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 권아무개 과장(51. 주선양 총영사관 부총영사. 4급)이 지난 21일 검찰에서 조사를 받던 도중 "더 이상 조사를 받지 못하겠다"며 뛰쳐나간 후 22일 자살을 시도하였고 24일 현재까지 중태에 빠져 있다고 한다. 권아무개 과장은 검찰에서 나온 후 21일 밤 11시 30분부터 22일 새벽 1시 30분까지 두 시간여 동안 <동아일보> 기자와 인터뷰를 하였고 이 내용은 24일자 <동아일보> 12면에 실렸다. 원아무개 과장은 22일 오후 1시 33분경 승용차 안에서 재만 남은 번개탄과 함께 발견되었다. 발견 당시 번개탄은 식어 있었다고 한다.

권아무개 과장의 선택은 안타까운 일이고 그 자신을 위해서나 공익을 위해서나 쾌유를 기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나온 검찰 수사에 대한 권 과장의 항의는 합리적이지 않다. <동아일보> 기사의 정리가 문제일 수도 있겠으나, 이 내용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렵다. 또한, 지금까지 복수의 언론에서 보도된 권 과장의 유서 내용의 일부도 이 인터뷰 내용에 근접해 있다.
권 과장은 “검사의 눈엔 내가 공문서 위조범으로 보이는 모양인데 나는 27년간 대공활동을 하면서 국가를 위해 일해 왔다”라고 말한다. 공문서 위조에 권 과장이 개입했는지 안 했는지 여부는 아직 수사상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다. 그저 수사를 받는 것만으로 그렇게 판단한다면, 국정원은 애초에 멀쩡한 시민들을 간첩으로 몰아가는 조직이 된다.
“외국 감방이라는 그 험한 데도 마다 않고 나가는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국가가 문서 위조범으로 몰아 감방에 넣을 수 있나. 김모 과장(대공수사국 파트장·4급·구속)도 ‘대한민국 감방에서 3년을 사는 것보다 중국 가서 교수형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라는 말은 비뚤어진 애국심의 발로로 봐얄지 ‘객기’의 향연으로 들어얄지 알 수가 없다.
▲ 24일자 동아일보 12면 기사
대체로 그들은 ‘대한민국 감방’에 남들을 집어넣는 역할인데, 그 업무상 무고한 이를 충분한 증거 없이 ‘감방’에 넣으려 했을 경우 스스로 ‘감방’에 들어갈 각오도 없이 일한단 말인가. 증거를 중시하는 대한민국 법질서가 그리 우스워 보이면 교수형과 총살이 즐비한 중국이나 북한으로 가서 살 일이다. 참고로 2013년 11월 기사를 보면 중국 공산당조차 사형을 신중히 처리하고 법정증거주의를 강화하는 사법개혁을 추진하고 있다니 권 과장의 ‘애국심’이 어느 시간대를 살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권 과장의 “위험과 두려움 때문에 대공수사국엔 자발적으로 오는 직원이 거의 없다. 그래서 국정원 내에서도 선후배 동료들 간에 가장 끈끈한 조직이다. 검찰 수사는 그 끈끈하던 대공수사 직원들을 이간질했다. A 검사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오십이 넘은 나에게 ‘지금 뭐하는 거냐’고 반말을 하는 등 모욕감을 줬다. 그렇게 말한 걸 조서에 그대로 남기라고 항의했더니 ‘∼요’자를 붙였다며 사과하더라. 존엄이 무너지는 게 싫고 후배들의 입을 무서워하게 된 것도 싫다”라는 발언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은 대체로 ‘공안사건은 그 특성상 진술증거에 의존해야만 한다’고 주장해왔다. 그래서 진술증거 밖에 없는데도 상대가 간첩인양 단정하는 일도 왕왕 있었다. 만약 국정원이 비리를 저질렀다면 그 역시 조직의 폐쇄적인 특성 때문에라도 일단은 진술확보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이에 대해 “이간질했다”, “후배들의 입을 무서워하게 된 것도 싫다”라고 한다면 수사를 하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다. 떳떳하다면 있는 그대로 진술하면 될 일이고, ‘후배들의 입’에서 다른 소리가 나왔다면 대질심문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한 태도다.
검사의 무례한 태도에 대해 항의하는 것이야 시민적 권리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인터뷰 내용에서 파악되는 그는 지금 공권력과 시민의 구도로 생각하는 것 같지가 않다. 일종의 특권계층으로서의 공안기관에 있는 애국자와 그에 봉사해야 할 국가권력, 그리고 다수 시민이 있고, 그중에는 마음대로 간첩이라 의심하고 죄를 뒤집어 씌워도 될 일부 시민이 있는 것 같다. 자신들에게 통제되던 두 번째 계층이 첫 번째 계층인 자신을 핍박하니 못 견디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게 아니라면 국정원이 공안사건 피의자들에게 평소 하는 일도 있는데 저 정도 수위의 일을 가지고 “존엄이 무너지는 게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지금 북한을 들여다보는 ‘망루’가 다 무너졌다. 간첩 조작 사건 이후 중국의 협조자들이 아무도 연락이 안 되는 상황이다. 북한이나 중국으로선 대한민국 검찰을 통해 대한민국 국정원을 쳐내는 이이제이(以夷制夷·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의미)다. 이제 북한에서 일어나는 ‘경보음’이 사라졌고 어떻게 대처할지 모르겠다”라는 지적은 경청할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는 결국엔 국정원이 위조된 증거로 사람을 간첩으로 몰았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국정원이 공익을 위해 자신들을 은폐해야 한다고 주장하려면 일을 제대로 해야 한다.
국정원의 정보라인이 붕괴되는 현 상황은 국정원이 순간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잘못된 선택을 내릴 경우 얼마나 큰 공익의 훼손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권 과장은 “정말 노출되면 안 될 은닉 요원인데,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었다고 하지만 그보다 더한 행위다”라며 민주당 의원들을 비판하는데, 백번 양보하더라도 그 비판은 국정원이란 조직의 무능함과 허술함에 대한 자책과 함께여야 한다. 그것도 안 하겠다면 권 과장 스스로 국정원의 공작 내용을 공개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통제하고 처벌할 수 있는 묘책을 제시해야 한다.
그밖에, “정보기관은 실체를 보고 검찰은 법만 보고 있다”거나 “문서 3건의 실체는 ‘믿음’이다”라는 말 역시 타당하지 않다. ‘실체’는 ‘증거’를 통해 추론하는 것이고 정식 외교 루트로 확보한 문서가 아니라면 그 진위판단에 신중해야 한다는 상식이 전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인권도 중요하지만 간첩은 잡아야 한다. 누군가는 우리가 성과에 급급해서 일을 이렇게 저질렀다고 한다. 우리는 그놈이 간첩이니까 잡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일해 왔다. 간첩이 나라를 팔아먹고 기관은 쑥대밭을 만들어 버렸다. 20여 년 일한 사람들은 치욕을 겪고, 결국 남한이 북한에 진 것이다. 검사들은 정의의 눈으로 우리를 재단하는 것 같겠지만 결국 남한이 북한에 진 것이다”란 말은 어떠한가. 현재의 남한이 어디로 봐서 북한에 졌다고 말할 수 있는가. 국정원이나 권 과장의 항변을 다 믿는다 해도 “국정원이 문서위조범에게 진 것이다”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27년간 대공 활동을 해 왔지만 이제 나는 ‘용도 폐기’가 됐다. 이제 다 노출이 됐으니 더 활동을 못할 것이다 (...) 형사처벌 되면 나 같은 돈 없는 공무원들은 가족을 먹여 살릴 돈도 없다. 그나마 연금 하나 보고 살아왔는데….”라는 말에 연민을 가질 부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전반적으로 자신의 일상만을 소중히 여길 뿐 다른 보통 사람의 일상엔 눈을 감는 부조리한 시선을 드러낸다. 국정원 직원은 애국자이기 때문에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잘못된 전제를 버리지 않으면 그 부조리함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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