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강신규 칼럼] 

“세상에 슈퍼히어로가 당신 하나라고 생각하나요? 스타크 씨, 당신은 지금 막 더 큰 세상의 일부분이 된 겁니다. 아직 그걸 모르고 있을 뿐이죠.”

영화 <아이언맨>(2008)의 히든 컷에서 “내가 아이언맨”이라고 폭탄선언을 한 토니 스타크에게 국제 평화유지 첩보기구 국장인 닉 퓨리가 어둠 속에서 던졌던 말이다. 이는 마블스튜디오가 야심차게 구상해왔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관객에게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블스튜디오의 슈퍼히어로들이 <어벤져스>(2012)에 집결함으로써 닉 퓨리가 예고했던 ‘더 큰 세상’이 열리게 된다.

이전에도 서로 다른 시리즈의 주인공이 한 작품에 모였던 예는 영화 <에일리언 vs. 프레데터>, <13일의 금요일 11: 프레디 대 제이슨> 등 얼마든지 있었다. 영화뿐 아니라 소설가 모리스 르블랑은 <괴도 아르센 뤼팽> 시리즈에 코난 도일의 <명탐정 셜록 홈즈>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물론 논란을 의식했는지 셜록 홈즈(Sherlock Holmes) 대신 성과 이름의 앞 글자를 바꿔 헐록 숌즈(Herlock Sholmes)라고는 적었지만 말이다.

이렇듯 둘 이상의 서로 다른 작품들을 섞는 것을 ‘크로스오버(crossover)’라 한다. 세상에 수많은 매력적인 작품들이 존재하는 만큼 그것들을 한데 모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기 마련이고, 크로스오버는 그 생각들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영화 〈아이언맨〉, 〈어벤져스〉 포스터
영화 〈아이언맨〉, 〈어벤져스〉 포스터

만화에서 하나의 텍스트를 다른 텍스트들과의 연관 속에 배치시키는 사례 역시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일본의 만화가 집단 CLAMP는 <XXX홀릭>(2003~)에서 전작인 <카드캡터 사쿠라>, <도쿄 바빌론>, <마법기사 레이어스> 등의 세계관을 연결하고, <츠바사 크로니클>(2003~2009)에서는 언급한 전작들뿐 아니라 <성전>, <신 춘향전>, <이상한 나라의 미유키>, <쵸비츠>, <클램프 학원 탐정단> 등의 주인공들을 등장시킨다. 원래부터 CLAMP 작품들 간에는 군데군데 연결점이 존재했지만, 두 작품을 통해 CLAMP는 작품들의 세계관을 본격 통합한다. 두 작품은 당연히 당시까지 작품들을 망라하고, 이후 작품에도 영향을 줬다.

게임도 마찬가지다. AOS(Aeon of Strife) 장르의 게임 <히어로즈 오브 스톰>(2015~)에는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가 만든 게임의 주요 영웅들이 집결해 있다. <소년 점프> 45주년과 <V점프> 20주년을 기념해 2014년에 제작된 게임 <제이스타즈 빅토리 버서스>에는 인기 만화 <원피스>, <나루토>, <블리치>, <헌터×헌터>의 인기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크로스오버 게임이 존재했으니, 그 이름하야 <더 킹 오브 파이터즈(이하 ‘KOF’)>였다. SNK의 <KOF>는 1990년대 초의 대전 액션게임 <아랑전설>과 <용호의 권> 시리즈, 1980년대 출시된 슈팅게임 <이카리> 시리즈와 <사이코 솔저> 등의 인기 캐릭터가 모두 모인 1990년대 게임판 ‘어벤져스’였던 셈이다. <KOF>는 <스트리트 파이터> 시리즈와 <철권> 시리즈 사이를 이으며 1990년대 중후반 전자오락실 대전 액션게임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 중 하나였다. 1994년 아케이드판이 출시됐지만, 다양한 플랫폼(비디오 콘솔, PC, 모바일 등)으로 확장되며 30년이 다 된 지금까지도 속편들을 통해 시리즈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임이기도 하다. 만화, 소설, 드라마, 영화 등 매체 전환(media conversion)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이러한 크로스오버 작품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을 들 수 있다. 상호텍스트성은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문예이론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처음 사용한 말로, 하나의 텍스트가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고 해석됨을 나타낸다. 세상의 어떤 텍스트도 독립적이며 자기 완결적인 형태로 존재할 수 없다. 또 우리 중 어떤 사람도 다른 텍스트들을 떠올리지 않고서 하나의 텍스트를 해석하긴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상호텍스트성은 텍스트의 본성이며 텍스트가 의미를 지니기 위한 일종의 전제조건으로 작용한다.

[마이크로소프트 제공]
[마이크로소프트 제공]

상호텍스트성 개념은 비슷한 텍스트들을 나란히 비교할 때 특히 유용한데, 그 유사성과 차이점을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RPG(Role Playing Game)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를 FPS(First Person Shooting)인 <배틀 그라운드>와 비교하기보다는, 같은 RPG인 <리니지> 시리즈와 비교할 때 고유의 특성을 더 명확히 논의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한 텍스트의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살핌으로써 여러 텍스트를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예를 들어 마블스튜디오의 <토르>, <스파이더맨>, <블랙펜서> 등의 개별 시리즈를 다른 시리즈들과의 연관 속에서 살펴보면, 어벤져스 시리즈 전체를 더 입체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토르: 천둥의 신>, <토르: 다크 월드>, <토르: 라그나로크>, <토르: 러브 앤 썬더> 각각의 작품은 토르 시리즈 안에서, 그리고 토르 시리즈는 다른 어벤져스 시리즈들과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따라서 개별 작품을 하나의 텍스트로서가 아닌 다른 작품들과의 관계, 그리고 다른 시리즈들과의 관계 속에 존재하는 텍스트로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물론 어벤져스를 보고 이야기하기 위해 모든 작품들과 시리즈를 섭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작품과 시리즈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가 없어도 하나의 작품을 보고 이해하는 데에는 영향이 없다.

그럼에도 최대한 많은 작품과 시리즈를 접하는 것은 <어벤져스>라는 하나의 전체 시리즈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다. 여러 작품들에 대한 경험은 개별 작품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뿐 아니라 전체 세계관에 대한 이해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다시 말해, 개별 작품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텍스트이지만, 전체 시리즈를 중심으로 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유기적 텍스트가 된다고 볼 수 있다. 각 텍스트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어벤져스>의 상호텍스트성은 더 큰 의미를 갖게 된다. 하나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 다의적이지만, 상호텍스트적 관계가 존재함으로써 그 다의성은 훨씬 더 커진다. 개별 작품 차원은 물론, 서로 다른 텍스트들 사이에서 모든 텍스트는 ‘전 텍스트’와 ‘후 텍스트’의 상관관계를 맺으며 ‘텍스트의 소우주’를 만든다. 결국, 이 소우주에 자리잡은 모든 텍스트는 ‘간 텍스트(inter-text)’이고, 소우주는 ‘콘텍스트(context)’가 된다.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미지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서두에서 밝혔듯, 대중문화에서의 크로스오버는 이제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멀티 유니버스, 멀티 캐릭터를 대중문화 수용자들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즐겨왔다. 하지만 크로스오버가 하나의 미디어 비즈니스 전략이 된 오늘날, 상호텍스트적 대중문화물은 훨씬 더 전략적이고, 복잡다단해지고 있다. 이는 그것들에 대한 전문적인 비평이 갈수록 어려워짐을 의미한다.

많은 대중문화 텍스트가 한 편에 완성된 의미를 담는 대신 수많은 다른 텍스트들과의 관계를 통해 의미를 생성한다. 다시 말해 그것들은 이제 수십에서 수백 편에 달하는 다른 텍스트들을 기억하고 연결해야 재미를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상호텍스트인 셈이다. 그런 새로운 대중문화를 기존의 비평 기준으로 재단하려다가는 덕력 높은 팬들의 전문성 앞에 조리돌림 당하거나 무시되기 쉽다. 디테일이나 뒷이야기도 팬들이 더 잘 아는 경우가 많고, 텍스트에 대한 애정을 가진 팬들을 설득하기도 어려운 일이다. 기존 비평가들이 거대한 상호텍스트 앞에서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많은 텍스트들이 뒤엉켜 더 크고 새로운 우주를 만들어내고 있는 대중문화를 앞으로 어떻게 읽어내야 할지에 대한 새롭고도 다양한 고민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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