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해 11월 12일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이 출연료 미지급 문제로 촬영거부 투쟁에 나섰다. 사진은 조합원들이 투쟁 출정식을 마치고 KBS 본관 앞으로 이동하는 모습 ⓒ뉴스1

화려해 보이기만 하는 TV브라운관 속 연예인들. 그러나 일부 톱스타를 제외한 일반 연기자들의 형편은 결코 녹록지 않다. 국내 방송에서 활약하고 있는 탤런트, 성우, 개그맨, 무술연기자, 연극인이 소속된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전체 조합원 5000여 명 가운데 70% 이상이 연 1000만원 미만의 소득으로 일상을 꾸려간다. 4대 보험 조차 적용받지 못하고, 출연료가 떼여도 속수무책이다. 방송의 매력에 이끌려 이 바닥에 발을 들여 놓았다가, 엄혹한 현실 앞에서 절망하고 다른 업종으로 빠진 전직 연기자들도 허다하다. 미디어스가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 연기자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라고 반문했다.

미디어스는 화려한 방송계의 이면, 그늘진 사각지대를 집중 조명하는 기획을 마련했다. 기획은 총 5차례에 걸쳐 게재된다. 탤런트(1회), 성우(2회), 개그맨(3회), 무술연기자(4회) 4차례에 걸쳐 이들의 현주소를 조명할 예정이며 마지막 기사(5회)에서는 이들의 처우를 개선하기 위해 어떤 법제도 장치들이 필요한지 고민해 본다. (편집자주)

551,810원. 얼마 전 단막극에 출연했던 연기자 A씨가 받게 될 출연료 총액이다. 7등급 연기자인 A씨의 70분 분량 단막극 출연료는 605,300원. 여기에 야외비(6~11등급 기준) 140,000원, 식사비 8,000원, 경기지역 촬영으로 인한 교통비 35,000원을 더한 A씨의 출연료 총액이 나온다.

원래대로라면 788,300원을 받아야 하는 A씨가 551,810원만 손에 쥐게 되는 이유는 뭘까. 바로 캐스팅디렉터 수수료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등장한 캐스팅디렉터는 출연 기회를 잡기 어려운 연기자들과 빠른 시간 내에 급히 배우를 구하기 힘든 제작진 사이에서 캐스팅 업무를 맡는 이들이다. 문제는 이들이 ‘배역 따기’ 성과라는 명목으로 연기자들에게 수수료를 30%나 뗀다는 데 있다.

연기자들은 출연료 총액에서 소득세, 주민세, 노조비를 빼지만, 개인별 차이를 감안해도 총액의 5% 수준이라 부담이 크지 않다. 등급이 높지 않은 생계형 연기자들에게 30%나 되는 수수료는 적지 않은 부담이다. 게다가 임금 지급 시기도 늦고, 야외비나 식사비 등 수당이 때때로 누락되기도 해 연기자들의 한숨은 더욱 깊다.

TV 화면에서 흔히 만나는 연기자들은 의외로 고용 안정성이 매우 떨어진다. 연기자라고 하면 이름이 잘 알려진 유명 연기자들을 상기하는 대중들은 대부분의 연기자들이 적은 임금과 열악한 노동환경 속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출연료 미지급 사태가 일어나도 근로자로 인정받지 못해 문제 해결에 난항을 겪는 연기자들은 말 그대로 방송가에서 ‘노동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미디어스는 지난달 29일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탤런트 지부 안인희 사무국장을 만나 연기자들의 ‘노동 소외 실태’에 대해 들어 보았다.

* 이날 인터뷰에는 송창곤 한연노 사무처장이 동석해 ‘캐스팅디렉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다.

높은 수수료 거부하면 출연 기회도 날아가

미디어스(이하 미) : 캐스팅디렉터란 무엇인가.

▲ 안인희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사무국장 ⓒ한연노

안인희 사무국장(이하 안) : 예전에는 일거리가 없어 쉬는 배우들이 많지 않았다. 드라마 제작진들에게 ‘일이 없다’고 하면 촬영 나가면서 즉석에서 출연 기회를 주기도 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2004년 정도부터 캐스팅디렉터라는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났다. 일종의 직업소개소처럼 사무실을 내서 캐스팅 업무를 맡는 건데, 수수료를 30% 떼 간다. 노동법에 보면 전문 인력 소개비 명목으로 제할 때 사용자가 20%, 구직자가 4% 지급하도록 돼 있지만, 연기자들은 근로자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이 부분도 적용이 안 된다. 그래서 수수료 문제도 손쓰기가 어렵고, 결국 피해는 연기자들이 본다. 또, 30%도 기본 출연료에서 제하는 것이 아니라 교통비, 야외비 등 수당을 붙인 총액의 30%라서 부담이 더 크다. 예전에는 출연 기회 제공은 PD 고유의 권한이라고 해서 한연노의 개입을 막았는데, 이제는 캐스팅만 하는 사람을 두고 책임을 그쪽에 돌려버린다.

미 : 높은 수수료 외에 또 다른 문제점은 없나.

송창곤 사무처장 (이하 송) : 높은 수수료뿐 아니라 연기자들에게 출연료를 직접 지급하지 않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다가 임의로 지급하는 등의 문제도 있다. 연기자들이 사례를 받는 게 아니라 본인이 한 노동 대가로 받는 임금인데 정기일에 지급하지도, 직접 지급하지도, 전액 지급하지도 않는다. 또, 출연료뿐 아니라 교통비, 숙식비 등 수당도 기준이 정해져 있는데 캐스팅디렉터들이 수당 일부를 누락하는 경우도 있다. 수당 누락으로 받을 돈이 적어졌는데도 수수료 30%는 그대로 떼어간다.

미 : 캐스팅디렉터 때문에 연기자들이 겪는 피해도 크겠다.

송 : 수수료 비용 합의가 안 되면 “방송 안 할 거냐”라고 나오는 사례가 너무나 많다. 연기자들은 지급이 하루 이틀 늦게 되는 경우는 대부분 기다린다. 사이가 틀어지면 다음 방송 출연 기회도 없어질 수 있으니까. 그런데 캐스팅디렉터는 연기자들에게 지급할 출연료를 중간에서 받아 개인이나 사무실 용도로 쓰기도 한다. 큰 금액이 장기간 미지급될 경우 연기자들은 더 힘들어진다. 연기자들은 자신이 받을 임금을 미리 계산하고, 촬영 기간 발생하는 비용을 개인이 처리하는데 이때 대출을 받는다. 이때 출연료 지급이 안 되면 대출금을 못 갚고 신용도도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미 : 방송사나 제작사는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하는데도 캐스팅디렉터를 쓸까.

송 : 만약에 새벽 촬영 때 당장 배우가 필요하다고 하면 제작진 입장에서는 배우 구하기가 힘들지 않나. 하루 이틀 출연하는 단역 배우들을 수급하는 일을 캐스팅디렉터가 하니 제작자 입장에서는 편한 것이다. 또 출연료 문제 등이 있을 때에도 책임을 캐스팅디렉터에게 맡길 수 있고. 연기자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연기자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카메라 앞에 서는데, 캐스팅디렉터는 또 다른 ‘갑’의 형태로 자리한 것 같다.

미 : 캐스팅디렉터에 대한 문제제기를 한 적은 없나.

안 : 생계형 연기자들이 피해를 보니까 캐스팅디렉터를 쓰지 말라고 수없이 얘기했다. 지난해에도 지상파 3사 국장, 본부장급들도 ‘캐스팅디렉터를 공식적으로 쓰지 않겠다’고 했으나 여전히 캐스팅디렉터는 활동하고 있다.

임금 양극화에 복지 처우도 ‘부실’

▲ 연기자들의 출연료 총액 지급 내역. 캐스팅디렉터에게 돌아가는 수수료 30%를 떼지 않은 상태다. ⓒ한연노

미 : 탤런트들의 임금이나 처우 수준은 어떤지 궁금하다. 4대 보험은 적용되는가.

안 : 1%의 상위 연기자들은 회당 몇 천 만원에서 억 단위를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연기자들은 몇 십만원 수준이다. 지난해 기준으로 KBS의 10분 기본료는 6등급 기준 34,650원이고 MBC, SBS의 10분 기본료는 6등급 기준 35,310원이다. 6등급 연기자가 60분짜리 미니시리즈 한 회분을 찍으면 대략 37~38만원 정도를 받는 수준이다. 일의 강도에 비해 복지 부문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편이다. 4대 보험도 안 된다.

미 : 노동환경이 열악하다고 들었는데.

안 : 밤샘 촬영이 일상이고, 부상당해도 일을 한다. 물론 연기자에게 촬영은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병원에도 가지 않고 열의를 다해 연기하는 건 ‘굉장한 일’인데, 현장에서는 이를 당연하게 느낀다는 게 문제다. 마치 모든 배우들이 그렇게 해야 되는 것처럼. 고액을 받는 연기자들만 얘기가 많이 되다 보니, 다수 연기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잘 정립돼 있지 않다.

미 : 연 수입 1,000만원이 안 되는 조합원들이 70~80%라고 들었다. 이런 연기자들은 어떻게 생활을 꾸려 가는가.

안 : 한연노 조합원 4,500명의 조합비를 1/N로 나누면 평균 연봉이 2,500~3,000만원 정도로 나오는데, 고액을 받는 유명 연기자들도 조합원에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실상은 1,000만원 이하의 수입을 올리는 사람들이 70%에 달한다. 이런 생계형 연기자들은 대리운전 등 다른 일을 같이 하기도 하지만, 그나마 얼굴이 좀 알려진 경우에는 다른 일을 하기가 어려워 공치는 경우도 많다.

KBS, 연기자들과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가장 ‘소극적’

미 : 지난해 한연노는 <공주가 돌아왔다> 등 KBS 드라마 5편에 대한 출연료가 미지급됐다며 KBS 드라마 촬영 거부에 나선 적이 있다.

안 : <공주가 돌아왔다>는 이미 방영한 지 5, 6년 된 드라마인데 아직까지 끌고 있는 거다. KBS는 드라마 방영 당시에는 사장 이름으로 해서 출연료를 언제까지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는, 나중에 출연료 미지급 문제를 따지자 그때 사장(김인규 전 사장)에게 받으라고 나오고 있다. MBC, SBS도 출연료 미지급 사태가 벌어지지만 적어도 그쪽은 문제 해결 의지가 있다. 본부장 급이 나서서 이야기도 하고, 언제까지 갚겠다는 약속도 한다. 하지만 KBS는 전혀 의지를 보이지 않는다.

미 : KBS가 유독 출연료 미지급 등 방송사-연기자 간 문제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는 말인가.

안 : KBS는 연기자들을 같은 식구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권위적이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다. 지난해 촬영 거부 투쟁을 할 때에는 본관, 별관까지 폐쇄해 버렸다. 한연노 탤런트 지부장은 70이 다 되어가는 분인데, KBS 관계자는 욕을 하더라. 연기자들을 무시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고 본다. 존중하는 태도가 없으니까. 한연노가 출연료 미지급 등 향후에 문제를 일으킬 위험성이 있는 외주사에 대해 방송사에 미리 얘기해주는데도, ‘우리가 해결하겠다’고 해 놓고 나중에는 말이 달라진다. 가장 우려하는 것은 KBS의 이런 자세를 MBC, SBS에서도 따라가 관례화되는 것이다.

미 : 출연료 미지급 문제 외에 다른 문제들은 어떤 것이 있나.

안 : 편성 당시 기준보다 더 많은 방송시간을 내보내는 꼼수를 <개그콘서트>는 10년 동안 해 왔다. 처음 계약했던 분량보다 초과되는 부분의 출연료가 누적되면 엄청난 수준이 된다. 예전에는 계약할 때 60분, 70분 이렇게 분량이 명시돼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회당 계약을 한다. 분량 명시 없이 회당 계약을 할 경우 40분짜리가 70분으로 늘어나도 항의할 수 없어진다. 또, 방송에서 편집이 되더라도 출연료 100% 지급해야 하는데 편집되면 임의로 더 낮춰서 주기도 한다. KBS는 공영방송인데 KBS에서 일하는 연기자들은 외국인 노동자들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다. “억울하면 법대로 하세요”라고 말하니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다.

연기자의 ‘근로자 지위’ 인정해야

미 : 이야기를 들어보니, 다수의 연기자들이 열악한 노동환경과 저임금 구조에서 일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일까.

안 : 연기자들이 큰 것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많은 국민들이 누리고 있는 기본권 정도를 원하는 것이다. 한국에서 일하고 있으면서도 근로자 지위를 인정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있다. 하루빨리 근로자로 인정받아 출연료를 ‘임금’으로 처리해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보다도 못한 것 같다. 연기자를 꿈꾸는 청소년들도 상당히 많은데 연기자들에 대한 정책적 뒷받침이 잘 안 돼 있어 아쉽다. 개선이 필요하다고 본다.

미 : 방송사의 노력도 필요할 것 같다.

안 : 출연료 미지급 사태의 책임은 방송사에게도 있다. 방송사에서도 보다 책임 있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또, 연기자들을 작품을 함께 만들어 가는 파트너로 인식해주길 바란다. 과거에는 PD들이 연기자들에게 모욕감을 주며 욕하는 경우가 잦았다. 요즘은 조금 나아졌지만 여전히 동등하지 않은 수직관계에 있다. 한연노는 근로조건 향상과 함께 권익 보호를 위해서도 노력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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