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의병의 이야기를 야심차게 다룬 <미스터 션샤인>은 아이러니하게도 남자 주인공인 유진 초이(이병헌 분) 및 주요인물 구동매(유연석 분)을 '국외자'로 설정하여 논란의 중심에 섰다. 아무리 어린 시절 조국의 은혜를 받지 못해 고국을 떠난 노비의 아들이나 백정의 자식이라도 그들이 이제 미국인 혹은 일본의 낭인이 되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 설정은, 그들의 극적인 '자각'을 예정한다 했어도 그들의 역사적 존재로 인해 받아들이기 쉽지 않도록 했다. 그런데 바로 그 국외자였던, 그래서 늘 '경계'에 섰던, 아니 스스로 경계 밖의 존재라 자신을 규정했던 두 사람에게 스스로 경계를 넘어설 수밖에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인 유진, 의병의 저격 대상이 되다

tvN 주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유진은 노비였다. 아비가 노비였고, 어미 또한 그러했다. 어미의 미색을 탐한 외부대신 이세훈과 그에게 잘 보이려던 희성의 조부가 억울한 누명을 씌워 유진이 보는 앞에서 아비를 멍석말이로 죽였다. 어미는 유진을 살리기 위해 희성의 어미를 겁박했고, 유진이 무사히 그 집에서 도망치는 걸 보고 우물에 몸을 던졌다. 추노꾼을 피해 어미의 유언에 따라 유진은 조국에서 가장 먼 곳 미국행을 택했다.

낯선 미국 땅에서 조선의 어린 소년은 이방인의 놀림을 피하기 위해 총을 잡았고, 그 총이 그를 미국 시민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 '총'의 덕택에 그는 조국에 미국의 장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당연히 그에게 자신을 버린 조국은 없다. 그는 이방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편의에 따라 그를 조선인으로도 미국인으로도 부른다. 경계에 선 유진, 하지만 그는 철석같이 자신을 미국인이라 생각하려 한다.

유진은 조선의 왕 앞에서도 미국인이었다. 유진이 자신의 부모를 죽인 외부대신 이세훈을 조선의 정부와 협력하여 제거하자, 그에 호감을 가진 고종은 '한국인'인 그를 조선의 군사 고문으로 끌어들이려 한다. 하지만, 오로지 이세훈을 역모죄로 몰기 위해 의병과 정부와 협력했던 그에게 고종의 청은 '논외'의 문제였다. 어디까지나 그는 '미국인'이었고, 미 영사관 주둔 장교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철옹성에 돌을 던지기 시작한 건 '사랑'이었다. 남자 양복을 입고 총을 들고 담 위에서 만났던 고씨댁 영애 고애신(김태리 분)은 어느 틈에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자신과 같이 총을 들었던 그녀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신분의 여성이었다는 그 다름이었을까. 대나무처럼 위기의 상황에서 더 꼿꼿해지는 그녀의 품성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면 그런 꼿꼿함 뒤에 숨겨진 자신과 같은 냄새를 풍기는 고독 때문이었을까. 유진이 한글을 배워가고 애신이 알파벳을 한 자 한 자 익혀가는 속도를 추월하여 두 사람의 마음은 깊어진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랑이 유진의 국적을 위협하지는 않는다. 외려 거리에서 총격을 벌이던 애신 대신 자신의 팔에 총상을 입어가면서까지 총을 들고 나서는 유진은 미국인 장교였기에 그녀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미국인'이라는 존재가 그에게는 애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좋은 장치였다.

tvN 주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그러나, 도자기를 담은 나무 상자 안의 소년을 기꺼이 한 달 여 동안 배아래 칸에 숨겨 미국으로 동행했던 선교사 요셉의 죽음은 '미국'이란 울타리 안에 있던 유진을 흔든다. 그저 아버지 같은 선교사인 줄 알았던 요셉. 하지만 그는 고종의 밀서를 품에 안고 이완익이 보낸 자의 저격으로 죽음에 이른다. 미국인이었지만 조선을 위해 일하다 죽은 '아버지' 같은 요셉, 유진은 그런 그의 죽음을 덮으려는 조선 정부 등의 처사에 반발한다. 그에게는 지금 요셉의 죽음을 덮으려는 조선 정부나 그의 죽음을 사주한 이완익이나 차별성이 없다.

요셉의 죽음을 파헤쳐가던 유진. 그 과정에서 그가 알게 된 사실은 정문 휘하 '의병단'에게는 위기였다. 그들에게 유진이 파헤쳐 들어가는 건 그저 사건이 아니라 의병의 ‘전모’였으니까. 그러기에 미국인인, 이방인인 유진은 의병에게는 위험한 인물이었고, '제거' 대상이 되고 만다. 이는 역으로, 유진에게는 이제 이방인이 될지, 의병의 동지가 되어야 할지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건 앞서 군사 고문관이 되어달라는 고종의 청탁과는 결을 달리한 선택이다. 애신 앞에서 노비의 신분이었던 자신의 '전존재'를 밝히던 그 순간과도 다른 것이다.

드라마는 이제 본격적으로, 미국인이었던 유진을 선택의 벼랑으로 몬다. 더구나 총을 들고 그를 저격하러 올 사람은 애신이다. 이제 더는 미국인이라는 존재가 그의 '안전장치'가 될 수 없다.

버림받은 일본의 개, 구동매

tvN 주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조선에서 백정은 사람이 아니었다.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조차 머리를 들고 다닐 수 없고, 매질은 일상이었으며 백정의 여인인 게 들통 나면 욕보이는 게 하등 이상하지 않을 존재, 그런 백정은 조선의 신민이 아니었다. 부모가 조리돌림을 당하며 죽어가고 목숨을 잃을 뻔했던 동매를 애신이 자신의 가마에 숨겨 구해주었다.

겨우 목숨만 보전한 채 조국을 떠난 동매를 품어준 건 일본이었다. 조선에서 매질과 놀림의 대상이었던 그의 칼은 일본에서 그를 출세하도록 해주었다. 그래서 기꺼이 일본인이 되었다. 기꺼이 그곳에서 짐승을 잡던 칼을 사람에게 겨누었고, 그게 동매를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행세'하게 해주었다. 그런 그가 일본을 등에 업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양반도 아니지만 그가 행차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조아리며 뒷걸음질 친다. 그의 칼 앞에 일본인들조차 움찔한다. 그는 그렇게 무신회 한성지부장으로 호가호위했다.

하지만 그의 위세는 '일본'이라는 그늘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일본의 앞잡이이었지만 그들의 뜻의 서로 달라진 순간, 같은 일본의 개였던 이완익과 동매는 '적'이 된다. 마치 사냥개가 사냥이 끝나자 '개고기'용으로 바뀌듯이, 덩치가 커져 손아귀가 잡히지 않은 낭인 동매는 이제 고애신의 조부 고사홍을 잡을 '개'일 뿐이었다. 살기 위해 기꺼이 일본을 위해 칼을 잡은 동매, 이제 그는 자신의 주인이었던 일본이 그를 버리자 선택의 기로에 선다. 마치 매타작을 당하다 도망치던 개가 주인이 부르자 쪼르르 달려오는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것인지, 그게 아니면 주인을 물 것인지, 거기엔 갖은 고문에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던 애신의 조부, 아니 죽어도 될 목숨을 귀하다 살려준 애신이 있다.

그렇게 이방인이던 유진과 동매는 경계인으로서 안온했던 존재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리고 그건, <미스터 선샤인>이 그리고자 하는 '의병 항쟁'의 큰 흐름과 맞물린다. 이방인이었던, 그리고 노비이자 백정, 조선의 신민으로 대접받지 못했던 그들마저 조국을 구하기 위해 총을 드는 순간 '의병 항쟁'은 극적이 된다. 그러기 위해, 유진은 미국인임에도 조선을 위해 일하던 선교사 양아버지를 잃게 됐고, 동매는 그가 의탁하던 일본과 또 다른 일본의 앞잡이의 배신에 봉착하게 된다. 가장 그들이 믿던 것들을 잃는 순간, 그들은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직시하게 될 것이다.

그간 드라마에서 강력한 열강의 시민이었던 유진과, 명성황후 시해 사건 연루 논란까지 일었던 일본의 낭인 동매는 '역사적으로 불편한 존재'였다. 그들의 극적인 자각을 위한 장치였음에도, 사실 그들의 존재는 <베르샤이유 장미>의 오스칼이나 <성균관 스캔들>의 이선준과 다를 게 없다. 하지만, 아직도 국가대 국가의 경기에서 한일전은 필승해야만 하는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되듯, 역사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는 미국인과 일본인의 그늘에서 호가호위하는 주인공들의 존재를 편안하게 즐길 수 없도록 만든다.

tvN 주말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무엇보다 이제 GDP 1조 5608달러 그 전년도보다 떨어졌다는데 그 전에 11위, 지난해 12위의 국제적 위상의 국가에서, 구한말 일본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침탈 속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그리고 그 무력했던 국가 상황 속에서 일본의 앞잡이들이 판치는 상황을 지켜보는 건 편치 않은 것이다. 이완익으로 대표되는 일본 앞잡이가 조선의 정부를 쥐락펴락하는 상황은 더더욱 불편하다.

하지만 허구인 이완익만큼이나, 사실 궁내부 대신 정문에서 도공 황은산, 포수 장승구로 이어지는, 나아가 해외 지부까지 준비되는 의병의 상황 역시 '픽션'이다. 과연 구한말 우리는 그렇게 조직적으로, 신분 제도를 넘나들며 양반과 천민이 손을 잡고 집요하게 저들의 침탈에 대비했었을까? 픽션의 자율성을 어디까지 여유를 줄 수 있는가 그 문제이지만, 여전히 일본이라 하면 곤두세워지는 우리의 신경은 드라마를 편하게 볼 수 없도록 만든다. 아마도 이런 상황이라면 영국 드라마 <닥터 후>에서 영국 여왕을 괴물 외계인으로 표현한 설정은 불가능할 것이다.

진짜 문제는 그런 구한말 시대 상황에 대한 우리의 '무지'이다. 국사 시험에서 고종의 아버지 대원군의 이름에 모 배우의 이름을 쓸 정도는 아니라지만, 김은숙 작가의 드라마를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여유롭게 시청할 만큼 우리의 역사적 지식이 여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현실의 국사 교육이 일천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들이 <미스터 션샤인>을 보고 구한말 우리의 무기력함을 아이들이 지배적으로 인식할까 우려할 만큼, 아이들은 학교에서 달달 외는 식으로 우리 역사를 배우는, 그렇다고 어른이라고 뭐가 다를까 싶은 우리의 '리얼'이 사실 더 문제이다. 그래서 아이러니하게 경계인에 서, 이제 자신의 존재를 깨닫게 된 이방인 주인공의 선택에 울림이 커진다. 드라마를 통해 실감하는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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