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선민 칼럼] 지난여름, 병과 생활고로 수원에서 세 모녀가 세상을 등졌다. 정치권과 언론의 문제의식은 왜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을 ‘신청’하지 않았을까였다. 수급자로 인정받기까지 수많은 장벽을 모르는 걸까. 수급자 ‘신청’이 수급자 '인정'처럼 얘기되고, 수급자로 '인정'받는 순간 생활고가 단숨에 해결되는 것처럼, '수급'을 둘러싼 가시 돋힌 시선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수급자라는 단어를 욕처럼 말해요. ‘멀쩡한 사람이 수급받네’, ‘부정이다’ 하는 시선들. 그런 이유도 있지 않았을까요. 저도 그랬거든요.” 한 시민의 말은 빈곤을 대하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방준호·장현은, 〈한국의 ‘빈곤 증명시험’…우리는 왜 기초수급 신청 못 했나〉, 한겨레, 2022.08.29.)

 

8월 26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원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수원 세모녀' 발인식에서 수원시 관계자들이 세 모녀의 위패를 옮기고 있다. [공동취재=연합뉴스]
8월 26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수원중앙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수원 세모녀' 발인식에서 수원시 관계자들이 세 모녀의 위패를 옮기고 있다. [공동취재=연합뉴스]

빈곤에 대한 부정적 시선은 곧잘 혐오 표현으로 나타난다. 2020년도 서울시 청년 인권의식 및 혐오표현 실태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혐오 표현은 이미 학벌, 특정 지역, 가난으로 확장되고, 관련 혐오 표현도 심각하다. 하지만 가난에 대한 혐오는 인종, 성별처럼 사회 이슈로 부각된 적이 없다. 자본주의에서 가난과 빈곤은 게으름, 무능함, 노력하지 않음을 의미하고, 경제적 능력이 없는 상태는 능력 위주 사회에서 철저히 비난과 배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로 인해 당사자마저 가난과 가난에 대한 혐오를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게 되고, 빈곤의 혐오는 그 심각함에 비해 덜 주목받고, '혐오 표현을 받을 만한' 행위가 되어버린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 사용되어 온 '거지'라는 표현은 가난에 대한 혐오의 단면을 드러낸다. 한때 주거 형태와 묶어서 일부에서만 사용되던 이 혐오 표현은, 최근 1-2년 사이 다른 사람들이 자산을 증식하는데 자산을 늘리지 못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벼락거지'라는 말을 통해 '대중화' 됐다(벼락거지는 "소득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음에도 부동산과 주식 등의 자산 가격이 급격히 올라 상대적으로 빈곤해진 사람"을 가리킨다. 네이버 박문각 시사상식 사전 참고). '벼락거지 탈출', "'벼락거지' 탄생시켰다, 文정부가 확 벌려놓은 인생 격차" 등 언론이 공식 언어로 채택해 사용했기 때문이다('하우스푸어', '카푸어'는 점잖은 말이었다).

벼락거지라는 표현은 타인의 자산 가치 상승으로 인한 내 자산 가치 하락이 단순 자산 가치 하락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존재로 규정하고 경험하게 만든다. 자산을 늘리지 못한, 정확히 늘어나지 않은, 아니 늘어나지 못한, 아니 늘어날 수 없는 자산(그들이 말하는 '똘똘한 한 채'는 이미 정해져 있는데)은 우리를 순식간에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승자독식의 투기 자본주의, 양극화된 경제 상황, 가진 자 위주의 경제 정책 같은 경제적 재난 상황의 피해의 대가는 자산 가치 하락도 모자라 조롱과 멸시로 돌아온다. 부동산과 주식 같은, 늘어날 그 무엇조차 없는 사람들은 그냥 거지일 뿐이고, 그들의 빈곤은 어쩔 수 없는 일,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다. 벼락거지는 자산 가치를 상승시켜야 하는 사회적 과업을 수행하지 못하면 어떤 존재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케이뱅크 광고 화면 갈무리
케이뱅크 광고 화면 갈무리

벼락거지라는 표현 한편에서 '우리 모두는 부자가 될 권리가 있다' 같은 말들이 떠돈다. 자산 가치를 불려야 정상 시민으로서 대우받을 수 있는 사회에서 부자가 될 권리가 있음에도 행사하지 못하는 시민은 더 무능한 존재가 될 뿐이다 .

이선민 시청자미디어재단 연구원칼럼은 사단법인 언론인권센터 '언론인권통신' 제 973호에 게재됐으며 동의를 구해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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