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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을 읽는 3가지 코드, 아르헨티나·예수회·프란치스코[리뷰]해방신학자 김근수의 <교황과 나>를 읽고
한윤형 기자 | 승인 2014.08.13 09:42

가톨릭 세례명을 가지고 있다. 1990년대 초 어머니가 느닷없이 신앙을 가지게 되었고, 그녀는 남편을 설득하지는 못했지만 두 자녀를 ‘천주교회’로 인도했다. 친한 친구 따라 개신교 교회 가는 행위에 대한 약간의 종교적 탄압도 있었다. 1993년의 어느 날 몇 달에 걸친 교리 공부를 마친 후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은 스스로 ‘안드레아’라고 정했다. 아동용 위인전에서 볼 수 있었던 유일한 교인인 김대건 신부의 세례명이었다. 아버지는 “순교자의 삶이 좋아 보이냐”고 물어보았고 나는 그저 “이름이 예쁘다”라고 답했다. 신앙이 깊지 않았기에 그 대답은 진심이었다.

성당을 다닌 기간은 부모와 동거를 했던 2000년까지였다. 돌이켜보면 내겐 신앙이 있던 적이 없었다. 성당을 드나듬은 어머니와의 친교, 한국 사회에서의 청소년기의 숨구멍, 성당에서 만난 이들과의 교우관계였다. 성당을 마지막으로 나간 것은 2005년, 제7보병사단 신병교육대에서였다. 훈련병의 종교행사 참석이 의무였고 교회나 절은 아무래도 적응할 수 없었다. 신앙은 잃었지만 문화는 익숙했다. 내가 성당에 다니던 시절 천주교회는 나 같은 이를 ‘냉담자’라고 불렀다. 지금은 ‘쉬는 교우’라고 부른다고 한다. 2000년대 후반까지 나는 종종 “가톨릭에 가장 우호적인 교파는 ‘냉담 가톨릭’이다. 이들은 귀찮아서 교황을 뽑지 않기에 교황이 도마 이후 공석이다”라는 농담을 하곤 했다. 
 
흥미롭게도 성당을 그만 다니기 시작한 순간부터 나는 가톨릭으로부터 지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알게 된 어떤 이가 예수회 성향의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버나드 로너간에게 큰 영향을 받은 토미스트(토마스 아퀴나스주의자)였다. 그를 통해서 아퀴나스의 <이교도 반박대전>이나 버나드 로너간의 <내적 말씀>의 몇몇 구절을 접했다. 
 
하지만 그것들은 신학에 관심이 없는 내게 큰 영향을 미칠 내용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마침 읽게 된 비교종교학자 오강남의 <예수는 없다>에 등장한 “교회 밖에도 구원은 있다”라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관용정신과 내가 겪은 천주교회의 차이가 관심사였다. 
 
또, 그를 통해 처음으로 ‘가톨릭 사회교리’를 접했다. 아예 천주교서울대교구사회사목부에서 낸 <가톨릭 사회교리>를 구입했다. 이 책 <교황과 나>에 최초의 개혁교황으로 등장하는 레오 13세가 만든 <새로운 사태>라는 회칙은 감동을 넘어 충격이었다. 이 책에서 나오듯, 레오 13세는 ‘노동자들의 교황’으로 불렸다. 나는 가톨릭 사회교리를 통해 가톨릭이 사회개혁에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2003년, 내가 성당을 드나들던 시절 ‘교황의 대명사’였던 요한 바오로 2세가 이라크 전쟁을 반대했다. 반가웠지만 그가 가톨릭 내에선 그리 진보적이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기에 큰 감동은 없었다. 2005년, 내가 군대를 간 사이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시대가 열렸고 그는 남다른 ‘포스’로 네티즌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2013년, 교황도 사임을 할 수 있다는 전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대가 열렸다. 교황은 검소함과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으로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서 받았던 그 충격과 직관이 다시 한번 내 삶에 다가온 것이다. 
 
교황을 읽어내는 세 가지 코드, 아르헨티나·예수회·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쏟아져나온 책이 대형서점의 한 켠을 점령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교황과 나>는 주목할 만하다. “교황 프란치스코는 요즘 내가 사숙하는 스승”(p16)이라고 말한 해방신학자 김근수가 교황의 삶, 로마 가톨릭과 교황제의 역사, ‘개혁 교황’들의 역사, 보수적 교황과 해방신학의 투쟁, 21세기에 필요한 종교와 천주교회의 과제 등을 상세하게 살핀다. 
 
교황의 이야기는 2004년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화재 현장에 출연한 성직자의 모습에서부터 시작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대주교이자 아르헨티나의 추기경 호르헤 베르골리오는 소방차가 달려오기도 전에 화재현장에 도착해 구조 활동을 펼쳤다. 사건 이후 법원은 4년이 지난 2008년에야 수십 명에 이르는 관계자 중 14명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는데,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어영부영 넘어가려는 정부와 검찰을 강력히 비판하며 여론을 형성했다. 결국 상급심으로 올라갈수록 화재의 숨은 원인이 드러났고 피의자들은 호된 심판을 받아야 했다고 한다.
 
한국으로 치자면 세월호 참사 같은 사건에 개입하여 이 사건의 법적인 진상규명에까지 추기경이 적극적으로 발언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국에서도 과거 김수환 추기경이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발언한 바는 있으나 이처럼 구체적인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김수환 추기경 선종 이후엔 추기경이 두 명이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외려 사회원로로서 추기경의 역할은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저자 김근수는 ‘교황 프란치스코’를 설명하기 위해 “모국 아르헨티나의 정치·경제·사회적 환경, 예수회라는 선교에 적극적인 수도회의 영향, 가난한 자를 돕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가르침”(p40)을 봐야 한다고 말한다. 
 
“베르골리오가 사제로서 장년기를 보낸 1973년부터 1992년까지 아르헨티나는 정치와 경제의 격동기였다. 이 시기 첫 10년은 군사독재정권이 시민 3만 명을 살해하고 민주주의를 탄압했다. 이후 10년은 민간 정부가 집권했으나 미국의 투기 자본이 본격적으로 흘러 들어오면서 국가 경제가 과열과 추락을 거듭했던 시기였다”(p54)
 
아르헨티나의 상황은 한국 사회의 경험에서도 유추할 수 있는 것들의 연속이었지만 더욱 극단적이었다. 그리고 이 상황 속에서 인구의 90%가 가톨릭 신자인 나라의 성직자들은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이 나라에서 사제들은 종종 군부독재자들에게 살해를 당하기도 했다. 훗날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는 베르골리오는 가장 투쟁적인 사제는 아니었으나 그들에게 연대를 했고 나이를 먹을수록 더 진보적으로 변했다고 한다. 
 
물론 남미의 천주교회 역시 마냥 진보적인 것은 아니었고 기득권세력에 영합한 경우가 훨씬 많았다. 1976년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아르헨티나 천주교회는 “침묵으로 상황을 주시한다”라는 “역사에서 두고두고 비웃음을 사게 될 결정”(p59)을 내렸다. 당시 베르골리오 신부는 예수회에 입문한지 몇 년 지난 아르헨티나 예수회 소속 모든 회원을 책임지는 관구장이었다. 예수회는 교회 안의 신분 상승을 위해 애써서는 안 되는 조직이었으나 그는 드물게도 교회 안에서 거듭 부름을 받는 성직자에 속했다. 
 
   
▲ 12일 오후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복 미사 장소인 서울 광화문광장에 대형 십자가가 설치되는 등 시복식 준비 작업이 한창이다. (연합뉴스)
 
여기서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가 등장한다. 사제 베르골리오는 신학교에서부터 예수회에 입문했다. 예수회는 선교에 열정적이었고 그는 일본으로 선교를 갈 꿈을 꿨지만 폐질환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꿈을 이루지 못했다. 만약 선교를 떠났다면 교황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예수회는 종교개혁의 시기에 나온 가톨릭 내부의 혁신운동이었다. 외적으로는 “선교의 십자군”(p41)이었고 “교계 내부에서는 쓴소리를 서슴지 않는 야당”(p41)이었다. 예수회 소속 교황은 예수회가 탄생한지 500년 동안 없었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처음이다. 예수회 소속 신학자 중 유명한 이로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가장 크게 공헌한 신학자 칼 라너와 해방신학의 권위자 혼 소브리노 교수가 있다. 소브리노 교수는 저자 김근수의 스승이기도 하다. 
 
그런데 교황은 예수회원이면서도 예수회 창립자인 로욜라의 이름을 쓰지 않고 경쟁관계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창립자의 이름을 택했다. 예수회는 교계의 야당이라지만 교황에게 절대충성하는 조직이었다. “반면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3세기에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것을 내세우면서, 세속적이고 특권적인 로마교황청에 변화를 촉구하는 데서 출발했다”(p51). 결국 프란치스코 교황이란 이름은 그 자체로 교회를 개혁하려 애썼던 “두 수도회의 특성을 한 몸에 조화시킨”(p51) 것이라 볼 수 있다. 
 
저자 김근수는 교황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딴 것에서 세 가지 메시지를 읽는다.
 
“첫째, 교회는 가난해야 하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 프란치스코 성인은 교회가 가난을 해결해야 한다고 제시한 분이다. (...) 둘째, 교황과 교회가 전쟁을 반대해야 한다는 메시지다. (...) 성 프란치스코가 나일 강 지역으로 가서 십자군에게 전쟁 대신 대화를 촉구하고, 이집트의 이슬람 지도자도 만나 대화의 물꼬를 튼 것은 오늘날에도 모범이 될 만하다. (...) 셋째, 교회와 교황이 세계적으로 종교 간 대화에 앞장서겠다는 뜻이다. (...) 성 프란치스코는 이집트 최고 지도자 술탄을 만나 종교에 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써 모범을 보였다”(p52~54)
 
군사독재가 끝난 이후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2000년 요한 바오로 2세가 가톨릭교회가 역사에서 지은 죄와 잘못을 고백하도록 지시했을 때 군사정권 시절 교회 인사들의 죄를 고백하는 문헌을 적극적으로 발표했다고 한다. 그는 군사정권 시절 자신이 탄압받는 사제들을 남몰래 도운 사실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교회 차원에서 과거사 속죄를 주도했다. 이 시기 한국 천주교회도 사과성명을 발표했지만, “그러나 사과문 준비 과정에서 당초 수십 장에 달하던, 잘못에 관한 구체적 사례들은 수정 과정에서 대부분 사라졌다. 막판에는 선언적이고 관념적인 내용들만 남았다”(p65)라고 한다. 그는 민주화 이후에도 빈부격차를 만들어내는 정권에 비판적이었다. 정부의 수장은 그가 교황이 된 후에도 며칠 동안 축전을 보내지 않았다. 
 
‘개혁 교황’의 역사
 
요한 바오로 2세 시절의 라칭어 추기경, 교황 베네딕토 16세의 퇴임으로 ‘교황 프란치스코’는 탄생할 수 있었다. “유럽이 아닌 비유럽 출신의 교황, 사회적 문제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개혁 교황의 출현은 어쩌면 필연”(p99)이라 말할 정도로 가톨릭교회가 위기의식을 느끼는 상황이었다. 보수적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가 임명한 추기경이 대다수였는데도 그들은 베르골리오 추기경을 택했다. 
 
김근수는 이렇게 말한다.
 
“베네딕토 16세가 자진 사임한 후 나는 그를 다시 보게 되었다. 사실 이제껏 그에 관한 나의 견해는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 그는 거의 평생에 걸쳐 해방신학과 교회 내 개혁파 인물들을 탄압한 인물이다 (...) 그러나 2012년 85세 나이에 <나자렛 예수>라는 3부작 가운데 마지막 3권을 그가 출간했을 때,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책에는 최근 학자들의 수준높은 글까지 인용되어 있었다. 그 바쁜 교황직 업무에도 그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것이다. 85세 나이에 그런 역작을 아무나 쉽게 쓸 수 있을까. 86세 나이에 교황 자리를 내려놓기가 그리 쉬운 일일까. 베네딕토 16세의 학구열과 겸손 앞에 나는 마땅히 고개 숙여 존경을 표한다.”(p102)
 
신대륙 출신의 첫 교황, 예수회 출신의 첫 교황, 처음으로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택한 자, 베르골리오 추기경, 교황 프란치스코를 둘러싼 이름은 이토록 많다. “로마의 호사가들은 교황과 교황청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라고도 표현”(p86)하는 그 조직의 선택은 그렇게 갑작스러웠는데, 막상 그것이 닥치자 필연처럼 인지되었다. 내부자들에게도 ‘너무 일찍 온 개혁’이라 여겨지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사제 서품이 된 이가 두 명의 보수교황 시대를 넘어 저자 김근수가 평가하는 세 번째 ‘개혁 교황’이 된 상황은 놀랍다. 
 
김근수는 ‘노동자들의 교황’ 레오 13세(재임기간 1878~1903)과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개최한 요한 23세(재임기간 1958~1963)을 개혁 교황의 전임자로 꼽는다. 레오 13세는 애칭에서 보이듯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문제에 최초로 대응한 이였다.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하면서 가톨릭 교회의 일신을 이루었다.
 
   
▲ 한국천주교 의장 강우일 주교(가운데)가 12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 문화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교황 방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강 주교는 이날 "방한하는 프란치스코 교종(교황)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을 선포할 것"이라고 말했다. (연합뉴스)
 
요한 23세는 지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렇듯 많은 에피소드를 낳은 이였다. 그가 만든 일화들은 다음과 같다.
 
“요한 23세는 5년이 채 안 되는 짧은 재임 기간 가운데 교황의 신분으로서는 이례적인 동선을 여러 차례 보여주었다. 일례로 그는 휴일이나 밤에 몰래 바티칸을 빠져나와 로마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그 때문에 위스키의 한 종류인 '조니 워커'(Johnny walker, 영어로 요한을 존john이라 하고, 자주 걸어 다닌다는 점에서 Walker)라는 별명을 얻었다. 외부 인사도 다양하게 만났다. 소련 수상인 니키타 흐루쇼프의 사위를 비롯해, 영국 성공회의 수장인 캔터베리 대주교, 스코틀랜드 교회 의장, 일본 신도의 대신관 등을 만났다. 캔터베리 대주교, 일본 신관과 교황의 만남은 역사상 처음이고, 무신론자인 소련 서기장의 사위를 만났다는 것도 당시로서는 화제였다. 교황이 먼저 대화의 손을 내민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파격을 좋아했다. 로마에 있는 어느 교도소를 방문했을 때 그는 제소자들에게 ‘여러분이 저를 찾아올 수 없기 때문에 제가 찾아왔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의 부인인 케네디 여사가 바티칸을 방문했을 때는 서투른 영어로 ‘케네디 여사, 케네디 부인’이라고 반복해서 연습하다가 막상 그녀가 나타나자 무의식적으로 두 팔을 벌리고는 ‘재클린!’이라고 소리쳤다. 당대 최고의 미인이자 뉴스메이커를 맞이해 시골 노인의 모습을 감추지 못한,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이다. 또 공산국 외교관을 만난 자리에서는 ‘당신이 무신론자인 줄은 알지만 이 노인의 축복을 받지 않겠습니까?’라고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엉뚱한 농담으로 좌중을 썰렁하게 만드는 것도 그의 특기 중 하나였다.
 
1963년 가을, 요한 23세는 임종을 앞두고 세속의 가족들에게 유산을 증여했다. 한사람당 20달러 정도였다“(p178~180)
 
김근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다. 가톨릭교회의 자생력, 원상회복력은 실로 경탄할 정도였다. 인류가 만든 조직 가운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조직이 가톨릭교회라는 말은 전혀 근거 없이 생겨난 것은 아닌 듯 했다. (...) 신학에서 역사 개념의 등장, 성서에 대한 역사적 접근, 성서 중심의 교회 생활, 전례의 쇄신, 평신도의 적극적 역할, 세상에 대한 경험적 분석 방법 인정 등은 이제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자산이었다.”(p169) 비록 교황청과 교회의 개혁에 대해선 다루지 못했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자본주의 시대의 사회문제에 대응할 뿐만 아니라 그에 걸맞게 신앙의 기틀을 일신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해석으로부터 이른바 그 유명한 ‘해방신학’의 물꼬도 트였다. 
 
탄압자들과 그로부터 태어난 교황 프란치스코 
 
역사는 일직선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다시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지지하는 이들의 입장에선 ‘보수 반동’의 흐름이 등장한다.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로 이어지는 35년의 시간이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의 부족한 신학적 식견을 유능한 신학자를 곁에 두는 것으로 보충해야 했다. 이 신학자가 바로 뒷날 베네딕토 16세가 되는 독일의 라칭어 추기경이다. 라칭어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자 친구였다. 어찌 보면 해방신학에 대한 요한 바오로 2세의 보수적 태도는 라칭어 추기경한테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사회개혁에 진보적 목소리를 내긴 했지만, 반대로 교회개혁을 외면하고 해방신학자들을 탄압했다. 그 결과 그의 임기 중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 정신은 크게 후퇴하고 말았다”(p185)
 
라칭어도 젊어서는 진보적 신학자였다. 칼 라너와 교류가 있었고 1962년 제2차 바티칸공의회 때는 개혁파로서 조언을 했다. 그러나 1968년을 계기로 “역설적으로 체제 유지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보수적 신학으로 전향”(p190)했다. 그는 “해방신학과의 전쟁에서 교회사에서 유일무이하게 강한 언행으로 그의 투쟁성을 입증했다”(p191~192). 1978년 교황이 된 요한 바오로 2세는 1981년 라칭어 추기경을 ‘교황청의 2인자’ 자리인 교황청 신앙교리성성 장관으로 임명했다. 그 후 삼십 년 동안 라칭어 추기경은 해방신학을 탄압했다. 
 
책 첫 부분, ‘발행인이 말하는 김근수’에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저자 김근수와 대표적 해방신학자인 스승 소브리노 신부 사이에서 있었던 일화다. 김근수는 소브리노의 최초의 아시아인 제자였다고 한다. 
 
“1999년 엘살바도르에서 귀국하기 직전 그는 스승 소브리노 신부에게 왜 교회에 대한 비판을 하지 않느냐고 마지막으로 질문했다. 스승은 그를 자신의 방으로 데려가서는 서랍에서 두툼한 서류뭉치를 꺼내 보여주었다. 교황청 신앙교리성성에서 스승에게 보낸 각종 경고 문헌이었다. (...) 라틴어, 스페인어로 쓰인 문서가 많았다. (...) 보낸 사람의 이름 아래 라칭어 추기경(현 베네딕토 16세 명예교황)의 친필 서명이 자주 보였다. 
 
(...) 정확히 세 시간 뒤 돌아온 스승은 그에게 무엇을 느꼈냐고 물었다. 재판정에서 피고석에 앉아 있는 스승 모습을 방청석에서 보는 것 같다고 그가 답했다. ‘해방신학자는 언제나 피고석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며 산다’고 소브리노는 제자에게 말했다.“   
 
   
▲ 교황청 대변인 페데리코 롬바르디 신부가 11일(현지시각) 교황청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하면서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설명하고 있다. (연합뉴스)
 
‘해방신학에 대한 탄압’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에 대해 김근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남미 성직자들이라고 해서 모두가 개혁파는 아니었다. 아르헨티나 주교단 회의가 비델라 장군의 쿠데타에 직면하여 ‘침묵으로 지켜본다’는 입장을 밝혔듯이, 실상은 체제 수호파가 더 많았다. 이들은 교황청과 군사정부의 지원을 받으며 출세 가도를 달렸고, 수치상으로도 훨씬 우세했다. 그럼에도 남미에는 가난한 자의 편에 서서 독재에 저항하다가 죽은 사제와 수녀가 무려 1천명이나 된다. 만일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가 해방신학을 마르크스주의의 아류 정도로 오해하지 않고, 해당 국가에 저항하거나 적어도 중립을 지켰다면 이 숫자는 훨씬 더 줄어들었을 것이다.”(p196~197)  
 
그러나 해방신학은 베네딕토 16세 치세의 말기에 사실상 해금되었다. 사임하기 한 해 전인 2012년 그는 자신의 제자인 게르하르드 루드비크 뮐러를 신앙교리성성 장관에 임명했다. 그런데 뮐러는 해방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구티에레즈(1971년 <해방신학>이란 책을 써서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신학자)와도 가까운 사이였다. 베네딕토 16세가 자진 사임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이 자리에 오르자 뮐러는 구티에레즈를 교황청에 초대해 강연을 열었다. 이 강연은 가톨릭교회에서 해방신학의 복권을 전 세계에 알린 상징적인 사건으로, 해방신학이 더 이상 탄압받지 않는다는 뜻이었다.”(p209) 
 
베네딕토 16세를 선택하거나 그에 의해 선임된 다수 추기경들은 이탈리아 지역 언론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베르골리오 추기경을 차기 교황으로 선택했다. 가톨릭은 변화의 요구에 반응했다. 
 
종교 혁신의 필요성과 한국 천주교회의 미래 
 
“세계 교회는 새로운 신학적 흐름이 생겨나면서 이의 채택 여부를 놓고 치열한 노선 투쟁을 벌이고 있을 때, 한국 교회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은총과 극복, 구원만을 이야기했다. 그러면서 한국 가톨릭은 섬이 되었다. 남미에서 해방신학을 공부한 나의 소견으로는 한국 가톨릭이 갈라파고스 섬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사이에 세계 가톨릭의 사조는 40년 가까운 신학적 투쟁 끝에 판가름이 났다. 이른바 해방신학의 대부가 교황청에서 해방신학을 강론하고, 온건한 해방신학적 교황이 선출된 것이다”(p209)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의 진보성은 모든 영역에서 관철되지는 않는다. 아르헨티나에서 온 그는 가난의 문제에 대해선 대단히 급진적이지만 선진국에서 진보의 기준이 되는 사회 의제에 대해선 매우 보수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는 동성애자들의 접근을 막지 않은 교황이지만 추기경 시절엔 아르헨티나의 동성결혼 허용에 대해 반대한 이였다. 낙태나 여성 사제 허용의 문제에 대해서도 아직까지는 주류 가톨릭과 다른 모습을 보인 바 없다.
 
하지만 전 지구적 자본주의 사회에 대응하는 종교 혁신의 문제에서 한국 가톨릭은 제1세계의 진보성이나 제3세계의 진보성과 상관없이 겉돌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김근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은 개혁과 진보를 향한 한국 교회 내 고통의 시작이 될 것이다. 나는 그 과정이 걱정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결과가 몹시 기대된다”(p210)라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관료제에 매우 잘 적응하는 사회이며 한국 천주교회는 그런 면에서 매우 잘 자리를 잡았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남미의 문제에 정통할지언정 한국 사회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한다. 방한을 하더라도 구체적인 사회의제에 대해 추상적인 발언 이상의 파격을 보여주기가 힘들 것이다. 결국 한국 천주교회의 개혁은 스스로의 몫인데, 이들은 교황의 개혁에 반응할 수 있는 주체를 형성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그런 이들이 있다고 한들 주류 관료들이 적당히 요구를 일정 부분 받아 들이는 시늉만 하면서 시간을 때울 수도 있는 상황이다. 
 
   
▲ 1989년 교황 요한 바오로2세 방한 모습.12일 안전행정부 국가기록원은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앞두고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방한 기록 등 교황청 관련 국가기록물을 '이달의 기록'으로 정해 웹사이트(www.archives.go.kr)에서 제공한다고 전했다. 1950∼2000년대 한국과 교황청의 외교관계, 첫 한국인 추기경 탄생, 역대 교황의 방한을 다룬 사진 17건, 동영상 12건, 문서 3건 등 총 32건이다. (연합뉴스: 국가기록원 제공)
 
김근수는 이어서 가톨릭 교회에 필요한 혁신에 대해 설명한다. 주교 선출에 대한 제언 등은 의미있지만, 한국 가톨릭 교회의 현실에선 세계 가톨릭 교회의 변화에 발맞추는 것부터가 절실한 상황이다. 해방신학을 탄압했던 베네딕토 16세 명예교황, 라칭어 추기경은 1962년에 이렇게 말했다. 
 
"예언은 미래를 예측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독선에 맞서 예언적인 항의를 하는데 있다. 역사에서도 하느님은 제도를 편들지 않고 고통받고 박해받는 사람들을 편드셨다"(p199)
 
그리고 그 '예언'의 의미를 받아들여, 김근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제 21세기는 교회와 종교의 민주화, 성직자와 신자 간 수평적 교회의 시대가 될 것이다. 이는 희망적 기대가 아닌 예언적 전망이다. (...) 그 변화의 둑을 무너뜨리는 흐름은 가톨릭교회에서 나와야 하고, 역설적으로 가톨릭에서 나와야만 세계적인 흐름을 탈 것이다. 그만큼 가톨릭은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고, 충분히 낡았기 때문이다. 이 흐름을 놓치는 자는 우리 시대를 놓치고 우리 신앙을 잃게 될 것이다.”(p230~231)
 
가장 낡았기 때문에 가장 개혁에 적합하다는 가톨릭의 역설은 한국 천주교회에게도, 더 나아가 한국 보수에게도 의미심장하다. 한국 사회에서도 가톨릭은 나중에 전래된 개신교에 비해 사회개혁에 바람직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받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개신교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이 보수신학에 잠식된 이 사회에서 천주교회는 그저 ‘좀 덜 극성스러운 신도를 받은 교회’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한 한국 천주교회가 ‘가난’을 주요한 신학적 주제로 삼는 ‘프란치스코 시대’를 따라갈 수 있을지 염려가 된다. 
 
저자 김근수가 개탄한 바, 사회 지도층과 골프를 치고 다니는 ‘교회 관료’들이 이를 할 수 없다면, 일선 사제와 평신도들의 자정운동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시점이다. 그리고 가톨릭교회가 그런 모습을 보일 때에야,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에 마음이 흔들린 ‘냉담 가톨릭’들도 가톨릭교회의 가장 강력한 우군으로 남게 될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에서, 한국 천주교회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교황의 성품이나 개인 윤리, 신심은 잘 받아들이고 선전하지만, 교황의 사회개혁과 교회개혁 프로그램은 철저히 외면하는 행태가 교회 안에서 벌어지지는 않을까 염려스럽다. 이미 보수 세력에서 그런 움직임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p251)
 
저자의 위와 같은 예측이 어긋나기를, 그리하여 '예언'이 실행되기를 바랄 뿐이다. 
   

한윤형 기자  a_hrima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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