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도 아닌 국회의원이 내란예비음모죄와 같은 죄명으로 수사를 받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새누리당 원내부대표)
“지금까지 알려진 혐의 내용은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조선일보 사설)
새누리당이나 보수언론이라고 무턱대고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을 ‘간첩’이라 몰아가고 있지는 않다. 이번 사태는 ‘문제제기’가 아니라 수사의 영역이고, 복수의 언론보도를 통해 확인된 혐의 사실만으로 충분히 충격적이다. “수원 지방법원이 전날 국정원이 청구한 압수수색영장과 체포영장을 모두 발부한 것을 보면 혐의 사실이 상당히 구체적”(조선일보 사설)이라 판단할 수 있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수사 결과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복수의 언론이 공안당국의 관계자를 통해 확인했다는 혐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이 의원은 지난해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지하조직인 '혁명조직(RO·Revolutionary Organization)'을 결성한 혐의를 받고 있다. 조직원들은 통진당 주축 세력인 '경기동부연합' 출신의 주사파(主思派)들이라고 한다. 국정원은 이 의원이 지난 5월 130여명의 'RO' 조직원들을 모아놓고 '북한 남침 등 유사시에 북한을 돕기 위해 통신시설, 유류시설 같은 주요 시설을 타격할 수 있도록 총기를 준비해 두라'는 식으로 지시하는 내용이 담긴 녹취록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TV조선이 입수한 압수수색영장에도 '지하조직 RO의 강령·규약' '국헌(國憲) 문란 목적의 폭동을 실행하기 위해 모의한 사실 입증자료' '폭동을 실행하기 위해 준비한 총포 등 무기류 조달 입증 자료' 등이 대상으로 나와 있다.”(조선일보 사설) 보수언론으로서는 이러한 혐의 내용을 보도하는 것만으로도 이 사건은 ‘꽃놀이패’다.
▲ 금일(29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조중동’으로 묶이는 주류 보수언론들의 보도양상을 보면 조선일보는 1, 2, 3, 4, 10면에 걸쳐 기사를 배치했고 중앙일보는 1, 2, 3, 4, 5면에 기사를 썼으며 동아일보도 1, 2, 3, 4면에 기사를 올렸다. 두 언론이 5개면, 한 언론이 4개면을 할애할 정도로 비중 있는 보도였다. 다른 언론들과 비교해보면 한겨레가 4개면(1, 2, 3, 4면), 경향신문이 3개면(1, 2, 3면), 그리고 한국일보가 2개면(1, 2면)이었으니 그들만 ‘오버’했다고 보기도 힘들다.
혐의 내용과는 관련 없이 미심쩍을 수밖에 없는 국정원의 의도에 대해서는 보수언론도 지적하는 경우가 있었다. 조선일보는 4면 기사에서 아예 이번 사건의 배경으로 국정원 개혁을 꼽았고, 동아일보 역시 4면 기사에서 “국내파트 보호용 수사”라는 야권의 주장을 반영했다.
보수언론이 사태를 비중 있게 보도하면서도 다소 조심스러웠던 가운데, 진보언론으로 분류되는 한겨레와 경향신문의 태도는 갈렸다. 한겨레 1면 기사 제목이 <‘내란음모죄’의 부활>로 국정원의 수사를 과거 공안정국 조성과 흡사한 것으로 묘사하고 싶은 심리를 보여주었다면 경향신문의 1면 기사는 <국정원, 진보당 이석기 의원실 압수수색>으로 중립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 금일(29일)자 한겨레 1면 기사
두 신문의 차이는 사설에서 좀더 극명하게 드러났다. 한겨레 사설은 <미묘한 시점에 이뤄진 통합진보당 수사>라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국정원의 행위의 동기에 의구심을 품는 것에 방점을 찍었다. 한겨레 사설은 “제도정치에 진입한 국회의원과 정당 간부들이 과연 그런 행위를 했을지 쉽사리 믿기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금 단계에서 섣불리 사건의 진위를 예단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다만 이번 사건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여러 의문에 대해서는 공안당국도 진지하게 숙고해야 한다”라면서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한다. 이석기 의원의 혐의에 대해선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입장이고 국정원에 대해서는 따져 묻는 태도다.
경향신문 사설의 경우 <국정원의 내란죄 수사 지켜보겠다>란 제목으로 큰 틀에선 한겨레와 비슷하게 국정원에 대한 주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부내용으로 들어가 보면 “흘러나오는 이야기만으로도 사실이라면 충격적이다”라고 평을 하는 부분이 있다. 또 통합진보당의 태도에 대해서도 “당사자격인 통진당의 주장처럼 무조건 ‘용공조작극’, ‘진보세력 말살 전략’으로 몰아갈 일은 아니라고 본다. 통진당 관계자들은 반발하기에 앞서 수사에 협조하길 바란다”라고 비판했다. 국정원의 의도와 상관없이 통합진보당의 행동을 옹호할 필요는 없다고 보는 ‘거리두기’의 태도가 있다.
▲ 금일(29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이 사건에 대한 두 신문의 태도의 차이는 어쩌면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작년(2012년) 총선 이후 이른바 ‘통합진보당 경선부정 사태’가 터졌을 때의 보도도 비슷한 측면이 있었다. 한겨레 측이 상대적으로 통합진보당 측을 좀 더 옹호하고 사태의 수습책을 제시했다면, 경향신문 측은 통합진보당 및 구당권파 측을 더 거세게 비판한 측면이 있었다.
당시 한겨레와 경향신문을 모두 아는 한 관계자는 “한겨레는 무슨 사건이 터지면 ‘우리가 중심을 잡지 않으면 진보진영을 옹호할 세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고 경향은 사건이 터졌을 때 ‘진보의 내부비판이 없으면 일이 안 된다’고 보는 쪽이다. 진보진영의 ‘맏형’ 노릇을 하려는 한겨레의 태도가 그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같다”라고 평했다. 이 평은 지금의 보도에도 유효한 지점이 있다.
국정원의 행태나 개혁에 관한 논점이 증발되는 현 시기에 국정원을 지속해서 비판해야 하는 필요성이 있다. 한겨레의 보도 역시 그 필요성에 부응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편으로 한겨레나 진보진영에게도이석기 의원의 혐의가 사실일 경우의 대비책도 있어야 한다. 만약 그러한 혐의가 사실일 경우에도 통합진보당을 ‘범진보진영’으로 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성찰이 필요하다. 진보언론은 국정원을 비판하면서도 이러한 지점들 역시 놓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