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연기자들의 ‘근로자성’을 인정하는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등법원 제7행정부(부장판사 민중기)는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이하 한연노)가 중앙노동위원회(이하 중노위)를 상대로 제기한 교섭단위분리 재심결정 취소 소송(원고 : 한연노, 피고 : 중노위 위원장, 피고보조참가인 : KBS) 항소심에서 한연노의 손을 들어줬다. 재판부는 22일 “방송 연기자들은 참가인의 지휘 감독을 받는 사용종속관계에 있으므로 노동조합의 적격성을 부인한 1심 판결은 위법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방송 연기자는 노동조합법 상의 근로자”라며 “방송 연기자는 방송사의 지휘 감독을 받는 사용종속관계에 놓여 있으므로 방송사는 교섭단위를 분리할 필요가 있다”고 판시했다.

한연노 측 변호를 맡은 강윤희 변호사는 “노동정책이 전반적으로 사용자에게 유리하게 판결이 나오고 있는 이때에 방송 연기자들의 근로자성을 입증하고 단체교섭 상대로서 방송사의 의무를 법률적으로 확인한 판결”이라며 “앞으로 대법원 판결까지 갈 것으로 예상이 되지만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한영수 한연노 위원장은 “외주제작시스템 뒤에 숨어 자신들의 사용자성을 부인해 오던 방송사의 부당함에 대한 사법적 응징”이라며 “출연료 미지급 등 열악한 방송 환경개선에서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던 방송사에게 모든 책임이 있지만, 앞으로는 서로 대결하고 갈등하는 단계를 벗어나 서로 대화하고 화합해 질 높은 방송환경을 위해 서로 힘을 모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복수노조 하의 교섭창구 단일화 조치 이후 시작된 분쟁

이번 소송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지난 정부에서 시작된 ‘복수노조 하의 교섭창구 단일화 조치’ 때문이다. 1988년 설립 이후 26년 동안 한연노는 노사교섭 당사자로서 방송사와 직접 단체교섭을 해 왔으나, 이 조치로 인해 KBS 사내 노동조합들과 교섭창구를 단일화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 2012년, KBS 출연료 미지급 사태 때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사무실에 걸려 있던 플랜카드 (사진=미디어스)

한연노는 “촬영 현장에서 방송 연기자에 대해 사용자라 할 수 있는 방송사 직원들로 구성된 사내 노조와 한연노가 교섭창구를 단일화해야 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KBS에 교섭단위 분리 협상 요청을 했지만 거절당했고, 2013년 2월 지방노동위원회에 제소했다.

지노위는 한연노의 주장을 받아들여 KBS에게 한연노와 KBS 사내 노조를 분리해 교섭하라는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중앙노동위원회는 ‘한연노 소속 연기자들은 KBS에 전속성이 없으므로 교섭단위 분리 결정을 신청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며 지노위의 판정을 뒤집었다.

한연노는 중노위의 판정에 반발해 2013년 4월 행정소송을 제기했으나, 1심 재판부는 그해 11월 중노위의 판단이 맞다고 판결했다. 한연노는 지난해 4월 항소했고, 이번 고법 판결에서 승소해 2년 여 만에 ‘연기자의 근로자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한연노는 26일 공식입장을 내어 “방송 연기자는 실질적으로 방송사의 지휘감독을 받고 있으며 이에 따른 근로성을 인정받았다. 방송사는 교섭당사자로서 방송연기자와 신의 성실하게 교섭에 임하라는 판결이기도 하다”며 “오랫동안 유지해 온 방송사와 우리 방송 연기자들이 대등한 노사관계로서 서로 교섭상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확인해준 너무나도 당연한 판결”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이번 판결로 거대 방송 권력의 횡포에 제동을 걸었다”며 “수많은 비정규직 근로자와 고용 불안에 신음하는 우리 사회의 많은 근로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주는 판결로서 의미가 크다”고 전했다.

연기자들의 ‘근로자성’ 입증된 첫 판결… 한연노, 교섭 재개 요청

한연노 송창곤 사무처장은 27일 <미디어스>와의 통화에서 “이번 판결은 방송 연기자들의 ‘근로자성’을 인정받은 첫 판결”이라며 “재판부는 ‘한연노는 노조법 상 근로자라고 판단되므로 방송사에게 단체교섭을 즉각 이행하라’고 했다”고 설명했다.

한연노와 방송사들은 2012년부터 현재까지 ‘무단협’ 상태다. 방송사 혹은 제작사와 연기자가 개별 계약한 내용 중 부당한 조항이 있더라도 한연노 차원에서 맺은 단협 내용에 위배될 시 해당 조항을 무효로 한다는 원칙이 있어, 연기자들이 일정 부분 보호받을 수 있었는데 ‘교섭창구 단일화 조치’ 때문에 그동안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는 것이 한연노의 입장이다.

이번 판결로 근로자성을 확인받아 ‘교섭 주체’로 인정받은 만큼, 한연노는 KBS, MBC, SBS 3사에 단협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으나 아직 공식 답변을 받지 못했다. 송창곤 사무처장은 “사실 법적 분쟁은 마지막 아니냐. 저희는 늘 양보와 대화를 하자고 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판결 받고 나서 ‘이렇게 당연한 주장이 인정되는 것도 참 힘들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전했다.

송창곤 사무처장은 “이번 판결로 ‘근로자성’이 인정됐다고 하더라도 방송사와 연기자는 어쩔 수 없는 갑을관계다. 저희가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출연을 했으면 출연료를 달라는 것이고, 연기할 때 이 직업군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게끔 최소한의 안전장치만이라도 마련해 달라는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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