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변호인'이 배급사 집계 기준 천만관객을 돌파했던 지난 1월 19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 시민들이 '변호인'의 대형 포스터 앞을 지나가고 있다. (연합뉴스)

영화 <변호인>이 가리키는 1980년대 현실이 역사가 된 줄 알았는데 스크린 밖으로 걸어나오는 것을 본 느낌이다. 그야말로 <링>의 사다코가 TV 밖으로 걸어 나오는 것 이상의 공포다.

국정원이 유우성·유가려 남매를 간첩이라고 생각하게 된 경위를 추적해보자. 국정원이 유가려 씨가 간첩이라고 의심하게 된 이유는 그가 자신의 신원에 대해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에서 ‘간첩’의 비약이라니, 납득할 수 있는 일일까? 그런 식이라면 국정원 직원들은 국정원 직원이 아닌 양 인터넷에 댓글을 수천개씩 달아 댔으니 ‘명실상부한 김정은의 졸개’가 될까?
공무원이 자기 신분을 숨기고 국가 정책을 홍보하거나 야당 정치인을 비방·중상하는 것은 죄가 되지만, 민간인이 자기 방어를 위해 국가기관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것을 죄라고 할 수 있을까? 근본적인 ‘개념’ 자체가 뒤집혀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 ‘고문관’들을 어찌 할 것인가? ‘고문관’이니까 계속 ‘고문’하고 싶은가?
국정원이 처음부터 작심하고 ‘조작’하려 들지는 않았을 거라는 선의적 추정 자체가 매우 어려운 실정이다. 물론 유가려 씨가 거짓말을 했음을 알았을 때, 모종의 ‘심증’을 가졌을 수도 있다. 그래서 오빠는 이미 불었다는 으름장으로 일단 증언을 끌어내고, 유가려 씨가 하는 진술들이 신빙성이 있고 매우 구체적이라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최대한 이해하려고 해봤자 여기까지다.
아무리 선의적으로 이해해도, 보도된 바들을 종합하면 이후의 국정원은 유가려 씨의 진술을 뒷받침하는 정황증거들을 부지런히 위조해댔다. 탈북자들의 증언 중 유리한 것만 취사선택했고, 진술서 자체를 자신들이 직접 쓰기도 했다. 유가려 씨의 증언이 뒤집히고 무리한 증언 중 상당수가 재판부에 의해 거부당하자 문서를 위조해댈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일에 수천만원의 혈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심증’의 확신에서 나온, 체계적인 증거 위조. ‘선의적 해석’의 한계가 여기까지다. 그런데 이마저도 허무는 황당한 얘기들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저 가설조차 기각된다면 국정원과 공안검사들은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이들임이 분명할 텐데 말이다. 유가려 씨는 자신의 진술의 배경에 폭행과 폭언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검사 앞에서 진술을 뒤집으려고 하자 공안검사는 조사실이 아닌 다른 곳으로 데려가 “진술번복은 더 큰 범죄”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간첩이 필요했을까. ‘마지막 선의적 해석’마저 무너진다면,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기능은 음성적 국정 홍보와 야당 정치인 비방, 그리고 정권에게 필요한 타이밍에 간첩 제조하기 등이 된다. 공안검사들은 세 번째 기능에 묵묵히 협조하는 들러리가 된다. 1980년대인가? ‘시간을 달리는 국정원’인가? ‘국정원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인가? ‘타락’이나 ‘전락’을 논하기에는, 애초 그들이 변한 적이 없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면 멸종되지 않고 남아 있는 ‘실러캔스’인가? 국가권력의 부당한 행사에 저항하는 습속을 어느 정도 들인 한국 사회의 시민들은 더 이상 그런 식으로 잡아 먹을 수 없어서, 이젠 탈북자들을 사냥감으로 삼는가?
검찰 수사를 지켜봐야겠지만, 이 사건은 훗날 다시 수사될 확률이 높다. 아니,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라면 그리 되어야만 한다. 검찰이 비록 보수정부 치하라도 민주공화국의 체면치레 정도를 한다면, 정부가 바뀌었을 때는 공안당국의 ‘개념’과 ‘자세’를 바꾸는 개혁이 수행되어야만 한다.
지금의 모습으로만 본다면, 국정원은 주요한 세 개의 기능 중 두 개는 포기하고 하나만 가져가는 것이 옳다. 참여정부 때 존속했다가 사라진 국정홍보처로 이름을 바꾸고 정부 정책을 홍보하되 양성적으로 해야 한다. 신분을 드러내놓고 해야 하고 이를 어기면 처벌받아야 한다. 공안을 담당하는 정보기관은 두 개 정도 따로 만들어 보안이 필수인 업무 특성상 민주적 통제가 어렵다면 자기들끼리라도 서로 견제하게 해야 할 것이다. 현 국정원에 안보 업무에 유능한 인원이 있다면, 새 조직에서 수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국정원과 공안검사, 소위 공안당국은 쇄신 정도가 아니라 존립근거 자체를 문제삼는 개혁이 필요함을 이 사건은 잘 보여준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진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훗날 정권이 교체되었을 때 이들에 대한 어떤 조치와 처분과 개혁 방안이 필요할지를 미리부터 고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안하무인 격인 그들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오직 ‘미래’ 밖에 없을테니 말이다. 동독의 인권유린의 사례를 기록한 서독의 자세는 비단 ‘북한인권 운동’에만 적용될 일이 아니다. 공안당국에 대해서도 비슷한 태도를 취해야, <변호인>의 시대가 끝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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