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지난주와 이번 주 인터넷 세상에선 이상한 줄다리기 청백전이 벌어졌다.

상황의 발단을 보자. 인공지능으로 운영되는 ‘이루다’라는 챗봇 서비스가 있다. 론칭 후 이용자 유치에 성공하고 화제가 된 모양인데, 일군의 남성 유저들이 스무 살 여성으로 설정된 챗봇 이루다에게 성희롱을 가하고 인터넷 게시판에 ‘인증 숏’을 올렸다. 그 밖에도 이루다는 동성애 혐오를 전시하는 채팅 메시지를 송출하는 등 제작 상의 시민윤리 부재가 비판받기도 했다. 이런 정황이 기사화되고 논란이 된 것이다.

곧이어 또 다른 종류의 ‘성희롱’이 고발되었다. 주로 아이돌 팬덤 사이에 퍼진 ‘알페스’라는 문화다. 나름의 어원과 정의를 품고 있는 용어이지만, 이 생소해 보이는 말을 용례대로 풀면 익숙한 뜻이다. 아이돌을 포함한 유명인을 대상으로 하는 19금 동성연애 팬픽이다. 이것이 여성 팬들이 보이그룹을 대상으로 자행하는 ‘성범죄’라고 공론화된 것이다.

'혐오문화' 그대로 배운 AI 이루다…"서비스 잠시 중단" (JTBC 뉴스룸 보도화면 갈무리)

왜 이걸 줄다리기와 청백전이라고 표현했는가. ‘알페스’를 공론화하는 이들이 젊은 남성들이며 그들의 근거지인 남초 커뮤니티에서 전략적으로 화력을 모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루다 성희롱 채팅 기사화에 불만을 품고 반격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들이 ‘알페스’를 공론화하는 움직임의 기저 감정을 읽어 보면 분노와 조소, 어떤 종류의 열정 그리고 카타르시스가 엿보인다.

그들 주장의 표면은 1) 왜 실존 인물도 아닌 AI 챗봇을 상대로 뱉은 발언, 그래서 피해자가 없는 행위가 ‘성희롱’이란 말인가 2) 언론들은 이루다 사건은 앞다투어 보도했으면서 왜 ‘알페스’ 공론화엔 무관심한가 3) 그러므로 우리가 ‘좌표’를 찍고 언론에 기사화를 요구하며 공론화를 자급자족하자, 정도다.

이런 흐름을 타고 청와대 국민 청원에 ‘알페스’ 처벌 청원이 올라가 서명인 수만 명이 넘었다.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기사화 현황을 공유하며 서로를 독려하고 ‘트위터 페미니스트’들의 반응을 공유하며 우리의 작업이 유효타를 먹이고 있다고 환호한다. 그러니까, 실존 인물을 소재로 쓴 창작물에 담긴 성희롱 자체는 부차적인 것이며 주된 목적의식이 따로 있는 셈이다. 남성들이 챗봇을 통해 성희롱 문화를 생산한다고 성폭력 이슈가 선점당하자 반대 사례를 끌고 와 이슈화의 명분을 뺏고 효력을 무효로 만드는 것이다. 일련의 움직임을 관통하는 건 페미니스트들에 대한 남성들의 경쟁의식이자 진영 논리다. 저들이 ‘알페스’ 공론화를 독려하는 데 몰두하는데도 그동안 여성들의 화력 모으기와 실행력에 패배해왔다는 무언의 공감대가 동기로서 작용하는 것 같다.

아이돌을 대상으로 한 팬픽 창작은 H.O.T, 신화 같은 초창기 아이돌 시절까지 거슬러 간다. 요즘의 19금 팬픽은 산업 발전, 팬덤문화 고도화와 함께 양이 더 방대해졌지만, 그래서 초창기 팬픽 문화에 비하면 문제의식도 함께 형성된 상태다. 아이돌 팬덤 내부에서도 이 문화에 비판적 거리감을 갖고 있는 소비자들이 있으며, 최소한 이 문화가 양지로 올라와서는 안 된다는 수준의 공감대는 형성돼 있다. 팬픽의 소재가 되는 아이돌 당사자에게 검색 등을 통해 팬픽이 노출될 가능성을 예방하자는 취지도 있을 것이다. ‘알페스’가 범죄 행위란 걸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처벌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약 밀매처럼 유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그런 상황과는 결이 좀 다르다. 팬픽 창작자가 형사 고발당하는 사례가 많지 않고, 소송의 당사자가 되는 기획사 측에서 사실상 방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팬픽은 팬덤 산업에 번성한 2차 창작의 하나로서 팬덤을 코어화 해주는 효과가 있다. 아이돌 멤버들이 2차 창작에 착안점을 주는 동성 간 케미스트리를 연출하는 일도 흔하다. 기획사들이 매니지먼트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악플러를 고소하는 것은 일상이 되었음에도 팬픽 창작을 고소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사실의 배경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

이건 실존인 대상 19금 팬픽을 문제 삼을 것 없다는 말이 전혀 아니다. 아이돌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는 문화는 케이팝 산업에 구조화되어 있다. ‘알페스’ 역시 팬덤 문화의 지층 깊숙이 박힌 뇌관 중 하나다. 액면 그대로 보았을 때 법적 처벌도 가능한 사안이 맞으며, 아이돌 개인에 대한 성적 모욕이 맞다. 설령 기획사들이 문제 삼지 않는다 해도 사회규범 차원에서 비판 시 할 수 있는 쟁점이다. 예컨대, 자신이 응원하는 아이돌이 동성애 같은 소수자 의제에 발언하거나 연대하는 상황은 기피하면서 동성애 코드를 성적으로 소비하는 태도와 같은 더 세밀한 쟁점이 파생된다. 어떤 의미에서든 팬덤 문화 내부의 성찰과 자정이 필수적이다.

문제는 쟁점이 공론화되는 양상이다. 문제 제기자들은 ‘알페스’가 성폭력 범죄 행위라고 힘주어 말한다. 하지만, 현재 이 사안은 성적 폭력이란 의제 안 편에서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 19금 팬픽은 아이돌 산업 내부에 구조화된 성적 대상화 관습, 팬덤과 아이돌 사이의 다각적 권력관계, 산업 당사자들의 이해관계가 부산하는 현실이다. 성폭력이란 의제에 대한 문제의식과 사안의 특수한 배경에 대한 탐색이 비판과 함께 가야 하지만, 상대 진영을 핀포인트 타격할 수 있는 무기로서 저 배경과 구조에서 도려내어진 채 도구화되고 있다.

당연하게도 이런 식의 접근으론 19금 팬픽 문화를 제대로 진단할 수 없다. ‘알페스’라는 단말마만 메아리치고, 그것을 낳은 케이팝 신의 성적대상화 관습은 뭉텅이로 새어 나가 버린다. ‘알페스’ 처벌을 요구하는 남초 커뮤니티에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성 아이돌 신체 부위를 천박하게 표현하며 품평하는 글이 베스트 게시판에 올라간다. 의제를 도구화하며 생각 없이 휘두르는 데서 벌어지는 자가당착이다. 게다가 아이돌 팬덤 사회 내부에는 ‘알페스’보다 더 직접적인 방식의 성희롱도 많다. 팬 사인회 같은 대면 이벤트에서 여성 아이돌을 하대하고 ‘손깍지’를 끼며 스킨십을 즐기는 관행, 브이 라이브 같은 실시간 방송 채팅창에서 언어적 성희롱을 던지는 행태가 그렇다. 저 모든 관행은 이렇다 할 문제의식도 없이 ‘양지’에서 정상화된 채 벌어지고 있다. 인격이 없는 채팅 봇보다 실존인을 대상으로 하는 성적 모욕이 문제라는 기준에 동의하는 점이 있다. 그 기준에서 저 행위들은 면대면으로 가해지고, 온라인 검색을 통해 대량으로 노출되기에 ‘알페스’ 이상으로 문제일 수 있다.

한국 사회 논쟁은 언젠가부터 늘 이런 식이다. 쟁점에 대한 지식과 관점, 논거는 공유되지 않는다. 사안의 맥락과 구조는 외면한 채 상대 진영의 언행불일치, 말 바꾸기 같은 단편적 사실만 집요하게 파고든다. 피장파장의 오류를 주고받으며, ‘내로남불’을 꼬집는 흑백논리 하나로 말초적 양상의 논쟁이 진행되는 것이다. ‘내로남불’이 유일한 논쟁 준거인 세계관 속에서 상대방의 윤리적 흠결을 비판하는 언어가 난무하지만, 우리의 흠결을 너희의 흠결로 희석하기 위한 비판일 뿐이다. 그럴수록 피아의 윤리적 기준은 동반 하락하고 그것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정당화된다. 누가 더 상대의 주장을 비웃기 좋은 모양으로 일그러트리는지, 누가 더 ‘좌표’를 잘 찍고 청원 인원을 많이 모으는지, 이것 외에 논쟁을 결론 낼 방법은 사라졌다. 늘 같은 주제에 같은 구도의 논란이 그때그때 소재만 바뀌어서 끝없이 돌아오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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