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지난 13일 ‘진영 논리의 도구가 된 알페스 논란’이란 글을 썼다. 당시 보이그룹 멤버들을 동성애적 관계로 소비하는 19금 팬픽 문화가 ‘알페스’란 이름으로 청와대 국민 청원에 오르며 논란이 됐었다. 지난 글에선 이 움직임이 그 직전 불거진 채팅 봇 이루다와 관련된 남초 커뮤니티 성희롱 논란을 희석하려는 진영 논리라고 지적했었다. 그리고 ‘단편적 사실관계로 상대 진영의 윤리적 흠결을 상호 폭로하는 데만 몰두하는 와중, 사안에 결부된 쟁점은 제대로 논의되지 않는다’는 취지로 결론을 맺었다. 그렇다면 이 논란에서 무엇이 제대로 이야기되어야 할 쟁점일까. 어떤 화두만 던지고 끝내기보다 직접 설명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다시 글을 쓴다.

‘알페스’ 논란이 진행되는 와중, 논란의 무익함을 지적하는 평자들은 청원을 제기한 남성들에게 몇 가지 논리로 반론했었다. 팬픽은 실재가 아닌 창작의 일환이며, 팬덤과 아이돌 사이엔 성폭력이 형성될 권력관계가 없고, ‘N번방’ 사건과 같은 성 착취 사건으로 보는 건 사안의 경중을 가리지 않는 프레임 씌우기라는 주장이다. 피해자의 심신에 직접 성착취를 가한 영상이 대거 공유된 성범죄 사건과 19금 팬픽 문화를 등치 하는 건 말할 필요 없이 억지다. 이런 비교는 성폭력을 비판하는 취지로 논란을 제기하면서 현실에서 일어난 성폭력 사건의 무게감을 선택적으로 축소하는 논리적, 윤리적 모순이다.

다만, 그와 별개로 19금 동성 팬픽 문화는 비판적으로 들여다볼 의미가 있다. 오늘날 케이팝은 해외 진출, 국위 선양의 산업처럼 칭송받는다. 하지만 아이돌을 향한 팬덤의 유사 연애 감정, 성적 대상화의 일상화를 빼고는 산업이 지속되는 바탕을 말하기 힘들다. 이건 여러 층위의 수위에 걸쳐 구조화된 문화다. 19금 팬픽은 그중 가장 선정적인 2차 창작물이다. 보이그룹 팬덤 문화로 시작되었고 여전히 그 내부에서 유통 비중이 크지만, 걸그룹 팬덤 산업 역시 고도화된 현재에는 걸그룹 팬덤 내부에서도 유통되고 있다.

아이돌 성적 대상화 '알페스' 논란...성범죄? 팬덤? (YTN 뉴스 보도화면 갈무리)

저 팬픽 문화의 윤리적 성격은 단순히 창작의 일환이라 정의할 수 없다. 실존 인물을 외설의 소재로 가공하고 유통하는 건 법을 떠나 윤리적으로 문제다. 알다시피, 허구는 허구로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소비되는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창작에도 윤리적 원칙이 필요하다. 19금 동성 팬픽은 기획사나 아이돌 멤버에게 실질적 폭력으로 작용하기보다, 팬덤을 모으고 두텁게 만드는 데 이득을 주는 장치로서 용인돼 왔다. 설령 그렇다 해도 당사자에게 '돈'이 되는 성적 대상화는 문제가 없느냐는 논점이 나온다.

아이돌들은 팬들의 상상의 소재가 되는 동성 간 케미스트리를 '자발적으로' 연출해 전시한다. 아주 일상적인 광경이다. 하지만 만약 감정 노동과 '창작'을 통한 성적 대상화를 겪지 않고도 똑같은 수준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대다수가 겪지 않는 쪽을 택할 것이다. 이런 게 바로 '구조'의 압력이다. '알페스'를 규탄하는 남성들이 평소 비웃음에 부치며 외면하던, 성적 대상화와 성범죄의 토양이 되는 ‘사회 구조'와 같은 그것이란 말이다.

보이그룹 신의 권력관계는 복잡 미묘한 점이 있다. 사회엔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을 대상화하는 관습이 보편적이다. 케이팝 보이그룹 신은 주로 여성 팬덤이 남성 아이돌의 매력을 소비하는 장소이기에 사회적 성별 대상화 관습이 일부 역전된다. 하지만 그건 젠더 권력이 아니라 소비자 권력에서 오는 역전이다. 보이그룹 신 내부에서도 보편적 젠더 권력관계는 작용한다. 그것이 소비자 권력과 교차하고 경합하고 때론 충돌하는데, 남성 중심적 젠더 권력이 여성 팬덤이 쥔 소비자 권력에 우세한 상황도 일어난다. 같은 팬이라고 해도 남성 걸그룹 팬과 여성 보이그룹 팬이 아이돌과 맺는 관계는 결이 다르다.

단적인 예를 들면, 어떤 보이그룹 멤버들은 SNS와 팬 사인회에서 팬을 하대하다가 뉴스가 된 적이 있다. 보이그룹 신에서도 자주 일어나는 일은 아니겠지만, 걸그룹 팬 사인회에서 이런 일을 보기란 굉장히 힘들다. 반대로 남성 팬들은 여성 아이돌을 하대하고 그 정도가 심해서 논란이 되는 경우가 잦다. 보이그룹 신이란 폐쇄계 내부엔 보편적 성별 권력관계를 단순히 연장할 수도 없고, 단순히 그것이 역전돼 있다 판단할 수도 없는 불투명성이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 생태계 내부의 권력관계를 일률적으로 규정짓기보다 사안에 따라 맥락을 짚어 판단하는 구체성이 필요하다.

연합뉴스 [이래도 되나요]

사실 '알페스' 논란에서 좀 더 또렷한 젠더, 섹슈얼리티 코드와 권력관계는 동성애 코드다. '여성' 팬덤이 '남성' 아이돌을 성적으로 소비한 창작물이지만 그들에게 동성애자 정체성을 부여해 소비한 것이니까. 팬덤이 대상화한 건 근본적으로 동성애라는 사회적 정체성이다. 그럼에도 이번 논란에서 동성애 대상화에 대한 지적은 허탈하리 만큼 거론되지 않았다.

오래전부터 가요계에서 혼성 그룹은 씨가 말랐고 동성 그룹이 순혈에 이르는 계보를 대물림하고 있다. ‘알페스’란 창작 문화가 그 자체로 경고하는 점은 케이팝 신에서 동성애가 그 정체성은 은폐된 채 섹슈얼리티만 발라진 채 소비되고 있는 사실이다. 19금 팬픽을 떠나 동성 멤버 사이 성적 기운이 스민 케미스트리를 소비하는 문화가 얼마나 일상적인지, 그리고 케이팝 산업이 온전한 팬덤 지향적 산업으로 재편되며 저런 문화가 더 짙어지고 있음을 떠올리면 중대한 논제다. 그러면서도 성소수자 의제 등의 민감한 주제와 얽히는 것은 회사와 팬덤 양면에서 조직적으로 기피되며 케이팝 신에서 성소수자의 정체성은 축출된다. 근래 케이팝의 브랜드가치를 상승시켜 준 북미 시장에서 케이팝이 사회적 소수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떠올리면 착잡한 아이러니다.

청와대 청원을 제기한 남성들은 '알페스'를 여성들이 자신들과 같은 이성애자 남성을 대상화한 '성폭력'으로 규정하며 규탄한다. 하지만 케이팝 신 바깥의 사회에는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 폭력을 가하는 구조나 문화가 존재하지 않고, 예외에 머무는 사례들만 단편적 뉴스로 떠돈다. ‘알페스’가 팬픽에 등장하는 보이그룹 멤버 개개인에게 모욕이 될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더라도, 그걸 넘어 남성이란 집단에 대한 성적 대상화일까? 오히려 이 사안에서 보다 뿌리 깊게 대상화된 정체성, 케이팝 신 내외부를 아우르며 이성애자란 보편자들에 대해 대상화되고 있는 동성애는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 청원을 제기한 남성들은 동성애 대상화란 쟁점을 지각할 의식조차 못한 상태로 보인다. ‘한국 이성애자 남성’이란 자신들의 정체성을 논점에 대한 당사자 자리에 대신 앉힌 것이다.

‘알페스’는 케이팝 신에 구조화된 동성애 대상화를 농도 깊게 담고 있는 논점이다. 이 은밀한 팬 문화가 기왕 수면 위로 떠올라 사회적 화제가 되었음에도 들여다볼 지점은 당연하다는 듯 은폐되었다. 앞선 글에서 “늘 같은 주제에 같은 구도의 논란이 그때그때 소재만 바뀌어서 끝없이 돌아”온다고 표현한 의제의 공회전은 정확히 이런 상황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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