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전쟁의 시대이다. 북한은 3차 핵실험 이후 군통신선을 끊거나 전시상황임을 공표하는 등 ‘뭔가 있는 것처럼’ 미국에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미국은 그런 북한을 철없는 애 보듯 하고 있는 분위기지만 어쨌든 핵미사일(또는 그것이 될 수 있는 어떤 존재)을 둘러싼 긴장은 한반도에 살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주고 있다.

냉전시대의 서구권 사람들 역시 이런 불안감을 똑같이 안고 있었던 것 같다. 소련과 미국이 세계의 양대 축으로 군림하며 서로 군비경쟁을 벌이던 시기에도 핵무기의 존재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공포감을 안겨줬다. 1962년의 쿠바위기는 자칫 잘못하면 미·소간의 핵전쟁을 야기할 수 있는 심각한 사건이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러한 불안감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는 물론 ‘게임’도 포함된다. 오늘은 게임에서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어떻게 표현됐는지 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자.

▲ 1인칭 슈팅게임인 Call of Duty 4에서 표현된 핵전쟁의 참상

포스트 아포칼립스

핵전쟁을 소재로 한 게임들 중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 Apocalypse)’로 불리는 것들이 특히 유명하다. 말 그대로 핵전쟁 이후 사람들의 생활을 표현한 것들을 말한다. 물론 이러한 것들은 게임물뿐만 아니라 영화,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등에 모두 존재한다.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에는 특정한 ‘스타일’이 반복해서 나타나는데 그 특징을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핵전쟁으로 현대 문명이 붕괴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실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갖는 공포의 가장 큰 원인일 것이다. 군사적 피해도 피해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세계의 멸망, 이것이 현실화될 수 있다는 공포가 어떤 예술적 감각에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독일의 아동문학가인 구드룬 파우제방이 쓴 소설인 ‘핵전쟁 뒤의 최후의 아이들’은 핵전쟁 직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비참한 환경에 내몰리는 내용의 이야기다. 반면 PC용 롤플레잉 게임인 ‘폴아웃 시리즈’는 지구적 규모의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느 정도 자신들만의 문명을 재건한 상황을 소재로 한다.

▲ 폴아웃2의 한 장면. 핵전쟁 이후 절망적인 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핵전쟁 이후의 상황이 ‘무법천지’에 가깝다는 것이다. 문명의 붕괴로 공권력이 사라진 상황에서 한정된 자원을 쟁탈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려면 그야말로 무법천지의 세계를 그리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 ‘매드맥스 시리즈’는 문명이 붕괴한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아무런 법적 제재를 받지 않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상황에서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그린다. 만화 ‘북두의 권’은 여기에 동양 특유의 ‘무술고수 판타지’를 적용시켜 무법천지를 고류(古流)무술로 헤쳐 나가는 주인공의 끝나지 않는 투쟁기를 그리고 있다.

세 번째 특징은 그 와중에 등장하는 ‘아이러니’다. 모든 것이 절망인 상황 속에서도 인간의 생활이 유지된다면 거기에도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등이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끝에 있는 것은 오직 절망이기에 포스트 아포칼립스에서 갖는 인간의 감정이란 결국 아이러니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이 아이러니적 표현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앞서 잠시 언급했던 PC용 롤플레잉 게임인 ‘폴아웃 시리즈’일 것이다.

절망 속에서의 아이러니

폴아웃은 핵전쟁 이후 멸망한 미국에서 각자 다른 정치적·군사적 목표를 갖고 각개약진하는 세력들이 다툼을 벌이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새로운 민주국가 건설에 힘쓰고 있는 ‘뉴 캘리포니아 공화국(NCR)’, 문명이 남긴 ‘기술’을 보전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하는 군사조직 ‘강철의 형제단’, 과거 미국 정부의 후예로 세계의 재장악을 노리는 ‘엔클레이브’ 등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노력과는 별개로 이미 세계는 핵전쟁에 의해 생겨난 수많은 돌연변이 생물들로 매우 위험한 상태다.

그야말로 ‘절망’ 밖에 없는 세계지만 이 와중에도 끊임없는 아이러니가 표현된다. 멤버 전원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모든 것을 따라하고 있는 갱단의 등장이나 세계가 멸망한 상황에서 당신은 군인이니 군복을 입고 오라고 윽박지르는 ‘행보관’의 등장,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만 살아남은 작은 마을을 ‘데이브 공화국’이라 이름 짓고 대통령 행세를 하고 있는 데이브의 존재 등은 세계의 멸망 때문에 우울한 와중에도 쓴웃음을 짓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이러한 아이러니는 일본 게임인 콘솔용 롤플레잉 ‘메탈맥스’에도 등장한다. ‘데스크루즈’라는 지역은 출입이 극도로 통제돼 있는데 그 이유는 외부의 돌연변이 등으로부터 안전을 지키기 위함이며 내부는 유토피아 그 자체인 곳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들어가 보면 가구를 만들기 위해 강제노역을 시키는 거대한 수용소이다. 데스크루즈 측에 속아 강제노역을 하게 된 주인공 일행은 수많은 드럼통들을 우측으로 옮겼다 다시 좌측으로 옮기는 무의미한 노동을 직접 조작을 통해 수행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직장에서 겪게 되는 ‘쓸모없는 잡무 처리’에 대한 일종의 풍자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다.

▲ 일본의 대표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 롤플레잉 게임인 메탈맥스2.

이 외에도 메탈맥스에는 ‘백경’을 패러디해서 (에이해브가 아닌) 비해브 선장(그의 동생은 씨해브이다)을 등장시킨다던지, 버스가 방사능의 영향을 생물화 돼 ‘야생버스’가 된다던지 하는 블랙코미디들이 연속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사람은 살아가게 된다는 위안을 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포스트 아포칼립스’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려는 어떤 시도로 보이기도 한다.

클리셰들

메탈맥스를 말할 때 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전차’다. 게임 중에 획득한 전차로 더욱 강화된 적들을 상대하며, 이들과 더 잘 싸우기 위해 각종 부품을 이용해 전차를 개조하는 재미는 메탈맥스 시리즈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소는 영화 ‘매드맥스’에서 차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사실 ‘메탈맥스’라는 이름 자체가 매드맥스의 오마쥬이다. 메드맥스에서는 주인공 맥스가 강력하게 개조된 자동차를 타고 바이크 갱단을 혼내주는 등의 활약을 펼치는데, 다른 등장인물들도 아무렇게나 개조된 탈 것들을 이용하는 모습이 비춰진다. 메탈맥스의 전차 개조는 바로 이것을 반영한 요소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 수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의 디자인적 요소의 시초가 된 매드맥스. 주인공이 데리고 다니는 개 역시 이 요소의 하나다.

등장인물들의 복식이나 스타일 등의 요소도 매드맥스로부터 이어진 것이 많다. 이는 폴아웃 시리즈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모히칸 컷 등 펑크록커 스타일의 머리모양과 가죽, 체인 등으로 만들어진 조잡한 의상 등은 매드맥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의 것을 거의 그대로 가져오다시피 한 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만화 ‘북두의 권’에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북두의 권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헤어스타일이과 복장의 상당 부분은 매드맥스, 폴아웃의 그것과 꼭 닮았다. 이렇게 보면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스타일의 선조가 매드맥스 시리즈라는 해석을 붙이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폴아웃 시리즈의 전신이 되는 ‘웨이스트랜드’를 1988년 개발한 브라이언 파고는 최근 킥스타터를 통해 모금한 자금을 갖고 ‘웨이스트랜드2’를 제작하고 있다. 출시 예정일은 올해 말로 알려졌는데, 이 게임에서도 매드맥스로부터 이어진 ‘스타일’이 반복해서 차용될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매드맥스의 첫 번째 시리즈가 1979년 나왔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35년 동안이나 같은 ‘클리셰’가 반복되는 것으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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