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통합당 임수경 의원의 탈북자 발언 파문에 대해 며칠째 보수언론이 비판과 성토를 이어가고 있다. 그중에도 가장 눈에 띄고 빛난 것은 동아일보 보도였다. 동아일보 6월 5일자는 사내기자의 칼럼을 1면에 배치하는 파격적인 편집을 선보였다. 최근 동아일보에서 보기 힘들었던 이 편집은 동아일보에 탈북자 출신의 기자가 있기에 가능했다. <탈북 주성하 기자, 탈남한 임수경 의원에게 보내는 편지>가 그것이다. …

▲ 5일자 동아일보 1면

보수언론이 임수경 발언을 통합진보당 일부는 물론 민주통합당 전체가 종북주의에 물든 증거로 몰아가기 위해 광분하고 있지만 그와 별개로 합당한 비판은 인정되어야 한다. 이 칼럼은 내용도 무척 훌륭할뿐더러, 뜻밖에도 ‘종북 도깨비’를 색출하려는 극우세력의 공세 속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할 이유를 가장 정확하게 제시한다.

“3년 전 저는 ‘임수경이 북한에 뿌렸던 금단의 열매들’이라는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 글에서 저는 당신을 ‘북한 주민들의 정신적 해방에 큰 기여를 한 공로자’라고 했습니다. (...) 1980년대 말 북한 사람들이 아는 남조선은 ‘헐벗고 굶주리는 미제의 식민지’였습니다. 사람 못 살 그러한 곳에서 청바지에 면티를 입고 날아온 당신의 모든 행동과 발언은 너무나 거리낌 없었고 독재 사회에서 기죽여 살아온 흔적이란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남한 당국이 판문점을 통해 돌아가겠다는 당신의 요구를 수용해준 것은 상상 못할 일이었습니다. 당신이 분단선을 넘는 날 북한 주민들은 슬퍼했습니다. 저 정도의 ‘대역죄인’이라면 8촌까지 멸족될 것이라는 것이 북한 주민들이 유일하게 아는 상식이었습니다. (...)

당신이 재판을 받는다는 소식, 감옥에서 조카에게 썼다는 편지, 그리고 3년 만에 석방됐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하면서 북한 주민들은 남조선이 당국의 선전과는 전혀 다른 세상임을 알았습니다.“

극우파들이 원하는 남한 사회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에 비판적이거나 북한에 편향적인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사회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그것이 만들어내는 경제적 풍요를 긍정하는 그들이 바라는 사회를 굳이 현실세계에서 찾아보자면 싱가포르 정도일 것이다. 싱가포르보다 훨씬 더 숫자가 많은 남한의 국민들이 일사분란하게 마스게임을 펼치며 ‘김일성·김정일·김정은 개새끼’를 외치는 세상만이 그들을 황홀경에 빠뜨릴 것이다.

그러나 남한 사회가 그런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면 임수경이 북한에 줄 수 있었던 충격도 반감되었을 것이다. 임수경이 북한에 전파한 것은 남한의 풍요 뿐만이 아니라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자유’의 향기였다. 이것이 임수경 사건의 역설적인 지점인데, 남한의 극우파들은 북한 체제에 가장 심대한 타격을 끼친 그녀들의 활동을 금지하고자 한다.

제아무리 남한에서 과격한 주체사상파도 북한에 가면 그 주민들에게 ‘자유’의 향기를 내뿜게 되고, 제아무리 북한에서 진보적인 사람이라도 남한에 오면 고작 이 정도 정부의 권력·폭력에 항의하는 남한 시민들을 이해할 도리가 없다. 이것이 오늘날 남한과 북한의 현격한 인권지수 차이가 만들어내는 엄연한 현실이다. 극우파는 전자를 금지하면서, 후자의 심성으로 남한 사회의 인권신장을 방해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거 북한에선 총살인 거 아시죠?’라는 반인권적인 농담이 비록 끔찍하더라도 금지될 일은 아니듯, (그녀의 해명대로라면)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이나 (백요셉씨의 주장대로라면) 탈북자를 변절자로 바라보는 임수경의 시선도 비록 끔찍할 수는 있지만 금지될 일은 아니다.

▲ 탈북자 단체는 그녀를 비판하고 나섰다. ⓒ연합뉴스

저 정도 대역죄인이라면 8족까지 멸족될 거라는 북한 주민의 ‘상식’이 우리에겐 끔찍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어떤 사회 사람들에겐 단지 북을 다녀오고 남한 사회를 비판한 임수경이 3년이나 형을 살았다는 것도 끔찍하게 느껴질 것이다. 우리가 끔찍하게 폭압적인 통치로 묘사하고 기억하는 일제 총독부가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대우한 수준이 겨우(?) 그 정도였다. 만해 한용운은 3.1 독립운동을 주도한 죄로 3년 징역형을 살았고 김좌진 장군이 군자금을 마련하다 체포되었을 때 받은 형이 2년 6개월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은 정식재판을 받았고 길어야 2~3년 정도 옥살이를 했다. 이런 정도의 탄압을 우리가 끔찍하게 느끼지 못하게 된 이유는 물론 남한의 ‘군사독재’와 북한의 ‘종교독재’가 해방 이후 인권감수성을 더욱 바닥으로 떨어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남북 교류협력만을 강조하면서 북한의 참혹한 실상에는 눈을 감는 이들의 균형감각을 비판할 수는 있다. KAL기 폭파가 남한의 조작이라 믿는 이들, 아직도 6.25가 북침인지 남침인지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이들의 편향된 인식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런 이들이 국회의원이 되었을 때 그 사실을 비판할 수 있고, 그들이 한 정당의 주류인지 아닌지를 물어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비판이 어떤 ‘금지명령’의 형태로 나아가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남한 체제가 북한보다 우월한 것은 임수경과 하태경이, 낭만적 민족주의자와 북한 인권운동하는 사람들이 공존하기 때문이지 한쪽이 한쪽을 몰아냈기 때문이 아니다.

민주주의 체제는 다른 정치체제와 달리 모든 시민이 신념에 찬 민주주의자가 되어야 만이 성립할 수 있는 체제는 아니다. 물론 그런 이들이 다수가 되도록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이를테면 북한 체제처럼 태양신 일족을 믿는 척은 해야 살아갈 권리를 획득하는 상황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체제 안에선 박정희 군부독재의 재림을 원하는 이들이나 태양신 일족이 세계를 지배하는 미제에 대항하는 최후의 보루라고 믿는 이들도 다른 시민들과 같은 정치적 권리를 지닐 수 있고, 그래야 한다. 그래서 사실 극우파가 주사파를 남한 사회에서 척살해야 한다는 욕망을 표출할 때, 그들은 ‘신념에 찬 민주주의자’이기는커녕 사실상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를 민주주의자의 것으로 포장한다.

▲ 4일 탈북자 비하 논란에 대해 사과 기자회견을 하는 임수경 의원 ⓒ연합뉴스

그 점에서 극우파와 주사파의 관계는 한국 사회에서 차라리 공모가 된다. 그들에겐 모든 이가 ‘진리’를 공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변변찮은 사상의 공존을 인정하는 것이 민주주의라는 인식이 없다. 극우파는 주사파가 변변찮으니 사라져야 한다고 믿고, 주사파는 사상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상은 변변찮지 않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독재에 대해 발휘하는 체제의 우월성은 그들이 공유하는 이해의 저편에 있다. 주성하 기자가 3년 전에 썼다는 <임수경이 북한에 뿌렸던 금단의 열매들>을 찾아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북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은 다 막아놓으라면서 입으로만 '김정일 타도, 북핵 폐기, 북한 주민 해방'을 부르짖는 사람들보다는 임 씨의 공로가 백배 천배 크다. 그는 적어도 북한 주민들이 속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어 북한 주민들의 정신적 해방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것은 총칼의 힘과 마찬가지로 엄연히 현실세계에서 작동하는 ‘관용’의 힘이다. 관용의 힘을 믿는다고 군대해산을 주장해야 할 논리적 필요성이 없듯이, 총칼의 힘의 중요함을 믿는다고 하여 이런 영역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이유도 전혀 없다. 설령 극우파들의 생각대로 그들이 비판하는 이들이 주체사상파이며 대한민국을 허물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만일 그 의도가 행위로 드러난다면 우리의 체제는 자신을 수호할 방법과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게 아니라 소위 보수언론이 묘사하는 주체사상파가 수만 명 정도가 실제로 있어 그들이 자유롭게 북한을 오가며 박근혜가 했던 것처럼 만경대를 방문하고 주체사상탑에 참배한다 치자. 그렇더라도 대한민국 헌정질서를 무너뜨리려는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지는 않는다. 대체 '종북'을 말해도 건드리지 않는 이 좋은 체제를 놔두고 뭐하러 태양신 가문의 의지에 제 목숨을 맡기는 체제를 선택할 것인가. 이 '자유'의 증대를 통해 위협을 느끼는 것은 오히려 남한 체제가 아니라 북한 체제일 것이며, 금세 이 골치아픈 방문객들을 '금지'하고픈 심정이 될 것이다.

순국선열의 넋을 기리는 이 현충일에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우리의 체제를 수호한 것은 국방력과 경제력만이 아닌 자유와 관용의 힘이었다는 것이며, 이 힘을 증대하는 것을 방해하는 세력이 국가보안법을 부여잡고 '종북 메카시즘' 사냥을 벌이는 그 세력들이라는 것이다. 그들이 상실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헌정질서가 아니다. 사실 그들은 군인들이 그것을 짓밟을 때 그에 저항한 적이 없다. 다만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의 정치적 적대자들을 공격할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수단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임수정과 이석기와 김재연의 국회입성을 금지하면서 남한 사회가 북한 사회에서 한발자국 더 떨어지는 것을 안간힘을 다해 막음으로써 체제의 힘을 발휘할 기회를 박탈한다. 주성하 기자는 이번에 임수경 의원에게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5일자 동아일보 5면

“당신은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개성공단 방문 신청서를 냈지요. 꼭 북한에 가길 바랍니다. 당신에게 ‘통일의 꽃’이라는 타이틀을 붙여준 북한 대남부서는 지금까지도 남쪽을 ‘반통일 파쇼독재’라고 끊임없이 비난하고 있습니다. 파쇼독재하에서 누구보다 탄압을 받아야 할 당신이 국회의원이 되고, 반통일 정권이 당신이 국회에 입성하자마자 북에 보내주는 것을 보면 북한 당국의 백만 마디 비난이 무색하게 될 것입니다. 가서 직접 한국의 민주주의와 인권 실태를 몸으로 생생히 보여주길 바랍니다.”

전적으로 동감이다. 보수언론들이 주성하 기자가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통찰한 이 인식을 그저 임수경을 공격하는데만 활용하지 말고 좀더 심오하게 받아들이기를 권고한다. 그들이 임수경의 발언을 비판하면서 자유민주주의의 껍데기가 아닌 그 참가치를 수호하게 되기를 희망한다. 마찬가지로 통일운동하는 이들이 북한인권 운동을 하는 이들을 ‘변절자’로 보는 일이 더 이상 없기를 소망한다. 실질적인 효과를 위한 방법론을 달리 고민할 수는 있겠지만 '진보의 편향'을 지적하는 이들의 논리대로 그 운동 역시 ‘진보’의 가치 안에 포섭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 지난 1989년 평양에서 북한 주민들로부터 환영받고 있는 임수경 ⓒ뉴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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