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김민하 칼럼] 여당은 또 한심한 싸움을 하고 있다. 여당 전당대회에 영부인의 문자 메시지가 화젯거리가 된 건 사상 처음이다. 지난 총선 당시 김건희 여사가 ‘명품백 수수 의혹’에 대해 사과를 하겠다는 의사를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에 밝혔으나 무시를 당했다는 것이다.
친윤계 인사들은 이를 근거로 지난 총선에서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한동훈 전 위원장이 이를 걷어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총선 패배 책임론과 윤-한 갈등론의 종합판인 셈이다. 반면 한동훈 전 위원장 측은 공개된 문자 메시지 내용에서 중요한 대목이 빠져있다고 반론한다. 메시지의 핵심 취지가 ‘사과를 하겠다’는 게 아니라, ‘사과를 하면 불리한 국면이 될 수 있으나 당신들이 그렇게 원하니 한동훈이 책임지겠다면 하겠다’는 것에 가까웠다는 거다. 이렇게 되면 문자 메시지를 둘러싼 논란은 진실게임 양상으로 흘러가게 된다.
한동훈 전 위원장은 특수부 검사 출신이다. 한때는 ‘서초동 편집국장’이란 별명으로 불렸을 정도로 프레임 싸움에 능한 그의 주특기는 상황을 재정의하고 이에 근거한 역습을 펼치는 거다. 컵에 물이 반 정도 차 있는 경우, 상대가 “물이 반만 차 있다”고 하면 “무슨 소리냐, 물이 반이나 차 있는 거다. 반이나 차 있는데 반만 차 있다 라고 굳이 주장하는 건 욕심 아니냐? 그 욕심이 절도의 원인이냐?”고 하는 식이다. 검사로서 이런 기술은 범죄자의 방어 논리를 깨고 주요 혐의를 구성해내는 성과의 근거가 됐을 것이다. 물론 혐의를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무리수와 언론 플레이에 의존한 끝에 수사 실패와 무죄 판결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한동훈 전 위원장 측이 말하고 싶은 것은 김건희 여사 행위 자체의 부적절성이다. 김건희 여사가 한 개인으로서 사과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본인이 그냥 하면 될 일이다. 만일 사과 여부에 정치적 고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면, 당 입장에서 이건 선거전략 차원의 문제가 된다. 당의 선거전략은 한동훈 전 위원장이 말하는 대로 공적으로, 대통령실을 통한 논의 끝에 결정할 사안이다. 시점이나 메시지 내용을 한동훈 전 위원장과 김건희 여사가 ’다이렉트’로 논할 문제가 아니다.
물론 융통성을 발휘해 한동훈 전 위원장이 김건희 여사에게 대통령실과 먼저 논의하라든지 하는 설명을 하는 게 좋았을 수 있다. 친윤계의 공략 포인트 중 하나도 이 대목이다. 그냥 ‘읽씹’을 한 이유가 뭔가? 정치적으로 미숙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자기 정치를 하려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을 배신하게 된 게 아니냐, 이게 친윤의 프레임이다.
만일 김건희 여사가 일반적 지위에 있는 영부인이었다면 이런 프레임도 꽤 먹혔을 수 있다. 문제는 대다수의 지지자들 눈에 김건희 여사가 ‘일반적인 영부인’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그렇잖아도 김건희 여사에 대해서는 인사 등 국정 개입 의혹 등이 이런저런 경로를 통해 제기된 바 있다. 여당 지지자 상당수도 김건희 여사의 여러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는 활동에 대해서는 대통령이 적절히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할 거다. 쉽게 말해 좀 말려줬으면 한다는 거다.
이러한 특수성은 한동훈 전 위원장 측 대응을 또 하나의 프레임으로 이어지도록 한다. 김건희 여사를 지금까지와 같이 그대로 둘 것인가, 아니면 영부인의 문자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을 대표로 선출해 악순환의 고리를 끊을 것인가? 이게 물 밑에서 펼쳐질 ‘역습’의 논리다.
‘제2의 연판장 사태’ 역시 비슷한 시선으로 볼 수 있다. 일부 원외 당협위원장들이 주동한 일은 정확히 말하면 ‘한동훈 사퇴 요구 기자회견’ 미수 사건이다. 아마 ‘한동훈 전 위원장이 김건희 여사 문자 메시지를 무시해 총선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점에서 실질적 피해자인 원외 위원장들도 들고 일어났다’는 식의 서사를 만들고 싶었을 거다. 이들이 일부 원외 인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참석 및 동의 여부 등을 물은 것은 물론 조직화의 일환인데, 전당대회 과정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보긴 어렵다. 보통 이러한 상황에 대한 여의도 정치식 대응은 ‘자기 편’을 조직해 비슷한 일을 시도하는 거다.
그런데 한동훈 전 위원장 측은 이 상황을 ‘제2의 연판장 사태’로 규정했다. 이 사건은 지난 전당대회에서 나경원 의원의 출마를 친윤 인사의 사주를 받은 국회의원들이 별 근거도 없이 주저 앉힌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러나 어쨌든 대통령의 전당대회 개입을 친윤 인사들이 가능하도록 해 만들어진 판이라는 점은 본질적으로 같다. 한동훈 전 위원장 측은 이 대목을 영리하게 공략해 상황을 ‘재정의’한 거다.

8일 언론 보도를 보면 김건희 여사 문자 메시지 공개의 과정에 어떤 방식으로든 윤석열 대통령의 의중이 작용했을 거라는 시각이 대다수다. 동아일보는 “윤 대통령이 의원들을 만날 때마다 한 위원장이 김 여사의 문자를 무시했다는 이야기를 해 온 것으로 안다”는 친한동훈계 의원의 발언을 전하고 “익명을 요구한 한 국민의힘 의원은 ‘찐윤’(진짜 친윤석열)으로 통하는 이철규 의원이 이런 내용이 포함된 김 여사의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여줬다고 말했다”고도 보도했다.
중앙일보 역시 “‘메시지를 친윤 의원에게 전달한 사람이 윤 대통령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는 문구가 포함돼 있다’고 말하는 의원도 있다”는 국민의힘 의원 주장을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김 여사 문자 메시지는 윤 대통령의 내락 없이는 외부로 나가거나 문제 삼기 힘든 일이다. 친윤 인사들이 앞다퉈 쟁점화하는데 대통령실이 관여하지 않았다니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이러니 한동훈 전 위원장 측의 프레임이 역시 설득력 있게 들릴 수밖에 없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가 한동훈 전 위원장이 대표가 되는 상황만은 막아보려다가 오히려 역습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더 문제는 이러다가 게도 구럭도 잃을 위기라는 것이다. ‘배신의 정치’니 뭐니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김건희 여사 문자 메시지 논란이 커지면서 여당 전당대회는 이제 평론이 어려울 정도의 코미디적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해 러시아가 빠진 G8에 한국이 들어갈 수 있다는 식의 주장을 하기도 했는데, G7에 속하는 국가 중 영부인 사과 문자 메시지 ‘읽씹’ 논란 같은 게 여당 정치의 주요 소재인 나라가 어디 있는지 묻고 싶다. 전당대회 결과와 관계없이 대통령과 영부인의 이런 정치는 앞으로도 상대를 가리지 않고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그야말로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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