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날 때부터 악당으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 배트맨을 괴롭히는 조커만 해도 양친에게 학대당하기 전까지는 악의 기질이 자라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악당을 대표하는 프롤로 주교도 처음부터 악당은 아니었다는 이야기를 서두에 꺼내고 싶다.

2막의 넘버를 보면 알겠지만 프롤로는 신과의 결혼을 맹세한 사제다. 아폴로와 디오니소스라는 대립적인 관점으로 프롤로를 보면, 프롤로는 아폴론적인 삶의 방식에 가까운 캐릭터로 분류할 수 있다. 아폴론적으로 살아간다는 건 감성보다는 이성을 우월한 가치관으로 두고 삶의 가치관을 정립한다는 걸 의미한다.

감정보다는 논리가 앞서고, 카오스적인 혼돈을 싫어하며, 질서를 추구하고 이성적인 삶을 최우선적 기치로 삼는 삶의 행동 양식을 추구한 이가 프롤로다. 프롤로가 이성주의자로 삶을 살아갈 때만 해도 그는 악당이 아니었다. 신의 법을 인간 세계에 구현하고자 하는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이다.

▲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마스트엔터테인먼트
그런데 이성과의 결혼을 포기하고 가톨릭에만 헌신할 것을 맹세한 사제이던 프롤로를 흔들리게 만든 건, 보잘 것 없는 한 집시 여인 에스메랄다가 광장에서 춤을 추는 장면을 목격하면서부터이다.

남성은 시각적인 요소에 약하다. 아니, 취약하다고 보는 것이 온당할 정도로 시각적인 자극에 참으로 민감하게 반응한다. 구약성경을 보면 다윗이 결혼한 유부녀 밧세바에게 한눈에 반한 것도 밧세바의 목욕하는 모습을 보고 일어난 사단 아니던가. 다윗과 마찬가지로 프롤로 역시 에스메랄다의 자유분방함과 아름다움을 보고 한눈에 반한 것이리라.

집시들은 아폴론적인 질서를 추구한다기보다는 디오니소스적인 자유분방함에 가까운 이들이다. 마음 내키는 대로 공연하고,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술을 마신다. 논리보다는 감성이 크게 작용하고 이런 자유로움 가운데서 존재의 의미를 찾는 이들이 집시들이다. 아폴론적인 질서를 추구하는 프롤로 주교와는 정반대의 가치관을 추구하는 디오니스소적 가치관의 인물이 집시들이자 동시에 에스메랄다다.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에스메랄다와 프롤로 주교를 아폴론적 질서와 디오니소스적 자유분방함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때 특이한 점은 아폴론적 질서가 디오니소스적인 자유분방함에 함락당한다는 점이다.

▲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마스트엔터테인먼트
프롤로는 파리의 근위대장으로 하여금 집시들을 추방하고 격리할 것을 명령한다. 집시 가운데 한 구성원인 에스메랄라도 배척하야 하는 것이 맞지만, 프롤로의 마음 가운데에서는 에스메랄다를 배척하지 못하고 연정의 감정을 품는 사태가 발생한다.

프롤로가 에스메랄다를 얼마만큼 연모하는가는 1막의 넘버 ‘벨’을 통해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겉으로는 집시를 멸시하고 추방하는 아폴로니즘의 주장을 내세우지만, 프롤로의 내면은 에스메랄다라는 집시에게 반한 마음을 아폴로니즘적인 질서로도 되돌릴 수 없어 괴로워하고야 만다.

집시 아가씨의 아름다움이라는 디오니소스적인 자유분방함이 몇 십 년 동안 지켜온 프롤로의 아폴로니즘을 거꾸러뜨리는 거다. 이성이 무질서에게 함락당하고, 논리가 자유분방함에게 무장해제 당하는 디오니소스적인 위대함이 에스메랄다에게 정신적으로 함락당하는 프롤로 주교를 통해 읽을 수 있는 뮤지컬이 <노트르담 드 파리>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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