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개봉 한 달이 넘었지만 <범죄도시 3>는 뒤늦게라도 말을 꺼내보고 싶은 영화다. 일차적으론 흥행 기록 때문이다. <범죄도시 3>는 3주 전 천만 관객의 테이프를 끊었다. 천만 영화가 사회현상이라는 건 2000년대가 낳은 미신이다. 2012년부터 2019년까지 매년 천만 영화가 탄생했고, 관람 시장 성장과 함께 정례화된 산업적 현상이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범죄도시>는 팬데믹 이후 3년 만에 천만 고지에 오른 처음이자 유일한 한국 영화고, 2편과 3편이 연달아 깃발을 꽂았다. 한국 영화 전체가 가뭄에 허덕이고 있지만 오직 <범죄도시>만이 장마철 장대비처럼 관객을 부른다. 더는 극장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관객들이 보러 가고 싶어 하는 무언가가 거기엔 있다. 이건 산업의 예외적 현상이며 사회적 현상이라고 해도 좋다.

영화 〈이웃사람〉 스틸 이미지
영화 〈이웃사람〉 스틸 이미지

관객은 <범죄도시>에서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 걸까? 당연히 주인공 마석도다. 근육과 살덩이가 뒤섞여 터질 듯이 부푼 장대한 체구로 범죄자를 때려잡는 형사 마석도의 무용담은 이 영화의 정체성이자 콘텐츠 자체다. 마석도는 특유의 우람한 몸집과 험악한 인상으로 유명한, 그러나 어딘가 묘하게 순박한 느낌이 스민 얼굴로 대체 불가능한 캐릭터를 구축한 배우 마동석이 없었다면 재현될 수 없었던 인물이다. <범죄도시>가 필름에 복사하는 건 마동석의 육체적 이미지이며 보다 구체적으로 참조하는 건 영화 <이웃사람>에서의 마동석의 모습이다. 10년 전 개봉한 <이웃사람>은 조폭 역을 맡은 마동석이 연쇄 살인마 김성균을 개 잡듯이 린치하는 일련의 장면으로 유명하다.

그 장면들은 잔혹한 폭력을 저지르는 위험인물이 더 큰 사적 폭력 앞에 여지없이 왜소해지는 기묘한 해방감을 제공했다. 액면 상으론 나쁜 놈이 더 나쁜 놈을 처단하는 자경단식 활극이지만, 마동석은 김성균이 살인마란 걸 몰랐기에 사실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이었다. 그는 정의로운 사명감으로 악인을 응징한 것이 아니다. 그저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은 '이웃 사람'을 두들겨 팼다. <범죄도시>는 이런 구도 위에서 마동석의 직업을 ‘경찰’로 바꿨다. 따라서 무자비한 완력으로 타인을 유린하는 폭력 전시가 도덕적 결격사유를 떼고 사회질서의 공익에 복무하게 됐다. 취조 대상의 귀때기를 짓뭉개는 반인권적 위법 수사가 “진실의 방으로!” 한 마디와 함께 천만 관객이 티 없이 폭소하는 국민적 오락물이 되는 것이다.

영화 〈범죄도시 3〉 스틸 이미지
영화 〈범죄도시 3〉 스틸 이미지

<범죄도시>는 세계관 최강자 마석도가 범죄자-빌런들을 패대기치는 한국형 히어로 무비다. 할리우드 히어로 무비는 미국 특유의 자경주의 전통 속에 초법적 무력을 가진 캐릭터가 공권력을 대행해 공동체를 지키는 이야기지만, 공권력의 지위가 배타적이고 치안 제도가 촘촘한 한국에선 이런 종류의 히어로를 상상하기 힘들다. 대신, 공권력을 수행하는 입장이지만 공권력에 걸린 규칙을 일탈하는 유형의 형사 캐릭터 계보가 존재한다. <공공의 적> 시리즈의 강철중은 마석도의 선배 격이다. 이들은 공권력의 안과 밖을 넘나들며 그 거추장스러운 제약을 패싱하거나 임의로 보충하는 일종의 유사 자경단이다. 비유하자면, 무법자와 결투를 벌이며 마을의 평화를 지키는 서부극 보안관의 한국적 번안이다.

마석도는 ‘범죄자의 인권’ 따위 짓뭉개고 단지 압도적인 완력으로 치안을 유지한다. 범죄자를 보면 말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고 “맞다가 죽을 것 같으면 벨 눌러”라고 사전 고지 의무를 대신한다. 그와 범죄자들의 관계는 사회적 신분으로 구분되는 걸 넘어, 하나의 힘이 더 큰 힘에 굴복하는 생물학적 서열관계다. 형법이나 경찰 신분증이 아니라 남성성이 초과잉 돼 살갗을 뚫고 나와 덩어리가 된 듯한 몸집의 위용이 마석도가 품은 권위인 것이다. 이렇듯 공권력을 초월한 공권력, 제도화된 권력이 아니라 원초적 폭력을 통해 정의를 집행하는 것이 이 영화가 분출하는 카타르시스의 정체다. 이것이 천만 관객을 두 번이나 부를 만큼 사회적 현상이 되었다면 거기엔 관객이 마석도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넘어 현실의 경찰에게서 보고 싶어 하는 것들, 공권력 집행에 느끼는 결핍이 담겨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영화 〈범죄도시 3〉 스틸 이미지
영화 〈범죄도시 3〉 스틸 이미지

사실, 이와 궤를 같이 하는 자경단 서사, 공적 해결방식의 틀을 넘나드는 징벌 방식은 오늘날 쉽게 관찰할 수 있는 풍속이다. <비질란테>, <촉법소년>처럼 사적 제재를 전시하는 웹툰이 흥행을 이어 가고, 인터넷 광장에선 공권력 집행과 사법 판결 수준이 과소하다는 불신이 만연하다.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갖가지 ‘빌런’이 공공의 적으로 지목되고 이들을 ‘참교육’하며 응징하는 문화, 한국형 자경주의가 등장했다. 사회 특유의 빽빽한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한 여론 재판과 조밀한 신고 제도를 통해 공권력을 보충하는 형식의 징벌 참여다. 교통 법규를 어기는 배달 오토바이를 추적하고 신고를 넣는 광경을 유튜브에서 중계하는 ‘딸배 헌터’ 같은 채널은 그 리얼 버라이어티적 사례랄까.

자경단은 공권력의 공백으로 요청되는 자치 권력이지만 한국은 치안망과 행정 제도가 포화 상태다. 그럼에도 더 강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경찰이 요구되며 공권력에 대한 관념이 과잉된 사회로 흐르고 있다. 언제부턴가 물리적 개입이 요청되는 현장에서 무력하다고 질타받는 여경은 그 반면교사로서 지목되는, 정확히 마석도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다. 이 모든 현상은 어떤 형태로든 내 삶이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들이 늘어났다는 증거일 수 있지만, 한국은 강력 범죄 발생률이 높지 않고 치안 수준이 양호한 나라 중 하나다. 몸부림치는 징벌에 대한 갈망은 삶의 물리적 안전을 떠나 삶의 총체적 전망이 불투명하다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감이 전치된 반동은 아닐까. 주먹질 몇 번 휘두르면 사건이 종결돼 있는, 마석도의 단순 명쾌하기 짝이 없는 정의 구현에는 공동체에 관한 더 복잡한 질문이 깔려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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