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수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3박4일 간의 미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27일 오후 귀국했다. 김장수 실장은 미국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지만 특히 수전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과의 만남에 관심이 쏠렸다. 이 만남에서 두 사람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문제에 대한 폭넓은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지난 3일 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미·일 방위협력지침’을 개정키로 한 이후 한국 정부는 이 문제에 관해 입장을 밝힌 적이 없었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25일 미국 현지 특파원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김장수 실장이 "한반도 주권 행사와 관련한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의 의견이 반영돼야 한다"라는 입장을 미국 측에 전달했으며 미국 측으로 “이해한다”라는 답변을 들었다고 전했다. 이 입장은 일본이 UN 헌장에 포함된 집단적 자위권을 행사하는 것을 방해할 수는 없으나, 한반도 내 분쟁이 있을 경우 한국에 파병하려면 한국 측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논리일 수 있다.
▲ 28일자 한국일보 3면 기사
그러나 이는 한국이 미국의 동아시아 안보 외교구상에 편입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미국은 동아시아에서 북한 문제를 핑계로 삼아, 사실상 중국을 겨냥하는 포위망을 구축하려고 하고 그 실행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필요로 한다. 영국과 호주가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에 찬동하는 것도 그래서다. 미국은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 필리핀, 호주 등을 이 안보 외교구상에 끌어들이려고 하며 한국이 MD에 편입되는 문제도 이 부분과 관련이 있다.
문제의 핵심은 중국과 밀접한 경제협력 관계를 맺고 있고 통일을 할 경우 중국 측과 접경하게 되는 한국으로서는 이러한 상황이 국익에 부합하지 않을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어찌 보면 한국으로는 일본 자위대의 성장보다는 이쪽이 더 심각한 문제다. 그래서 참여정부는 물론 박근혜 정부의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에서도 한국 측은 중국까지 끌어들인 다자간의 평화협정을 선호해왔다. MD에 편입된단 사실을 부정하고 KAMD를 내세우는 것 역시 중국 측에 대한 자극을 최소화하려는 의도로 이해될 수 있다.
김장수 실장의 발언은 ‘집단적 자위권’이나 ‘일본 재무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이 자신의 국익에 맞는 외교·안보 전략을 포기하고 미국의 구상에 끌려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보수언론은 이 부분을 애써 숨기려 들고 진보언론도 정밀한 지적을 하지 못한다.
▲ 28일자 서울신문 3면 기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해당 사안을 <“日 집단 자위권, 한국 동의 없이 한반도 문제 개입 안된다”>(2면)와 <“日 집단적자위권 한반도 영향 땐 사전동의 얻어야”>(2면)로 기사 제목을 뽑았다. 정부가 해야 할 요구를 했고 그것이 수용될 경우 큰 문제가 없을 거라는 시선이 느껴진다. 두 신문은 나란히 사설을 게재했는데 사설 제목도 <日 집단적 자위권 美·日만이 아닌 한국의 문제다>(조선일보)와 <日 집단적 자위권, 한반도 영향 줄 땐 한국 동의 받아야 한다>(동아일보)였다. 정부가 스스로 주장했던 외교·안보 공약에서 이탈하고 있는데도 그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요구한 것만큼만 미국에 요구해도 된다는 식이다.
진보언론 보도에서도 큰 차이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한겨레>는 5면 기사에서 <“일 집단적 자위권 한반도 행사땐 반드시 한국정부 동의 받아야”>로 보도하고 <경향신문>은 1면 기사에서 <집단적 자위권 행사 범위 제한 / 정부, 일에 ‘금지선’ 제시키로>로 보도하는 등 보수언론 보도와 대동소이했다. 양 신문은 이 문제에 대해선 별도의 사설도 싣지 않았다.
오히려 이 문제에 관한 한 중립지대 언론들의 보도가 더 빛났다. <한국일보>는 3면 기사에서 <美 ‘아시아 전략’ 수용하되 ‘日 한반도 개입’ 우려를 불식>이란 제목으로 확연히 다른 접근과 상대적으로 깊이 있는 시선을 보여주는 보도를 했다. <서울신문>은 1면 기사에선 <정부, 日 집단적 자위권 ‘제한적 용인’>이라 썼지만 3면 기사에선 <美 동아시아 전략 사실상 수용... ‘日 군사대국화’ 우려 불식 절충안>이라고 보도했다. 두 신문의 보도는 일간지 보도 중에서 가장 자세했고 이에 비해 진보언론들은 국내문제들을 더 중시하는 지면배체를 했다.
그러나 <경향신문>은 국제정치 전공의 김준형 한동대 교수의 외고 칼럼을 통해 체면치레를 했다. 김준형 교수는 28일자 30면에 실린 <국제칼럼: 한·미동맹의 중독에서 벗어나라>에서 “그러나 중국과 소련의 위협이 사라졌고, 남북한 국력차가 심대한데 군사동맹이 오히려 강화일로에 있는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이며, 국가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한 것일까?”라고 질문했다.
김준형 교수는 현재 상황을 “즉 미국 패권 하락이 현실화하고 중국 부상이 가속화하는 가운데서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미국의 선택은 한·일 두 동맹국에 비용과 책임의 상당부분을 떠넘기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동북아에 부활하고 있는 대결적 진영외교를 반대해야 하는 당위성은 너무나도 분명하지만, 사실상 우리가 미국의 전략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편입되었기에 운신의 폭이 좁아지고 있다”면서, “중국 정부의 레드라인은 한국의 MD 참여인데, 아직은 관망 중이지만 미국의 압박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입장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난처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마지막으로 김준형 교수는 “한·미동맹도 국가전략의 일부일 뿐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며, 한·미동맹의 중독에서 빠져나오는 일이 시급하다. 한·미관계는 깊어져도 되지만, 군사동맹은 축소되어야 한다. 아무리 60년간 맹방이었다 하더라도 한국을 용병화하려는 현재의 미국에 무조건 올인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외교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풀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열쇠는 미국의 대중정책과 일본의 군사 대국화에 강력한 명분을 제공하고 있는 한반도 위기를 조속히 해결하고 남북관계 개선에 적극 나서는 것이다. 남북 긴장이 완화되면 미국에 대한 군사적 의존도와 일본의 군사 대국화 명분이 줄어들고 우리의 입지는 넓어질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미·중·일 초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이 국익을 지키기 위해선 남북관계를 개선하여 평화협력 구상의 입지를 넓혀야 한다. 심지어 보수세력조차 이를 머리로는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국내정치를 위해 북한에 대한 어떤 유권자들의 적개심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국익을 위한 선택을 하지 못하는 웃지 못할 일이 반복되고 있다. 진보언론이 폭로해야 할 것은 이러한 구조일텐데, 오늘자 신문에서는 김준형 교수의 칼럼만 빛이 났다.
▲ 28일자 경향신문 30면에 실린 김준형 교수의 칼럼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