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늘자 조선일보 8면 기사.
경찰이 국정원 직원 선거개입 의혹에 대한 수사를 검찰로 넘겼다. 경찰은 이 사건이 국정원법을 어긴 ‘정치개입’은 맞지만 공직선거법을 어긴 ‘선거개입’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지난 대선 정국에서 사건 조사 사흘 만에 무혐의라는 발표를 한 것에 대해선 경찰 상부에서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정치개입이라 부르든 선거개입이라 부르든 확실한 것은 그 직원이 인터넷 사이트에 정치적 의견을 개진했다는 것이고 그걸 업무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직원의 설명은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북한 매체의 주장에 반하는 게시글을 올리면 북한 사이버 요원 등이 미끼를 무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글을 올린 것은 북한 사이버 요원이나 종북세력의 반응을 보기 위한 대북 심리전 의무의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 매체의 주장에 반하는 의견은 무엇인가. 그 직원의 활동을 통해 추론한다면, ‘대통령이나 국정원장의 정치적 견해’였던 것 같다. 현 정부 정책에 대한 반대를 북한의 주장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북한도 현 정부를 비판하고 어떤 이들도 현 정부를 비판하니 그 어떤 이들은 북한에 포섭되어 있을 거라는 논리다.
그의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여 역으로 적용한다면 정부 정책을 옹호하는 인터넷 여론은 국정원을 비롯한 공무원들과 결부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 우리는 그들의 의견에 반대하면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국정원 직원 등이 미끼를 무는 경우가 있을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개 인터넷 잉여들의 망상 속에서나 적합한 얘기를 현직 국정원 직원이란 자가 업무로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경찰수사 내용보다는 이 해명이 우리를 더 경악스럽게 한다. ‘정권에 반대하면 북한사람’, ‘정권에 찬성하면 공무원’ 수준의 ‘초딩 논리’가 국정원의 대북심리전이라 고백하는 셈이니 말이다. 대북심리전을 전개하고 싶다면 방대한 웹에 스며든 북한 사이버요원에 대한 신경전을 끄시고 북한 방문을 간절히 원하는 ‘종북 주사파’들을 대거 북한에 보낼 일이다.
종북 주사파라도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물을 먹은 그들은 북한 인민들보다 훨씬 자유로울 것이고, 그 ‘자유의 향기’에 인민들은 심리적으로 영향받을 테니 말이다. 북한 임수경 방북 당시 자신들의 ‘오판’을 알고 있는 북한 당국은 외려 이들이 북한에 오는 것을 질색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이런 수준이 되어야 심리전이라 부르는 것이지 ‘게시판 키배’ 수준도 안 되는 도배행위를 심리전 업무로 담당했다는 것은 제 얼굴에 대고 똥을 싸는 해명이다. 정권이 공무원들의 정치적 견해를 묶어두고 그것 통해 시민들의 견해를 바꾸려고 한다면 그게 ‘대남심리전’이지 어찌 ‘대북심리전’이겠는가.
사실은 국정원 직원의 업무가 ‘대북심리전’이 아니라 ‘정치개입’ 내지는 ‘선거개입’이었다고 해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물론 국정원이 무슨 의도로 직원에게 그런 업무를 맡겼는지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수사해야 하고 관련책임자들을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그 직원의 활동이 시민들의 정치적 견해나 지난 대선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시민들의 의견에는 다양한 결이 있고 그것들은 대통령의 생각과 북한 매체의 생각으로 치환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국정원 직원들이 굳이 나서지 않아도 그와 비슷한 견해를 펼치는 유권자들은 대한민국에 널려 있다.
보수세력이 만들고 싶은 것은 1997년 대선 이전의 ‘정권교체가 불가능해 보였던 세상’이겠지만 그 욕망이 만들어내는 행동의 결과는 촌극에 가깝다. 안타까운 것은 해당 사안에 대한 정확한 비판 없이 ‘선거개입’이란 단어가 부풀려지는 과정에서 민주당이 마치 부정선거에 패한 것과 같다는 여론이 야권 지지자들 사이에서 유포되는 것이다.
비록 국정원이 불법행위를 저질렀을 지라도, 전후사정을 볼 때 민주당은 국정원 때문에 패배했다기 보다는 자신들의 무능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국정원의 행위에 대한 엄정한 수사 촉구 중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국정원의 문제는 선거에 대한 영향력이 아니라 그 철저하게 무의미한 일을 업무로 하는 그 지독한 무능력과 세상에 대한 부적응에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야 야권이 국가권력에 대한 질타를 하면서도 자기 자신의 역량에 대한 성찰을 멈추지 않을 수 있다.
▲ 오늘자 조선일보 8면 기사. 해명이 더 웃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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