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조현옥 수필가] 지난달에 백두대간을 등반하는 학생들을 인솔하기 위해 소백산으로 예비답사를 했다. 7월 첫 주에 일정대로 인솔 교사와 학생 80여 명이 함께 갔으니 올여름에는 소백산을 두 번이나 다녀왔다. 6시간 힘겹게 산을 오르고 내려왔는데도 어느새 그 산의 능선에서 부드럽게 불던 바람과 바리톤 정도의 음높이로 흐르던 물소리가 그리워졌다. 

몇 년 전 처음 그 산을 찾았을 때는 겨울이었다. 겨울 끝자락에 살짝 녹은 얼음 사이로 흐르던 은빛 물이 ‘참 곱다’고 생각하며 산길을 올랐었다. 그리고 장맛비가 며칠 내린 뒤의 여름 소백은 바위도 잎도 물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윤기 나는 초록 잎은 충분한 그늘을 만들어주었고, 세찬 물소리와 높은 새소리는 내 발걸음의 메아리가 되어 등반길에 리듬을 만들어주었다. 

등산을 즐기지 않는 가족과 함께 소백산 자락에 부는 바람이라도 함께 맡고 싶어졌다. 그래서 숙소를 그쪽으로 정하고 가족 여행을 떠났다. 제천 분기점을 지나 영월 근처를 지나는데 ‘탄광촌 기념관 14㎞’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애초 일정을 정하지 않고 ‘쉼’을 위해 떠난 여행이라 시간에 구애될 것도 없고 가족 모두가 가보자고 하여 탄광문화촌이 1차 목적지가 되었다. 입구에서는 안내도와 탄광에서 쓰는 권양기(捲揚機)롤러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개망초 (사진=조현옥)
개망초 (사진=조현옥)

매표소로 가는 계단 옆에는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개망초는 번식력이 강해 우리나라 전역에 많이 피는 꽃 중의 하나이지만 그곳에 있는 개망초는 예사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북미가 원산지인 개망초는 구한말 철로의 침목을 놓기 위한 원목과 함께 우리나라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1935년에 개발되기 시작한 영월 탄광에도 석탄을 운반하기 위해 철로가 놓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곳에 핀 개망초의 역사도 탄광의 역사 못지않을 것이다. 탄광, 철로, 광부와 개망초는 어쩌면 갱도로 통하는 탄광의 광차(鑛車)와 인차(人車)처럼 필연적으로 연결된 역사적 고리라고 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구한말 들어온 망초(莽草)가 피어나던 시기, 일제의 국권 침탈도 심해졌다. 백성들은 점점 살기 어려워져지자 이 꽃이 나라를 망치는 꽃이라고 하며 원망을 쏟았고, 이 꽃의 이름도 망초(亡草)가 되었다.

하얀 혀꽃이 평평하게 퍼져 가운데 있는 노란 대롱꽃을 동그랗게 둘러싼 개망초는 망초보다 꽃모양이 또렷하고 예쁘지만 망초보다 조금 늦게 피어 ‘개’라는 원망의 관을 하나 더 쓰게 되었다. 개복숭아, 개살구 하면 원래의 것보다 작고 못한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개망초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데도 국권을 잃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의 원망을 이름으로까지 받은 것이다.

꽃이 무슨 죄가 있겠는가. 씨앗이 내려앉은 곳에 뿌리내리고 피었을 뿐이다. 원산지인 북미를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날아온 씨앗은 주어진 자리에 뿌리내리며 군락을 넓혀왔다. 영월 탄광촌에서 피어난 이 꽃들은 그냥 꽃으로만 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처럼 고향을 떠나 돈을 벌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온 광부와 그 가족들을 위로하며 뿌리내렸을 것이다. 아침마다 해를 등지고 탄을 캐러 굴속으로 향했을 광부들, 다시 밝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할 위험을 안고 시작하는 그들의 고단한 숨소리를 개망초는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보고 들었으리라.

개망초 (사진=조현옥)
개망초 (사진=조현옥)

일제 강점기의 탄광이나 철로에는 발전보다는 일제의 수탈이라는 아픈 얼굴이 있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갱도에서 우리나라 광부들이 캐낸 석탄의 많은 부분이 일본의 이익을 위해 쓰였을 것이니, 광부들도 곁에 있는 망초, 개망초 하며 원망하는 날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투정을 받아주는 어머니처럼 누이처럼 말없이 서 있는 그 꽃은 어느새 정겨움이 되고 추억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고향으로 향하는, 세상 밖으로 향하는 철로를 따라 피어난 이 꽃이 어느 날은 그들에게 희망이 되는 날도 있었으리라.

사람들이 원망하든 반가워하든 상관없이 망초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씨앗을 퍼뜨렸다. 먹을 것 귀하던 시절에 줄기는 구수한 나물로, 해독제로 이로움을 주며 세월 따라 사람들의 발걸음을 따라 여기저기 피어났고 길동무도 되었다. 

이렇게 원망에서 친구로 바뀌었기 때문인지 누군가 이 꽃의 꽃말을 ‘화해’라고 붙였다. 원망의 마음을 지우고 보니 그 꽃의 작고 하얀 얼굴에서 노란 미소가 보였을 것이다. 동그랗게 펼쳐진 흰자의 가운데에 반듯하게 자리잡은 노른자를 닮은 이 꽃을 어렸을 때는 계란꽃이라고 불렀다.

소백산을 오르며 이야기를 나누던 학생에게 그 길에 피어있던 개망초가 무엇을 닮은 것 같으냐 물었더니 2000년대에 태어난 그 아이도 계란을 닮았다고 했다. 개망초는 이렇게 친근한 계란을 닮은 꽃일 뿐인데 오랫동안 본모습을 가리는 이름으로 살았다.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우리나라 사람들의 안방을 훈훈하게 데워주던 영월 탄전은 1980년대 후반까지 그 역할을 다하고 지금은 탄광문화촌을 통해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다. 갱도의 전시관을 돌아보며 누구인지 모를 광부의 땀으로 지난날 내 삶이 따뜻했음에 감사하며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곳을 떠나 탄광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 단종이 유배되었을 때의 영월은 탄광촌이 생길 때보다 더욱 세상과 동떨어진 곳이었을 것이다. 

왕자로 태어나 왕까지 되었으나 십칠 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두려움과 서러움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을 단종. 시신마저 강에 버려진 것을 영월 호장 엄흥도가 찾아 장사를 지냈다. 중종 때가 되어서야 영월 군수 박충원에 의해 망주석, 장명등, 표석이 있는 묘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숙종 24년, 단종으로 추복되고 장릉(莊陵)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장릉에 가득 피어난 개망초 (사진=조현옥)
장릉에 가득 피어난 개망초 (사진=조현옥)

하지만 다른 왕릉처럼 터를 다지고 만든 것이 아니라 묘는 약간 높은 언덕 위에 있고 정자각이나 재실, 홍살문은 훨씬 아래쪽에 자리잡고 있다. 장릉 입구로 들어서면 다른 왕릉에는 없는 264명의 신하들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와 엄흥도의 정려비, 박충원의 낙촌기적비 등이 있다.

살아서는 왕의 권위가 없이 처참하고 외로운 죽음을 맞이했던 단종이 목숨을 걸고 자신에게 충직했던 신하들의 넋과 함께 있으니 다소 덜 쓸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릉으로 먼저 올라갔다가 비각 쪽으로 내려와 묘를 올려다보니 단종비각과 정자각 사이에 개망초가 가득했다. 경사면이라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햇빛을 고르게 받아 더욱 화사해 보였다. 단종의 삶을 생각하면 그 어떤 화려한 꽃보다 수수하고 단아한 이 꽃이 그 자리에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언제부터 그 꽃들이 거기에 있었을까. 구한말 철로변에서 사람들의 오고 가는 이야기를 듣던 개망초는 이제 우리나라 전역에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사람들과 살고 있다. 천연염료로도 쓰이며 건강과 환경을 지키는 개망초의 현대사를 기대하며 동네 천변에 가득 피어난 개망초 곁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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