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다. 주요 외신에 따르면 중국을 방문 중인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이 창완취안 중국 국방부장과 판창룽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등과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창완취안 중국 국방부장은 8일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과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일본과의 다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 열도 분쟁을 두고 "논쟁할 수 없는 주권 문제"라며 일본을 비판했다. 이어서 창 부장은 "중국이 먼저 공격을 하지는 않을 것이나 필요할 시 영토 수호를 위해 군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라고 밝혔다. 창 부장은 거듭 "일본과의 영토 분쟁은 영토적 주권의 문제로 어떠한 타협이나 양보·협약이 있을 수 없다"라면서 "중국군은 부르면 올 것이며 어떤 전투도 할 수 있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며 중국이 전쟁도 불사할 것임을 밝혔다.
▲ 9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이어서 창 부장이 필리핀과의 영유권 분쟁에 대해서도 강경 발언을 이어가자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은 "필리핀과 일본은 미국의 오랜 우방"이라고 맞받았다. 이어 척 헤이글 장관은 "우리는 각국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고 있고, 미국은 완전하게 조약의 의무를 다할 것"이라며 미국의 의중을 밝혔다. 척 장관은 “중국은 영유권 갈등이 있는 섬들에 대해 일방적으로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할 권리가 없다"라면서 "그러한 비협력적이고 비협상적인 태도는 결국 위험한 갈등을 촉발할 것"이며 "미국은 중일 갈등과 관련해 일본을 보호할 것"이라고 엄중 경고했다.
판창룽 중국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도 이날 척 헤이글 미국 국방장관과의 면담에서 일본과 필리핀의 입장을 지지한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 국방장관 회의와 일본 정치인과의 회동에서 한 당신의 발언”에 대해 “거칠고 결연했다”라면서 "나를 포함한 중국인들은 그러한 언급에 실망했다"라고 비판했다고 한다.
미국과 중국의 언쟁 사이의 일본 그리고 한국
지난 1월 22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중국과 일본 간 전쟁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냐”는 외신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중·일 간) 물리적 충돌이나 분쟁이 갑자기 발생할 수 있다”며 “영국과 독일은 강력한 경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1914년의 갈등 발발을 막지 못했다. (중·일 관계도) 유사한 상황”이라고 답해 유럽의 언론인들을 경악시킨 바가 있다. 중·일 분쟁의 가능성을 묻는 질문에 대해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영국과 독일의 사례로 답한 것은 전쟁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는 의사라고 해석되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일본 극우파가 미국의 지원을 전제로 중국과 한판 전쟁을 벌이고 싶어 한다는 해석도 나왔다. <시사in> 등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 극우파들은 5년 후에 전쟁을 하면 중국을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지금 전쟁을 벌인다면 미국의 지원을 전제로 중국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이 아베 총리의 발언의 기저에 깔려 있다는 것이다.
애초에 오바마 미국 행정부의 핵심 외교전략 중 하나인 ‘아시아·태평양 재균형(rebalancing)’, 혹은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로의 외교중심축 이동)' 자체가 중국과의 갈등을 불러 올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왜냐하면 이는 사실상 미국이 아시아의 동맹국들을 동원하여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미국은 일본의 재무장을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용인할 의중마저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일본 우익들은 ‘집단적 자위권’에 대한 승인을 계기로 평화헌법 개정까지 추구하려 하고 있다.
▲ 9일자 경향신문 10면 기사
'설득' 작업이 빠진 박근혜 정부의 괜찮은 제안?
이런 상황에서는 한국의 외교·안보 전략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박근혜 행정부는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와 ‘드레스덴 선언’, ‘유라시아 이니셔티브(Eurasia Initiative)’와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등 대북문제와 동북아 안보 문제에 대해 그럭저럭 괜찮은 제안들을 내놓은 바 있다. 대북정책은 민주정부의 햇볕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대북강경책의 중간 정도에 위치한 것으로 평가될 수 있고, 동북아 안보 문제에 대한 복안도 ‘동북아 중심국가’라는 무리한 제안을 뺀 참여정부의 복안과 흡사한 것으로 생각될 여지가 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의 복안은 대북관계의 회복을 전제로 하고,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외교 전략에 일정 부분 배치된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의 방향이 큰 틀에서 국익에 부합한다고는 해도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북한과 미국에 대한 설득 작업이 절실한 것이다.
하지만 연초 ‘통일은 대박’이라 선언한 박근혜 정부의 인식에는 이러한 고리가 빠져 있다. 통일에 대한 장밋빛 낙관론은 중국의 전향적인 자세에 기인한 것일 확률이 높지만, 중국은 이제야 북한과 남한을 동시에 ‘카드’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일 뿐 ‘남한 편’으로 갈아탄 것이라 보기 힘들다.
미국 및 일본과의 갈등이 심화되면 근본적으로 미국의 안보 전략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한국과의 공조도 어려워진다. 박근혜 정부는 역사문제에 있어 중국과의 공동 전선을 통해 일본에 대처하기도 했지만 미·중 갈등이 심화되면 이러한 기조를 지속하기 어렵다. 중국은 북한을 압박하기 보다 북한을 활용해 미국에 대응하려고 할 것이니 한국 측의 장밋빛 낙관론도 봄날 벚꽃처럼 한철을 버티지 못하고 허공 속에 흩날리게 된다.
북한을 외설적으로 소비하기만 하는 국내 정치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이 그저 ‘좋은 말’의 나열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전략이었다면 이 사안에 대한 심각한 대처가 절실하다. 하지만 ‘무인기’에 대해 말을 바꾸는 국방부의 모습을 보면 북한은 여전히 남한 정부에게 국내정치를 위해 외설적으로 소비되는 대상일 뿐이다.
박근혜 정부가 ‘국내정치에서의 꽃놀이패’를 위해 외교·안보 정책의 붕괴를 방치했다는 평을 듣지 않으려면 통일부와 외무부가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시점이다. 후세에 “허송세월했다”는 평가를 듣지 않으려면 이 민감한 시기를 돌파하거나 은신할 지략이 필요하다. G2의 국제외교전략을 드러난 발언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중국에서 전해진 소식은 한국 사회가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외교적 딜레마를 회피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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