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아주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나름 인기 높았던 드라마가 끝난 후에 난데없이 배우와 작가의 설전이 벌어진 것이다. 작가가 명예훼손이라고 으름장을 놓자 배우는 영혼을 훼손당했다고 맞받아치는 등 서로 물러서지 않을 것처럼 팽팽히 맞서다 결국 배우의 사과로 일단락되었다. 그 논쟁의 저변에 깔린 것이 열악한 드마라 제작 상황이라는 점은 다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논쟁은 드라마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긴 싸인 막방의 방송 사고를 다시 떠올리게 했다.

이런 상황에 더 이상은 두고 볼 수 없었는지 대배우 이순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노배우들이 대부분 이슈에 대해서 언급하기를 저어하는 편이라 이번 이순재의 발언은 아주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문제는 이미 곪을 대로 곪은 드라마 제작 환경이 이런 노배우의 충정을 얼마나 가슴 깊이 받아드릴 것이냐에 달려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떤 개선책은 기대하기 어려워 안타깝기만 하다.

싸인 막방의 컬러바 방송사고도 그렇거니와 방송 막바지로 갈수록 완성도가 떨어지는 용두사미 결말은 한국 드라마의 특징처럼 굳어졌다. 이순재의 말을 통해 그 세태를 들여다보자.

"요즘은 대부분의 드라마 대본을 당일에 받아서 촬영하게 된다. 대본을 검토할 시간이 워낙 없으니, 고치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내 연기를 어떻게 무사히 할까만을 생각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그러다 보니 젊은 배우들의 연기가 시원찮게 보여도 지적해줄 시간조차 없다고. "아이들이 잘 못해서 가르쳐주고 싶어도 그럴 시간이 없어요. 또 가르쳐준다 해도 그게 작품에 반영되는 것도 아니고. 평생 연기를 해온 늙은 배우나 갑자기 현장에 투입된 신인이나 조건이 같으니, 작품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배우가 아나운서도 아니고 당일 대본을 받아서 분석하고, 연습하고 연기하라는 것이니 이는 배우란 직업을 경시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 됐건 이런 환경에서 배우가 자기 맡은 대사와 연기를 충분히 소화해내기에는 절대 무리인 상황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또한 이런 촉박한 제작 환경으로 인해 후배가 선배에게 배우고 그로써 자연스럽게 유대가 쌓이게 되는 일이 차단되는 것도 큰 문제다.

제작현장에서 선배들의 연기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후배는 많은 것을 보고 배우게 된다. 그러나 당일 떨어진 대본을 외우기도 급급한 판에 선배의 연기를 지켜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번갯불에 콩 구어 먹듯 진행되는 제작 현장이다 보니 그곳에 드라마 완성을 위한 배우, 스태프 간의 의견 교환이 이루어질 턱이 없다. 모든 것이 일방통행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는 좋은 작품을 기대할 수 없다.

“드라마를 제작하려면 수준 있는 시나리오를 미리 완성해서, 적어도 촬영 며칠 전에는 배우들과 협의하는 시간이 필요해요. 정말 연기하면서도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라며 탄식하는 노배우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정말 좋은 작가라면 배우마다 다른 대사톤과 연기 스타일에 맞춰 대본을 쓰겠지만 사실상 그렇게까지 하기란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현장에서 배우가 충분히 읽어보고 작가와 협의하고, 수정해서 최선의 대본을 완성해야 한다. 그러나 그럴 여유 없이 강행되는 제작 환경으로 인해 대사 속에 자주 사소한 옥에 티들이 만들어진다. 물론 이것이 모두 작가 혼자만의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다. 드라마를 만들면서 대본을 써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리 역량 있는 작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거기다가 인기 좀 있다 싶으면 곧바로 방영 횟수가 엿가락처럼 늘어나게 되니 부실 대본은 피할 수 없는 필연의 결과일 수밖에 없다. 사전 제작은 어렵다고 하더라도 연장으로 인한 부실 요소까지 더해지는 이 심각한 악순환은 해결될 기미가 없다는 것이 더욱 절망적이다. 연장에 대해 단호하게 거절할 수 있는 작가와 배우가 없다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단 한번이라도 연장을 통해서 더 나아진 드라마가 없다는 점에서 연장만이라도 사라질 수 있는 풍토 마련이 시급하다.

작가와 배우가 치고받고 싸우고, 보다 못한 노배우까지 나서야 하는 웃지 못할 사태에도 정작 이 사태의 책임이 가장 큰 드라마 제작자들이 남의 일처럼 침묵하고 있다는 것이 괘씸하고 우울한 일이다.


참고글, 2011/03/12 - 싸인이 남긴 것. 재방에야 완성되는 한국 드라마의 문제점

매스 미디어랑 같이 보고 달리 말하기. 매일 물 한 바가지씩 마당에 붓는 마음으로 티비와 씨름하고 있다. ‘탁발의 티비 읽기’ http://artofdie.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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