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가장 논쟁적인 대목은 말할 것도 없이 베인의 존재다. 정확히 얘기하면, 베인의 진면목이 밝혀지는 반전의 순간이다. 고담시에 강림한 초유의 악마는 상처 입은 집짐승이었다. 라즈 알굴의 자식은 미란다 테이트였고, 베인은 그저 그녀를 바라보는 주변인이었을 뿐이다. 팽창된 이입과 기대감은 구멍이 나 쪼그라들었다. 베인은 호적이 공개되자마자 캣우먼에게 허무하게 처치당한다. 라즈 알굴의 자식, 탈리아 알굴 역시 급사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왜 이 역대 최강의 슈퍼 빌런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는가.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해 취향과 평가의 호불호가 갈린다면, 아마 이 반전의 비중이 결정적일게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런 지적은 넌센스에 가깝다. 왜냐하면, 베인이란 캐릭터 자체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맥거핀이란 뜻이다. 과연 놀란이 롤러코스터처럼 아우성치는 관객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하고 이런 실수를 했을까. 나는 희대의 유미주의적 악마 조커를 창조한 이 감독이 아무런 계산 없이 깜짝 이벤트를 준비했을 리 없다고 본다. 베인의 급락하는 체적은 놀란의 의도와 계산 하에 들어가 있다.

 

그렇다. 베인은 맥거핀이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한 발 더 내딛고 싶다. 베인 뿐만 아니라, 베인이 주동한 일단의 ‘혁명’ 자체가 거대한 속임수다. 무슨 말인지 알고 싶은가. 많은 이들이 영화에서 Occupy Wall Street의 잔상을 떠올린다. 흔히들 혁명군이 주식시장을 점거하는 장면에서 월가 시위대를 연상한다. 월가에서 벌어지는 최후의 전투에 이르러선, 놀란의 정치적 불온함을 의심하는 평자도 있다. 하지만, 베인과 어둠의 사도는 혁명 세력, 혹은 월가 시위대가 아닌, 자본주의 지배 집단 그 자체다. 정밀하게 볼륨을 조정해 발화해보자. 놀란은 러닝타임 내내 관객에게 영화적 트릭을 시도하고 있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다. 먼저 놀란의 어떤 전형적인 연출 스타일과 그의 전작들, 인터뷰를 통해 유추할 수 있는 정치적 함의, 그리고 베인 캐릭터의 설정과 대사, 월스트릿 교전을 포함한 영화의 주요 시퀀스 및 모티프, 마지막으로 문제의 반전이다.

 

놀란은 교묘한 영화적 트릭에 능한 감독이다. 그의 출세작 메멘토가 그랬고, 인셉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다크 나이트 라이즈> 역시 반전 속에 또 다른 반전을 압축시켜놓았다 해석할 틈새가 있다. 영화의 수면에 프로젝터가 쏘아내는 월가 점령의 반체제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는 너무나 일차원적이다. 사실관계와 동떨어져 있을뿐더러, 그의 전작들을 살펴보면 놀란이 그런 극단적인 정치적 메타포를 구사했다 의심할만한 혐의도 마땅치 않다. 오히려 <배트맨 비긴즈>와 <다크나이트>를 통해 알 수 있는 건, 그가 미국의 현 체제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인셉션>은 금융 위기에 대한 비판적 은유라 해석할 유인이 있는 영화다. 실제 그런 평들이 존재하고, 일리가 있는 얘기라고 본다. 나는 언젠가 놀란이 개봉 전 인터뷰에서 대략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다. “영화에 정치적인 의미를 담지는 않았다. 다만, 사람들이 지금 세상의 악은 무엇이고, 어떤 힘이 세상을 움직이는지 생각해봤으면 한다.” 크리스천 베일 역시 같은 인터뷰에서 이런 뉘앙스로 말했다. “배트맨 시리즈가 처음 탄생했을 때처럼,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희망을 얻었으면 한다.” 여러 정황들을 봤을 때 <다크나이트 라이즈>에서 표현된 월가 시위의 음영이 혁명 같은 근원적 혼란이나 악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베인의 대사를 보자. 영화는 혁명가 베인의 기표를 잠가놓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하려는 일이 중요하지.” 영화 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베인의 정체가 아닌 베인의 행동이다. 그는 전산을 이용해 금융시스템을 교란하고, 자본주의가 축적한 살상 무기로 공동체를 지배한다. 그리고 핵무기를 통해 세상에 멸망을 도래시키려 한다. 명백히 현재 자본주의 시스템의 누적된 모순과 폐해와 일치한다. 거기다 베인을 불러들인 것은 다름 아닌 악덕 자본가 대거트다. “너희가 빌려간 시간을 돌려받으러 왔다.”, “서양문명이 어떻게 되나 지켜봐라.” 결국 베인의 존재는 통제받지 않는 현재의 자본과 시스템이 불러올 모든 총체적 파국에 대한 경고다. 미국 내 최대 스포츠 산업인 미식축구 경기장이 붕괴하는 시퀀스에서 이 내포는 확연히 다가온다.

 

그렇기에 베인이 주식 시장을 습격한 것을 월가 시위와 연결 짓는 건 옳지 않다. 그것은 놀란이 장치한 트릭에 발을 걸려 헛디디는 짓이다. 베인이 주식시장을 점거해 실행하는 행동은 오히려 그 시스템에 장난질을 쳐 자본을 싹쓸이하는 것이다. 월가 시위가 아닌 월가의 패악과 정확히 오버랩되지 않는가? 형량이 추방과 사형뿐인 인민재판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재판은 결코 공정하지 않다. 이미 유죄는 정해져 있고, 권력을 쥔 자가 원하는 결론을 공표할 뿐이다. 나는 여기서 금융위기 이후에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대마불사의 신화가 물구나무 선 채 다가오는 것을 감지한다. 베인에 의해 해방된 고담시. 먹을 것을 두고 어른들이 꼬마아이를 린치하는 그곳엔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이면이 작열한다. 베인군이 고담을 점령한 이후 중앙정부와 베인의 행동은 본체와 그림자처럼 움직인다. 시민들이 다리를 건너오지 못하게 중앙군이 저지한다. 시민들에게 “당신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허언하던 정부의 방송은 “이 도시는 영원할 것이다”라는 베인의 거짓 선동과 닮아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고든의 대사와 월가 집단 전투 씬이다. 고든은 우리에게 확실히 얘기한다. “이게 지금 혁명이라고 생각하나?”. 월스트리트 전투 장면을 다시 한번 자세히 떠올려 보라. 월스트리트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가 생산한 무기로 무장한 베인의 군대다. 즉, 자본주의 현 체제의 지배 집단이다. 반면, 고담시의 경찰들은 아무런 무기도 들지 않은 채 월가를 점령(occupy wallstreet)하기 위해 맨몸으로 달려든다. 보라. 그렇다면 여기서 진정한 월가시위대는 누구일까. 이 극명한 위상반전. 오히려 놀란은 용기와 희생으로 무장한 채 달려드는 경찰들을 응원하며 월가 시위대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듯 보인다.

 

맥거핀은 아무 것도 아니다. 스코틀랜드에 사자가 없듯이 맥거핀 역시 존재하지 않는 무엇이다. 그 서사의 공백과 서스펜스의 단절은 관객을 영화와 일시적으로 이격시키며, 성찰을 환기한다. 악마의 군주처럼 공포스럽던 베인의 정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감독이 베인의 존재를 통해 지시하려한 진정한 흑막은 무엇일까. 여기에 생각이 미친다면, 이런 전복적인 해석에 동의할 수 있을지 모른다.

- 다음 편에 계속 -

 

필자>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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