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이정희] 엄정화 씨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지난 3월 2일 방영된 EBS 다큐프라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 2부 ‘애국가족’ 편은 감독으로서 엄정화 씨가 기록한 광복군 할아버지 오상근 씨과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이다.

올해로 99세가 된 오상근 씨. 함께 일본군을 탈출했던 동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고, 그가 일본군에 징집 당했을 때 홀로 아이를 키우던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그 역시 지난 2015년 많이 아팠다. 첫 증손이 태어났다.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아이가 자라면 할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할까? 손녀 엄정화 씨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5년의 시간이 흘러 독립운동가 오상근 씨의 이야기는 이제 오상근 씨과 그 가족의 이야기 <애국가족>이 되어 3·1절 특집으로 세상과 만나게 되었다.

광복군 오상근

EBS 다큐프라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 2부 ‘애국가족’ 편

“첫딸 군자를 낳고 징집 영장을 받았어”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작된다. 일본군으로 라오스 태국 전선에 투입되기 전날, 운명처럼 '삐라' 한 장을 만나게 되었다.

'임시정부로 오라'

가슴이 떨렸다. 늦은 밤 뜻을 같이한 동료들과 우물가에서 만나 도망을 쳤다. 달리고 달렸다. 대나무 숲을 가로질러. 대나뭇잎이 서걱거릴 때마다 일본군의 각반 소리처럼 들렸다. 금방이라도 일본군이 달려올 것 같았다.

겨우 도망쳤나 싶었는데 중국군에 붙잡혔다. 백번을 한국 사람이라고 해도 중국군은 일본군복을 입은 할아버지를 스파이로 몰았다. 生(생)과 死(사)라고 쓰인 종이, ‘차라리 죽여라’라는 마음으로 死(사)에 동그라미를 쳤다. 그러자 스파이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중경(충칭)으로 간 할아버지와 동료들을 김구 선생이 손을 잡아 반겼다. 광복군 경위대가 되어 김구 선생 공관을 지켰다.

광복절, 삼일절만 되면 정갈하게 차려입고 길을 나서는 오상근 씨. 어디 가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행사'라고 말하는 그의 말끝에 자부심이 담뿍 묻어있다. 99세가 되도록 그를 부르는 곳이면 그 어디를 마다하지 않고 요샛말로 '인싸'로 활동적으로 살아오셨다.

오상근 씨가 지키려 했던 나라와 자손들의 나라는 같은 나라일까

EBS 다큐프라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 2부 ‘애국가족’ 편

하지만 가장으로서 할아버지는 ‘다른 의미’에서 나라를 구하신 분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도 평생 숟가락 한번 스스로 가져다 드신 적이 없는 '가부장'적인 분이셨다.

슬하에 1남 3녀. 일편단심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서셨던 것을 자부심으로 삼아 평생을 살아오신 할아버지와 달리, 자손들의 삶과 생각은 제각각이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시대를 살아온 네 자녀들. 하지만 그들조차 각자 의견이 다르다. 찻잔을 앞에 두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3녀 오미자 씨와 4녀 오미정 씨. 하지만 서로의 입장에 있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다.

김구를 모셨던 광복군 출신이라 이승만 대통령 때는 인정 받지 못한 아버지를 봤던 오미자 씨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이다. 김구 선생 입장에서도 봐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종교적, 정치적 입장이 확고한 4녀 미정 씨는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호의적이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후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믿는 미정 씨에게 이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건국 대통령이다. 더구나 그가 기독교를 믿었다는 게 더욱 믿음직스럽다.

EBS 다큐프라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 2부 ‘애국가족’ 편

이렇게 자매 사이에서도 갈리는 의견은 세대를 달리하면 더욱 첨예해진다. 외삼촌 장환 씨는 싸움이 날 것 같아 아들이랑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고 한다. 한번 얘기를 나누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던 것. 말을 안 하면, ‘나도 몰라’ 그러면 존경받는다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3대들은 자신들의 생각이 확고하다. 세상이 계속 변화하는데 당연히 아버지 어머니 세대와 자신들의 의견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에게 부모 세대의 가치관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설사 부모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이야기하더라도 언젠가부터 알아서 '필터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일까. 언제부터인가 서로를 '방관'하게 되었다고 씁쓸하게 말한다. 과연 외할아버지가 애써 지키려 했던 나라와 자손들의 나라는 같은 나라일까?

큰딸 군자 씨의 둘째 아들 재익 씨는 현재 일본에 체류 중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간 재익 씨는 그곳에서 직장을 구하고 결혼도 하여 정착했다. 처음 일본에 갈 당시, 할아버지에게 말씀드리는 게 힘들었던 재익 씨. 그런 재익 씨에게 할아버지는 흔쾌히 편도행 티켓을 끊어주셨다. 그리고 비록 우리나라와 일본의 관계는 그렇지만, 발전한 나라니 배우고 오라며 재익 씨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셨다.

다시 독립운동을 할 수 있을까

EBS 다큐프라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 2부 ‘애국가족’ 편

같은 형제자매 사이에도, 세대 간에도 이렇게 의견이 나뉘는 가족들. 그렇다면 할아버지의 시절처럼 다시 '독립운동'을 하게 된다면 어떤 선택을 할까?

재익 씨에게 엄정화 감독이 질문을 던졌다. 한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면? 현재 일본에서 살고있는 재익 씨는 종종 스스로 그런 '망상'을 해보기도 했다고 웃음 짓는다. 만약 전쟁이 나면 일단 '이혼'을 하겠다는 재익 씨, 가족들이 아버지가 한국인이라 손가락질을 받기 때문이란다. 그리고 한국인인 자신은 한국으로 와서 싸우겠다고.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후손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4녀 미정 씨는 당연히 독립운동에 앞장서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나라가 있어야 교회도 있고 가족도 있는 것, 그것이 그녀의 소신이다.

미자 씨의 목소리는 낮지만 자신만의 소신이 확고하다. 미정 씨가 보기에 나 살기도 바쁜 사람들 중 한 사람이라는 미자 씨. 그녀에게 애국의 시대는 변했다. 지금의 애국은 아버지가 했던 애국이 아니라, 나한테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녀가 키우는 손주들이 어떤 재목이 될지 모르니 잘 키워주는 거, 그게 미자 씨의 애국이다.

EBS 다큐프라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 2부 ‘애국가족’ 편

5년이란 시간 동안 열정이 희미해져 거짓말쟁이가 되어버렸다고 자조하는 엄정화 감독이지만, 그녀의 카메라는 지난 5년간 오상근 씨를 담아왔다. 오상근 씨를 지켜본 카메라에는 지난 2017년 세상을 떠난 오상근 씨의 동지 유재창 씨의 생전 모습도 담긴다.

또한 21살에 일본군이 되어 전장에 징집된 청년이 광복군이 되었던 역경의 시간과, 그가 해방된 조국에서 뿌리를 내려 일군 한 가족의 이야기가 담긴다.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청년은 99세가 되었고, 그 자손들은 아롱이다롱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며 일가를 이루었다. 엄 감독은 그렇게 각자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나라가 바로 할아버지가 목숨 걸어 지키고 꿈꾸셨던 나라가 아닐까라며 긍정한다.

다큐의 엔딩, 엄 감독은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할아버지, 우리가 할아버지를 어떻게 기억하기를 원하세요? 이에 어떤 할아버지면 어떠냐고 하시지만, 그래도 “항상 나라를 사랑하는 할아버지”, 99세를 맞이한 광복군 오상근 씨의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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