것이 징계사유로 올라갔다고 했다. 학교일에서 문제가 있어서 교장실에서, 얘기하는 것조차 이제 파면·해임을 불사해야한다는 것인가? 이것이 징계사유라면 담임편지를 학교장 결재 없이 올해만 3번 발송한 나도 징계를 받아야 한다. 이제 담임편지를 한번 보낼 때마다, 교장실에 한 번 들어갈 때마다 나는 내가 잘릴지 아닐지를 고민해야 한다.

대한민국 입시지옥에서의 교사는 하루종일 굴욕감을 느껴야 한다. 아이들을 사랑한다면서 ‘시험에 나오는 거니까 꼭 외우라’는 말을 해야 수업이 굴러가고, 평가를 반대한다면서 수행평가를 해야 그나마 수업의 권위를 유지할 수 있고, 인권을 존중한다면서 교문지도를 묵인해야 한다. 그나마 전교조는 나의 이런 굴욕을 굴욕이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구정물로 뒤덮인 나의 일상에서 불순물을 가라앉히고 맑은 물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었다. 피말리는 입시지옥 경쟁시스템에서 나도 아이들처럼 좀비가 되어가지만 적어도 약자인 아이들을 물어뜯어 내 피를 공급받지는 않도록 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런데 이제 굴욕을 굴욕이라고 하지 못하고, 불순물을 불순물이라고 하지 못하게 되었다. 나도 아이들처럼 완벽한 좀비가 되어 약한 아이들의 피를 빨고 살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나는 10명이 아니라 나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 단순히 내가 잘리지 않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긴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고 생각했던 내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서…….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