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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특집 '후손' 평생의 자랑이자 무게, 후손들이 전하는 그날의 독립운동가들[미디어비평] 톺아보기
미디어평론가 이정희 | 승인 2021.03.04 19:15

[미디어스=이정희] 3월 1일과 2일 EBS 다큐프라임은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 2부작을 방영하였다. 그중 1부 <그날 이후> 편은 독립운동가들의 후손 9명이 전하는 독립운동 이야기와 그 이후의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9명의 사람들이 스튜디오에 들어왔다. 나이도 사회적 위치도 경험도 다른 이들은 모두 독립운동을 했던 이들의 '후손'이다.

후손들이 전하는 3·1 운동 

EBS 다큐프라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 1부 ‘그날 이후’ 편

송대관, 우리에게는 '쨍하고 해뜰 날'이라는 대중가요로 익숙한 가수이지만 전라북도 정읍에서 삼일절 전야제에 초대를 받는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다. 그의 할아버지는 3·1운동 당시 장터에서 독립선언서 수천만 장을 나눠주다 일본군에 잡혔다. 

3·1운동 당시 우리나라 인구는 1678만 명. 그중 200만의 사람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쓴 백암 박은식 선생의 기록이다. 잊혀질 뻔한 기록, 동포들이 흘린 피의 역사를 선생은 기록했다. 박은식 선생의 그 역저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는 이는 광복회장을 역임한 85세 손자 박유철이다. 

200만의 사람들이 나선 만세운동을 보고 암중모색하던 김구 선생이 만주행을 택했다. 증손자 김용만이 전하는 말이다. 1919년 10월 상해 임시정부에 김구 선생이 합류하고 11월 의열단이 결성되었다. 

무혈 운동이었던 3·1 운동은 일본군의 총칼에 짓밟혔다. 운동의 과정은 뜻있는 선각자들에게 '다른 방향'을 모색하도록 했다. 동포들이 무참히 희생되는 과정을 보며 젊은 지식인들은 분노했고 '유혈 투쟁'의 깃발을 들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열단. 김원봉은 2기 단장이었고, 그 이야기를 외조카 김태영이 전한다. 

의열단은 유혈 투쟁의 대상을 일본 고위급과 동양척식주식회사, 그리고 친일파로 정했다. 그들을 암살하여 세상에 자신들의 뜻을 알리고자 하였다.

EBS 다큐프라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 1부 ‘그날 이후’ 편

젊은 지식인들만이 아니었다. 백암 박은식 선생이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 '노인 연맹단'을 조직했을 당시가 이미 61세였다. 46세에서 70세 이하 노인들이 결집한 단체, 그중 한 명인 강우규 지사가 1919년 9월 사이토 총독이 탄 마차에 폭발물을 던졌다. 

한편 유림의 대표였던 심산 김창숙 선생의 이야기는 손녀 김주 씨의 육성으로 전해진다. 김창숙 선생은 3·1운동 당시 33인의 대표에 참여할 뻔했지만 위중한 어머님의 병환으로 인해 때를 놓쳤다. 이를 안타까워하던 김창숙 선생은 137명 유림의 뜻을 모아 파리 평화회의에 탄원서를 보내고자 하였다. 

'우리 한국은 비록 작은 나라지만 3천리 강토와 2천만 인구로써 4천년의 역사를 지닌 문명의 나라이다'로 시작된 탄원서는 '일본의 간섭은 배제되어야 하며 그 총칼에 맞서 맨주먹으로 싸울 것이다'라는 결의를 담았다. 이 탄원서를 무사히 전하기 위해 노끈을 만들어 짚신을 삼았던 선생은 물에 젖을까 짚신을 머리에 올리고 나루를 건넜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김주 여사는 전한다. 

파리 평화회의에서 우리 독립의 의지를 천명할 의지를 이루지 못한 선생은 독립자금을 모으는 데 앞장섰다. 당시 부자들에게 찾아가 총을 대고 독립자금을 당당하게 요구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추천을 받은 나석주 열사는 김창숙 선생을 만나 국내에 잠입했다. 식산은행에 폭탄을 투척했지만 불발에 그쳤다. 이미 거기서 실패를 예감한 나석주 열사는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동양척식회사로 가서 문앞의 일본 경부를 죽이고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리고 6연발의 총으로 일본군들을 쏘고 자결했다. 스스로 목숨을 거두며 나석주 열사가 한 단 한 마디는 '나는 나다'. 이를 이제 75세가 된 그의 유일한 외손자 김창수 옹이 전한다.

후손들의 고단한 삶 

EBS 다큐프라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 1부 ‘그날 이후’ 편

나라를 위해 자신들을 던진 선현들. 하지만 그런 그들의 선택이었기에 '제가(齊家)‘는 전혀 할 수 없었다. 돌보지 않은 제가의 무게는 고스란히 후손들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가 되었다. 

독립운동 후손들은 대부분 가난에 시달렸다. 송영근 씨 손자인 송대관 씨는 굶고 살았다고 회고한다. 그런데 자신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다 비슷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한다. 김원봉 선생의 손자는 보육원에 보내질 정도로 가난했다고 한다. 어린 그의 꿈은 배고프지 않는 나라로 가는 것, 20살 때 미국 행을 선택했다.

가난만큼 자손들을 힘들게 했던 선친에 대한 그리움이었다. 김구 선생의 차남 김신 씨는 아버지가 보고 싶어 아버지가 보낸 편지의 우표를 뜯어 그 우표에 묻었을 아버지의 침 냄새를 맡으며 그리움을 달랬다고 증손자 김용만 씨는 목이 메어 전한다. 

가난하고 그리움에 사무쳤던 시간이었지만, 그럼에도 후손들은 자신들이 독립운동을 했던 선열들의 후손임에 자부심을 가진다고 입을 모은다. 매년 3·1운동 전야제에 초대를 받는 송대관 씨는 세상이 자기로 하여금 대단한 집안의 후손임을 일깨워주었다고 전한다.

EBS 다큐프라임 3‧1절 특집 다큐멘터리 <후손> 1부 ‘그날 이후’ 편

김용만 씨는 집안에서 말썽을 피우면 들어가 백범일지를 읽는 것이 ‘벌’이었다고 추억한다. 어린 맘에 백범일지가 두꺼워 원망스러웠던 적도 있었다고. 하지만 그 두꺼운 백범일지의 내용이 평생의 자랑이자, 평생의 무게라고 말한다. 

후손들은 잊지 않으려 애쓰고, 선현에 대해 말할 기회가 있으면 아무리 멀어도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은다. 직계 자손들은 이제 모두 그들의 선친보다 나이가 들어가는 상황, 김창숙 선생의 딸 김주 여사는 자신의 기억이 흐트러지기 전에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남기고자 매일 기록한다. 

전하고 싶어도 전할 수 없었던 시간도 있었다. 이관술 선생은 동덕여고 선생님으로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영향을 받아 꺼져가던 항일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가로 문민정부가 될 때까지는 그 이름조차 내놓고 말할 수 없었다. 비로소 빛을 보기 시작한 우리 독립운동사의 그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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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평론가 이정희  5252-jh@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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