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언론은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순방을 할 때마다 상서로운 기운으로 날씨도 탄복시켰다고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이번 서유럽 순방에서 얻은 성과라곤 프랑스 측에 약속한 우려스러운 철도시장 개방 밖에 없다.

그에 반하면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과의 정상회담은 뚜렷한 성과가 있었다. 보수언론은 북핵 불용에 더 무게를 싣는 모양새다. 하지만 최근의 국제정세를 본다면 양국 정상이 유라시아 구상에 합의하고 푸틴 대통령이 박근혜 대통령의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에 호의를 표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건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은 역내 국가들을 한 틀에 묶어 장기적으로 다자안보협력의 길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국을 경계하며 군비를 줄이기 위해 일본을 재무장시키려는 미국의 태평양 안보 전략과 일정 부분 상충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그간 박근혜 정부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나 미사일 방어체계(MD) 문제에 있어 미국 측 입장에 끌려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사실상 자신의 외교전략을 폐기한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게 한 큰 이유가 되었다.
▲ 14일자 동아일보 3면 기사
그런 상황에서 러시아 대통령과의 공동성명은 박근혜 외교정책의 불씨를 살리는 방책일 수 있다. 한국 정부가 역학관계상 미국의 요구를 강하게 거스르기 어려울지라도, 러시아와 중국과 좀 더 진전된 관계를 가질 수 있다면 느슨하게 두 개의 틀을 추구하면서 궁극적으로 한국의 국익에 부합하는 안보전략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진-하산에의 투자와 기타 경제적 협력 역시 경제적 성과를 넘어서 이러한 틀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물론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조차 러시아와의 경제협력에는 관심을 가졌다. 시베리아횡단철도(TSR)와 한반도종단철도(TKR)을 연결하여 한국을 ‘섬 아닌 섬’에서 대륙문명과 해양문명의 접합지로서의 진정한 반도로 탈바꿈하려는 꿈을 꿔보지 않은 정치지도자는 아마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꿈을 꾸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의 정치지도자가 될 자격도 없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경제적 이해타산만을 중시했고 대북강경책에 치중하다 사업을 추진하지 못했고 러시아 측의 신뢰를 잃었다.
박근혜 정부는 적어도 공약면에서는 그보다는 좀 더 진전된 모습을 보였다.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은 경제성과를 넘어선 안보전략이란 점에서 진전된 부분이 있었다.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도 이명박식 강경일변도 대북정책에 비해서는 유연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국내정치의 위기가 올 때마다 ‘NLL 대화록’을 활용하거나 ‘통진당 내란음모 사건’ 같은 것을 만들어 내면서 북측의 신뢰를 잃었다. 회담을 앞두고도 회담자의 격과 급을 따져 파행을 만들어 냈고 그러면서도 북측을 길들였다고 자화자찬했다. 이대로라면 박근혜 정부가 이명박 정부의 전철을 밟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그렇기에 박근혜 정부가 전향된 모습을 보일 때 민주당과 진보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민주당과 진보언론이 적절한 견제와 호응이 없다면, 박근혜 정부가 민주주의의 측면에서 한국 사회에 기여할 바는 전혀 없을 것이다. 소통의 정치를 펼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이고 공안통치 역시 지속될 것이다. 사회경제 정책 측면에서는 박근혜 정부에게 기대할 것이 전혀 없지는 않다. 시대적 상황 때문에 추진될 수밖에 없는 복지정책과 대북정책을 포괄하는 동북아 안보구상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데 민주당과 진보언론의 반응이 너무 조용하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푸틴과의 정상회담을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고 사설 하나 내지 않았다. 물론 다른 중요한 사안이 많았겠으나, 곤란한 반응이다. 박근혜 정부가 방향이라도 제대로 잡을 때 좀 더 적극적으로 평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박근혜 정부도 야당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 길을 쭉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 14일자 경향신문 5면 기사
박근혜 정부의 지지층은 대체로 북한에 대한 적개심만 가득할 뿐 안보전략을 사유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 적개심의 크기를 안보의식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박근혜 정부 역시 그런 이들을 달래면서 자신들의 기획을 펼치는데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야권조차 이에 호응하지 않는다면 박근혜 정부는 뜻을 잃고 표류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 정부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은 야권에게 이득이기만 한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증세도 하고 복지정책도 정비하고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시행해야 언젠가 민주당이 집권할 때에도 더 나은 상태의 대한민국을 물려받을 수 있다. 박근혜 정부의 특정한 정책에는 협조해야 민주당의 노선도 살아나고 수권정당으로서의 신뢰도 커진다. 보수정권이 러시아를 경유해서라도 북한에 투자해야 김대중 노무현의 개성공단 투자가 망해야 할 이들을 연명했다는 보수정권 지지층의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민주당과 진보언론이 좀 더 대국적인 시선을 가지고, 박근혜 정부가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모습을 보일 때는 협력할 수 있다는 자세를 보여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박근혜 정부 역시 더 이상 국내정치용 대북정책에 얽매이지 말고 소신을 펼쳐 지지를 구해야 할 시점이다. 여야 격돌의 상황에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는 서로 합의가 되어야 국민들이 희망을 가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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