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 칼럼니스트 김현회가 지난 4일 네이트 판의 고정지면에서 기성용 선수의 다른 페이스북 계정에서 최강희 전 국가대표팀 감독이 일상적으로 조롱받았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저 사실만을 공개한 것이 아니라 기성용 선수의 몇몇 페이스북 글을 그대로 옮겼고 캡쳐 사진으로까지 ‘인증’했다. 최근 최강희 전 국가대표팀 감독에 대한 비판 트윗으로 문제가 된 기성용 선수와 윤석영 선수를 비판하는 문맥에서였다.

김현회의 글의 전반적인 내용은 축구계 대선배를 존중하지 않는 일부 젊은 선수들의 문제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성용의 메니지먼트사는 이 계정이 기성용의 것인지 아니면 사칭 계정인지 알 수 없다고 설명했지만, 김현회 역시 나름의 취재를 통해 확인된 내용을 썼을 것이다. 여타 매체의 후속보도들에선 이 계정이 기성용의 것이 맞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100% 확신’할 수는 없을지라도, 편의상 이 글은 그 계정이 기성용의 것이 맞다는 전제 하에 쓰고자 한다.

▲ 시즌 준비를 위해 영국으로 출국하는 기성용 선수(스완지 시티 AFC)가 2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에 들어서고 있다. (뉴스1)

‘소셜’이라서 공개해도 된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면 매체비평지 기자의 입장에서 김현회의 처사는 납득하기 힘들다. 김현회를 옹호하는 이들은 SNS(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그 이름에 ‘소셜’이 들어간 것에서도 알 수 있듯 본질적으로 사적인 공간이 아니며 충분히 기사화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SNS 규제나 사찰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보수정치인이나 보수언론의 주장과 비슷하게 들리기도 한다. 보수의 주장이기 때문에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주장의 난점은 각 SNS 계정의 상대성을 고려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트위터가 되었든 페이스북이 되었든 심지어는 블로그까지도 각자의 용도가 있다. 인터넷 공간에 무언가를 끼적인다는 것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섞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것을 전적으로 사적인 것으로 치부하거나, 전적으로 공적인 것으로 치부하면 곤란해진다. 블로그라도 이름 감추고 지인들 몇 명과 하는 경우가 있고, 대안매체의 용도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양자의 성격은 현저히 다른데, 웹에 올렸다고 해서 무조건 공개해도 되는 것일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봤을 때 기성용과 윤석영 선수의 공식 트위터 계정에 올린 글을 기사화 해서는 안 된다고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일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성용 선수가 만약에 자신의 이름조차 숨긴 트위터 서브 계정을 운영한다 했을 때, 이것까지 기사화 해도 된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무리할 것이다.

그렇다면 페이스북 서브 계정은 어떨까? 역시 상식적인 수준에서 생각해볼 때 이 중간 정도 지점에 있지 않을까? 이 계정은 김현회의 친절한 캡쳐 화면을 볼 때 기성용의 영문 이름을 달고 있다. 그러나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운영하던 계정은 아니었고 지인들과 동료 축구선수들이 보는 계정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비밀일기장’이라고까지 말할 공간은 아니지만 공적 지면에 공개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고 무조건 우길 수 있는 공간도 아니다.

기성용 선수 개인에게 충고를 한다면 “SNS에 올린 것은 무조건 유출될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라 말할 수 있겠지만, 기자나 칼럼니스트가 선수들에 대해 “SNS에 올린 걸 우리가 가져다 쓰는게 뭐가 문제냐?”라고 반문한다면 지나치게 안이한 자세일 것이다. 사실은 축구 선수들의 SNS 사용에만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매체들의 SNS 인용에 대해서도 가이드라인이 필요하다.

물론 이 문제에 관해 기자도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본명과 직함을 달고 쓰는 계정의 트윗의 경우 ‘아무개가 트윗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이라고 써도 괜찮을 것 같다는 직관과, 그렇지 않은 계정의 트윗의 경우 인용할 때 아이디를 일부만 쓰고 적당히 가리고 쓰는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는 직관이 있는 정도다. 당연히 명백히 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직관이 드는 행위들도 있다.

그리고 이 사이의 경계선을 판단하는 일은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고민을 멈춰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김현회를 옹호하기 위해 SNS에 올린 글은 사적인 것이 아니라는 식의 일도양단을 하는 것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 이 시각 네이트 판 스포츠 축구 화면의 캡쳐 사진. 네이트 판의 양대 축구 칼럼니스트 존 듀어든과 김현회가 모두 '기성용 페이스북' 상황을 다루었고, 관련 기사도 '도배' 수준으로 생산되고 있는 중이다.

공적인 문제라 이렇게 했다고?

명백하게 공적인 공간도, 그렇다고 명백하게 사적인 공간도 아닌 곳에서 일어난 일을 공적 지면에 공개한 상황의 타당함을 판단할 때 등장할 수 있는 기준은 문제의 공익성에 대한 판단일 것이다.

사실 이 문제에서만큼은 기자는 칼럼니스트 김현회의 판단을 어느정도 이해할 수 있다. 국가대표팀 축구 선수가 자신을 기용해 주지 않았다고 대표팀 감독을 ‘뒷담화’한 수준을 넘어, 해외파와 국내파의 파벌싸움에 감독이 휘둘릴 정도라는 세간의 시선에 대한 증거를 제공해 줄 수도 있는 자료이기 때문이다. '올림픽 동메달'을 만들어낸 멤버들의 '선민의식'을 지적하는 시선에도 어느정도 동의할 수 있다.

그런데 김현회는 기성용의 미숙하고 민망한 게시물을 ‘감독의 고유권한에 대한 선수의 월권’이나 ‘해외파와 국내파의 파벌싸움’의 문제로 접근하지 않았다. 까마득한 축구계 선배에 대한 존중의 문제로 접근했다. 공적인 문제에 대해 사적인 코드로 접근하다 보니 그의 글에는 문제상황을 분석하거나 해결책을 모색하는 부분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예전 선수나 K리그 선수들의 미담과 최근 해외파 선수들의 파행을 비교하는 감정만 남고 말았다. 인천 유나이티드 선수들의 선행과 기성용의 페이스북 사이에 대체 무슨 연결고리가 있단 말인가?

물론 김현회는 한국 축구의 그간의 성과가 선배에 대한 존중과 강한 결속의식이란 문화에 있다고 믿었고, 따라서 축구문제에 있어선 자신이 제기한 문제가 공적인 것이라 믿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 축구가 과거에 그랬다 하더라도 앞으로도 그런 ‘전통’을 유지할 수 있을까? 과거의 전통이 가능했던 조건을 무시하고 맹목적으로 그것을 지킬 것을 요구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일이 아닐까?

또한 김현회가 모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기성용 페이스북의 존재와 내용을 공개하였다 하더라도 그 방식이 굳이 전문 인용과 화면 캡쳐여야 했는지는 의문이다. 공적 문제에 집중했다면 기성용에게 페이스북 계정이 하나 더 있고 여기서도 최강희 감독을 원색 비난했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하는 정도면 충분했을 것이다.

김현회가 굳이 전문 인용과 화면 캡쳐를 선택한 심리적 동기를 설명할 수 있는 가설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선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정의감이다. 물론 기자도 칼럼니스트 김현회가 선정성을 위해 그런 일을 했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랬다면 그는 글에서 고백한 것처럼 이 사안을 공개를 할지 말지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월드컵 최종 예선이 끝나기까지 기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선정성이 정의감을 위해 기능했을 경우다.

즉 김현회는 너무나도 정의감이 넘쳤기 때문에 기성용의 행위가 명백하게 부당한 것임을 만인에게 명명백백하게 밝히기 위해 선정성이란 수단을 선택하게 되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정말로 이 문제를 지적하는데 그 정도의 선정성이 필요했을까? 비록 축구매체에겐 기성용이란 축구선수가 공인임이 명백하고 그의 행위가 공적 문제에 닿아 있었다고 해도, 공인에게는 보호받아야 할 선이 전혀 없는가? 이런 문제 역시 토의해볼만한 것인데, 김현회의 옹호자들은 이것이 논점조차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기자는 그들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다.

한국 축구가 맞이한 새로운 문제

무엇보다 김현회의 글에서 실망스러웠던 것은 앞서도 잠깐 지적했듯 ‘전통’에 대한 향수에 매몰되어 한국 축구에 닥친 새로운 문제를 전혀 지적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김현회에 비해 축구에 대한 지식이나 식견이 현저하게 부족할 기자에게도 그 문제가 어렴풋이는 보이는데 말이다.

현재 유럽리그 등지에서 활동하는 기성용이나 손흥민과 같은 선수들은 ‘국가대표팀에서의 활약이 자신의 돈벌이에 영향을 거의 미치지 않는 첫 세대’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박지성과 같은 ‘2002년 영광의 세대’에 비교하더라도 확연한 변화다.

▲ 축구선수 박지성이 소속팀 복귀를 위해 지난 6월 30일 오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영국 런던으로 출국하고 있다.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로서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지금의 젊은 선수들과는 다른 환경에 있었다. (뉴스1)

박지성 때만 하더라도 그들은 국가대표팀의 성과를 통해 스카우터들의 눈도장을 찍고 빅리그에 진출할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빅리그의 스카우터들은 한국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유망주들이 자국 리그에서 통할 수 있음을 안다.

이로 인해 해외파 선수들에겐 이전의 국가대표팀 선수들로선 상상할 수도 없었던 전혀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과거에는 태극마크를 영광으로 알고 묵묵히 대표팀을 위해 희생하며 감독의 말에 절대복종하는 것이 개인의 영달에도 도움이 되는 행위였다면 지금은 그러한 '행복한 일치'가 깨진 상황이라는 것이다. 손흥민의 아버지가 손흥민의 국가대표팀 차출을 그토록 반대한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물론 한국은 강렬한 애국주의에 대한 열망을 간직한 사회고, 이 사회의 구성원들 중 상당수는 클럽 축구보다 국가대표팀 축구를 사랑한다. 따라서 한국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만큼 국가대표팀을 달가워하지 않는 상황은 오지 않을 수 있다. 또한 기성용 선수는 과거 일본 국가대표팀과의 경기에서 부적절한 인종주의적 세레모니를 하는 등 비뚤어지긴 했지만 나름의 애국주의를 보여준 선수다.

그러나 스쿼드 중에서 10여명이 해외파인 이러한 상황은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새로운 리더십을 요구한다. 야구에 비유하자면 엔트리 중 6-7명이 류현진과 추신수급의 활약을 펼치는 선수일 텐데, 이들을 모아서 포지션 중복 문제와 팀워크 문제를 해결하며 강팀을 만드는 일은 의외로 쉽지 않다.

이는 ‘양박쌍용’ 정도만 중용하고 나머지를 국내파로 채우면 되었던 2010년 월드컵의 상황과도 다르다. 자국리그가 제법 수준은 높지만 그렇다고 빅리그 수준은 아니기 때문에 세계 곳곳의 수준높은 리그에 수준높은 선수들을 보유하게 된 한국 축구는 이제 과거와는 달리 클럽 축구의 기량이 국가대표팀 축구의 기량으로 옮겨오지 않을 수 있는, ‘축구 선진국형 문제’를 안게 되었다.

▲ 구자철(FC 아우크스부르크), 손흥민(레버쿠젠)이 지난 6월 19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63빌딩에서 열린 '아디다스 스폰서십 체결 및 월드컵 진출 소감 발표식'에 참석, 자신의 축구화에 사인을 하고 있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이러한 선수들과 국내파들의 조화를 통해 팀을 만들어내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신상털기’론 기강을 잡을 수 없다

조광래 전 대표팀 감독과 최강희 전 대표팀 감독에게도 이런 상황이 문제였을 것이다. 조광래 전 대표팀 감독은 ‘2002년 세대’를 벗어나 현재 유럽에서 활약하고 있는 이 해외파들을 주축으로 삼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팀을 만들어야 월드컵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해외파는 붙박이 고정에 국내파는 들러리가 되고 팀은 만들어지지 않는 답답한 축구로 귀결되었다.

최강희 전 대표팀 감독은 한국이 월드컵 진출에 실패할지도 모르는 비상한 상황에서 월드컵 진출만을 책임지는 '시한부' 감독의 역할을 맡았다. 따라서 그는 좋은 축구나 한국 축구의 미래를 고민하기 보다는 당장의 승점에 연연할 수밖에 없었고 자기 눈으로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국내파 선수들에게 집착했을 것이다. 해외파 선수들을 다소 길들일 필요가 있다는 문제의식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축구는 월드컵 진출에 성공했기 때문에 어쨌든 그는 목표한 바는 이뤘다고 볼 수 있겠다. 하지만 역시 답답했던 그 축구는 또 한 번 팬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와 같은 상황이 한국 축구를 2002년의 상황이나 1990년대로 되돌리는 ‘전통’의 부활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결국 요구해야 할 것은 과거의 순종적인 국가대표 선수 모델을 벗어난 젊은 선수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리더십일 것이다. 축구 매체라면 기성용을 인격파탄자로 몰기보다 축구를 잘 모르는 이들에게 그것이 무엇일지를 보여줘야만 한다.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선배를 무시한 것이 최근의 조류라는 김현회의 주장도 동의하기 힘들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지나친 낭만주의의 발현일 뿐이라 생각한다. 1996년 12월 두바이에서 열린 아시안컵 8강전에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이란에게 2:6으로 패하는 치욕을 맛보았다. 당시 한국 축구는 2:1로 앞서던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차례로 5골을 내주며 패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훗날 당시의 주축 고참 선수들이 ‘청소년 축구 4강 신화’의 박종환 감독에 항명한 사건으로 해석되었다. 당시엔 SNS가 없었지만, 국가대표팀의 기강이나 선후배 관계를 문제삼는 문맥에선 어쩌면 이것이 더 심한 사건이었던 것 아닐까? 기성용은 '다친다'고 말만 했지만, 그 선수들은 실제로 '대선배'가 다치도록 집단행동을 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당시 박종환 감독은 선수 폭행의 혐의를 받는 등 구시대의 리더십을 상징했다.

선수들의 행동은 분명히 잘못이었겠지만 그 사건을 통해 한국 축구는 그러한 구시대의 리더십과 결별할 수 있었다. 물론 최강희 감독의 리더십이 박종환 감독의 그것처럼 인권유린의 수준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더라도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 역시 선수들의 인성을 규탄하는 것이 아니라 박종환을 떠나보내던 것과 비슷한 종류의 결별과 모색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건방진 선수’에 대한 ‘신상털기’는 기강을 잡을 수 있는 대안이 아니란 것이다. 선수들이 SNS 계정을 전부 삭제하고 불평불만을 머리 속으로만 한다 하더라도 한국 축구가 직면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김현회의 접근이 옳을까? 기자는 그런 생각에 동의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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