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0일)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합의한 ‘정부조직개편안’은 힘으로 밀어붙인 독선의 결과다. 방송통신위원회 설립에 관한 한 특히 그렇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를 한참이나 후퇴시키고 있는 합의서 일곱 번째 항은 전면 재검토되어야 한다.

방송은 우리사회 열린 공론장이다. 미디어는 민주주의의 근간을 형성하는 중요한 도구로 자리 잡았다. 이를 반영해 우리사회는 지난 2000년 방송위원회를 대통령 통제에서 벗어난 독립기구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은 이번 ‘정부조직개편 합의’에서 이를 깡그리 무시했다. 민주화 운동과 사회적인 합의를 일거에 팽개친 폭거다.

양당 원내대표 간 합의사항 가운데 방송통신위원회에 관한 부분은 방송통신 융합이라는 미디어 구조 변동을 기회삼아 방송을 대통령 휘하로 예속시키려는 속셈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래서 다른 항목과 다르게 제7항은 유독 세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무소속 합의제 기구인 방송위원회를 대통령 직속으로 끌어들이고, 위원들이 모여 뽑아야 할 위원장을 대통령이 지명하도록 바꾸었다. 모양새는 ‘합의제’ 형태의 ‘방통위원회’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달고 있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행정부의 일개부처와 다를 게 없다. 통합민주당은 이번 합의 과정에서 한나라당의 저의를 읽지 못하고 꼼짝없이 말려드는 한심함을 드러냈다.

방송통신위원회 설립의 핵심쟁점을 결론짓는 절차 역시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다. 방송통신 융합논의는 지난해 3월부터 국회 방송통신융합특별위원회에서 논의를 진행해왔다. 특위는 운영시한을 올해 3월까지로 연장하고, 여야 간 논의를 한창 이어가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 설립 건은 특위의 중요한 안건 중의 하나다. 이런 사안을 원내대표들은 무슨 자격으로 한순간에 결론지어 버리는가?

방송의 독립성은 우리사회 공공의 이익과, 민주주의 발전과 직결되는 사안이다. 제아무리 무소불위의 권한을 가진 정당대표라 할지라도 일거에 정치적으로 타협해서 처리할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여야 원내대표 간 방송통신위원회 위상, 위원 구성, 위원장 임명방식에 대한 이번 합의는 원천 무효다. 국회 방송통신특별위원회 논의를 거쳐 정상적인 절차대로 다시 진행해야 한다.

방송통신융합은 기술발달에 힘입어 방송이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당연히 방송의 공익성과 독립성이 논의의 근간이어야 한다. 그러나 국회 방송통신특별위원회에 올라온 2개의 ‘방송통신위원회 설립법안’은 너무나 방송의 공익성이나 독립성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가 제출한 법안이나, 한나라당 법안이나 하나같이 내용면에서 위원회의 직무독립성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 마땅히 업무소관사항 모두를 방송통신위원회가 처리할 수 있어야 함에도, 두 법은 위원회가 심의 의결할 수 있는 사항을 일정한 부분으로 한정하고 있다. 나머지는 위원장이 일반 정부부처의 장관처럼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위원 개개인이 평등한 권한과 자격을 가져야 할 위원회 설립 취지를 크게 훼손하는 부분이기 때문에 이는 당연히 삭제되어야 한다.

합의제 위원회의 소관업무 중 상당부분을 국무총리의 행정감독권 아래 두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사항이다. 위원의 직무상 독립성과 방송의 자율성을 보장하기 위해 ‘합의제’ 위원회를 설립한다고 밝히면서, 업무는 국무총리 통제 아래 처리하라는 경우는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발상인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명백한 독소조항이다. 이외에도 법안의 다수 조항들이 위원회의 설립취지를 무력화하고 있다. 법 제정과정에서 반드시 삭제되거나 수정되어야 한다.

그동안 방송의 공공성과 수용자 중심의 미디어 정책을 주장해온 우리는 이번 정부조직개편안 합의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방송통신위원회 설립은 시민사회단체와 언론종사자 등 관련 이해단체 및 미디어 수용자의 의견을 충분히 수렴한 이후에 진행해도 늦지 않다. 아무리 급해도 실을 바늘허리에 묶을 수는 없다. 통합민주당과 한나라당은 민주화 투쟁의 역사를 거울삼아 방송통신위원회 설립 논의를 진지하게 다시 시작하라. 그렇지 않고, 이번 ‘졸속 합의’를 밀어붙인다면 민주화의 역사를 거꾸로 돌린 오명을 벗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2008년 2월 21일

언론개혁시민연대 / 민주노동당 천영세 의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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