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세월호 참사 당시 청와대 지시에 따라 KBS 보도 및 인사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 불명예 퇴진한 길환영 전 KBS 사장은, 그해 8월 대통령을 상대로 한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길환영 전 사장은 자신에게 적용된 해임 근거가 사실과 다르고, 해임 과정에서 충분한 소명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행정법원 제2부(재판장 박연욱)는 KBS이사회가 든 △직무능력 상실 △세월호 오보 책임 △재정적자 등 3가지 해임사유 중 재정적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유가 타당하다며, 길환영 전 사장의 소를 기각했다고 지난 3일 밝혔다.

“조직관리능력에 문제… KBS 사장으로서 직무수행 못해”

재판부는 우선, <방송법>을 근거로 “KBS는 공정하고 건전한 방송문화를 정착시키고 국내외 방송을 효율적으로 실시하기 위하여 정부가 자본금 전액을 출자하여 설립된 국가기간방송으로서(방송법 제43조 제1항, 제5항), 방송의 목적과 공적 책임,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실현해야 하고 국민이 지역과 주변 여건에 관계없이 양질의 방송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공적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어, “KBS 사장은 공사의 대표자이자 공사 업무를 총괄하는 자로서 경영성과에 대해 책임지는 지위에 있고(방송법 제51조 제1항), 그 임기가 3년이며, 정관이 정하는 바에 따라 공사의 직원을 임명하고 예산을 편성하는 등 공사의 운영과 관련하여 중요한 권한을 부여받고 있다”며 “위 규정들을 단순히 선언적인 의미를 갖는 규정으로 볼 수 없으므로, KBS 사장에게는 공사의 업무를 총괄하면서 방송의 목적과 공적 책임, 방송의 공정성과 공익성을 실현하여야 할 의무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 지난해 5월 29일, KBS노동조합과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가 양대 노조 체제가 된 이후 처음으로 길환영 퇴진 및 KBS 정상화를 내걸고 공동 파업을 시작했다. ⓒ미디어스

재판부는 △KBS 다수 구성원들이 직종, 직군, 직급을 불문하고 원고(길환영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보직사퇴하고 양대 노조가 공동 파업에 돌입해 KBS 내부 조직체계가 극심한 파행을 은 점 △KBS뉴스가 세월호 오보를 해 국가기간방송으로서의 신뢰가 훼손된 상태에서 뉴스 및 프로그램이 축소, 대체되는 사태가 벌어져 공적 기능이 더 심각하게 훼손된 점 △사태의 직접적 원인은 원고가 공영방송 독립성, 공정성, 자율성을 침해했다는 의혹이 확산됐기 때문인데 일련의 사태에 대해 신속하고 적절하게 대응하고 수습하지 못한 점 △원고가 KBS 다수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잃고 조직관리능력에 문제를 드러냈으며 오히려 해임처분 이후 비로소 공사의 운영이 정상으로 회복된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길환영 사장은 KBS 사장으로서 공적책임을 실현해야 할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원고가 주장하는 사정들을 함께 고려하여 보더라도 이사회가 더 이상 원고에게 사태 수습 및 직무수행능력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보아, 시청자의 권익을 보호하고 국민의 화합과 조화로운 민주적 여론 형성의 책임을 수행하여야 하는 KBS의 공적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대표자 겸 업무총괄자의 지위에 있는 원고에 대한 해임사유로 삼은 것도 그 재량권의 범위를 벗어난 것이라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왜 똑같이 ‘오보’를 냈는데, KBS의 ‘오보’가 더 문제였나

재판부는 특히 ‘국가기간방송사’이자 ‘재난주관방송사’인 KBS의 위치와 역할을 중대하게 판단했다.

재판부는 “뉴스 보도에 있어 일반적으로 오보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위 인정사실에 따르면 세월호 사건 당시 KBS 비롯한 다른 방송사들도 동일한 오보를 했고, 이는 정부의 잘못된 발표에 기인한 것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어 일반적으로 이를 해임사유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할 수 있다”면서도 KBS가 타 언론사에 비해 보다 더 무거운 책임을 갖는다는 점을 명시했다.

▲ 지난 3일, 대통령을 상대로 한 행정소송에서 패소한 길환영 전 KBS 사장 (사진=KBS)

재판부는 △KBS는 국가기간방송으로서 국가의 재난주관 방송사이므로 단순히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재난 상황을 정확히 확인하여 제대로 보도하여야 하는 지위에 있고, 특히 세월호 사건은 국민들에게 크나큰 충격과 슬픔을 안긴 국가적 재난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정확한 보도의 필요성이 높았던 점 △다른 사람의 말을 인용보도 할 때 사실인지 확인하는 데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KBS 방송강령> 제7항 등의 규정을 위반한 점 △오보로 인해 피해를 입고 공영방송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신뢰에 큰 타격을 입었다면 KBS를 대표하고 업무를 총괄하며 직원 임명권을 갖는 원고의 책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점 △세월호 보도 문제는 ‘직무능력 상실’의 배경이 된 일련의 사태와도 연결돼 있다는 점 등을 거론하며, KBS이사회가 ‘세월호 오보’ 문제를 해임사유로 삼은 것이 부당하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만 KBS이사회가 주장한 ‘재정적자’의 경우, “원고의 재임기간 중 경영판단에 실패하여 재정 위기가 가속화됐다거나 원고의 경영상 잘못이 해임처분에 이를 정도의 것이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할 것”이라며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직무능력 상실 및 세월호 오보 책임이라는 처분사유는 “KBS 설립 목적과 공적 책임의 실현에 직접적인 지장을 초래하는 중대한 사유라고 할 것이므로, 위 사유만으로도 피고(대통령)가 행한 이 사건 해임처분의 타당성을 인정하기에 충분하다”며 “이 사건 해임처분은 피고의 재량권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재판부는 또한 “피고는 정부인사발령통지의 형식으로 이 사건 해임처분을 하면서 원고에 대한 해임처분의 법적 근거 및 구체적인 해임사유 등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지 않은 사실은 인정된다”면서도 “이 사건 처분은 그 성질상 사전통지나 의견청취가 불필요하다고 볼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될 뿐만 아니라, 원고는 이 사건 해임처분에 이르기까지의 전체적인 과정을 통하여 처분의 원인이 되는 사실과 처분의 내용 및 법적 근거를 충분히 알 수 있어 행정소송을 통해 위 처분을 다투는 데에 별다른 지장이 초래되지 않았다고 보인다”며 해임 과정에서 ‘절차적 하자’가 있었다는 길환영 전 사장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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