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문명이 종말에 처한 이후를 그려내는 영화는 엄청 많다. 작가들은 온갖 상상을 다한다. 어떤 작가는 핵폭탄이 터진 이후의 겨울날을 그리기도 하고, 어떤 작가는 온난화로 바닷물이 넘치는 대홍수를 그리기도 한다. 그런데 왜 한국에 아파트 폭탄이 터진 이후를 그려주는 영화는 없을까?

지방에 사는 내겐 아파트가 한 채 있다. 사정이 있어 벌써 일 년 전에 집을 팔려고 내놓았는데도 그동안 도대체 집을 보러오는 개미조차 없다. 신문을 보면 MB 덕분에 서울 집값이 올랐다 하는데, 지방은 왜 그럴까 해서, 요즈음은 시간만 나면 인터넷을 뒤져 아파트의 동향을 점검한다. 그런데 인터넷상에는 머지않아 아파트 버블이 터질 것이라는 소문으로 흉흉하다. 나야 철학도이니 경제는 모르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이걸 아예 확정적이라 한다. 다만 언제인지만 불확실할 뿐 머지않은 장래에 분명 터진다는 것이다. MB가 행복도시의 약속을 파기하려는 것도 다 이 때문이라나? 임계점에 다다른 경우 인구 10만 명 정도가 이동하더라도 그 효과는 엄청나다고 한다. 그런 인구이동을 막지 않으면 서울에서도 아파트 버블이 터진다고 한다.

아, 지방엔 벌써 터졌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터지고 있는 폭탄 위에 살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말해, 나야 그렇게 초조한 것은 아니다. 지방에 있는 아파트로 돈을 벌어도 몇 푼 안 되듯이 손해나도 얼마 안 된다. 비뚤어진 심사에, 서울 놈들, 니들은 잘 되겠다고 생각하니 약간 즐겁기도 하다. 그런데 다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 버블이 터진 다음, 우리는 어디에서 살아야 하나? 당분간은 아파트에서 버티겠지. 그렇지만 아파트 수명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50년 넘어가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성만 충분하다면 지금처럼 다시 재건축될 거다. 하지만 버블이 터진 그때도 사람들은 다시 또 아파트를 재건할까? 왜 우리가 아파트라는 주거방식을 택했는가, 이런 주거방식이 앞으로도 과연 지속되는 것인가? 이런 고민 때문에 버블이 터진 이후의 모습을 그리는 영화를 찾아보았던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영화는 없으니 내가 한 번 만들어볼까 한다.

유토피아와 아파트

생각해보면 아파트는 정말 비극적인 운명을 가졌다. ‘아파트’라는 개념을 상상했던 자들은 위대한 사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이 그려낸 유토피아 한 가운데 아파트가 있었다. 우선 푸리에를 보자. 그는 ‘팔랑헤’라는 공동체를 구상했다.

산비탈 아래 강물을 끼고 그는 팔랑헤를 세우려 했다. 그는 노동은 모름지기 사람의 적성에 맞아야 한다고 보았다. 사람의 적성의 종류가 810개 있다고 보고, 그는 1620명 정도로 구성된 공동체를 만들었다. 노동과 생활이 합치해야 하므로 그는 마을 주변에 농장을 만들고 마을 안에는 가축사육장과 공예품 작업장을 세웠다. 공정하게도 그는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직업에 더 많은 임금을 부여했다.

그는 한 가운데 운동장을 ‘ㄷ’ 자로 둘러싸고 4층 벽돌 건물을 지었다. 이 벽돌 건물들 사이에는 뜰이 배치됐다. 흥미롭게도 그는 결혼제도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건물의 왼쪽에 남자가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오른쪽엔 여자들이 거주하게 했다. 필요하면 서로 자유롭게 성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카드 인덱스를 만들어 서로 쉽게 짝을 찾을 수 있게 했다. 인간에게 문화적 욕구가 주요하니, 그는 건물 안에 교회뿐만 아니라 극장을 만들어 놓았다.

푸리에가 구상한 팔랑헤는 물론 공상이었지만, 미국 뉴저지에는 푸리에 지지자들이 실험적으로 만들어보았던 팔랑헤의 잔해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아파트의 역사가 원대한 꿈을 안고 시작되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운동이 일어났다. 그 운동은 예술을 통해 사회 혁명을 일으켜보자는 아방가르드 정신을 기초로 했다. 모더니스트들은 예술의 힘을 믿었다. 즉 예술이 인간의 영혼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다고 보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조차 소외되므로, 그들은 예술을 대중화하기로 했다. 그 방법은 간단했다. 그것은 생활환경을 예술화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환경이 무엇인가? 바로 주거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동자의 주거를 변혁하기로 결심했다. 다시 한 번 아파트의 개념이 그들의 꿈속에 떠올려졌다. 아파트 즉 집합주택의 문제에 가장 많이 고민했던 사람이 르꼬르비지에이다.

르꼬르비지에는 노동자를 위한 아파트를 가장 경제적으로 짓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게 바로 모듈화하는 것이었다.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건설된 모듈을 현장에서 쌓아올리면 바로 아파트가 지어진다. 이를 위해 표준화가 이루어져야 했다. 르꼬르비지에는 창문의 크기, 천장의 높이, 바닥의 넓이 등 모든 문제에서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척도를 발견하려고 고투했다.

더구나 그는 아마도 처음으로 일자형 아파트를 생각했다. 채광이나 통풍에 있어서, 일자형 아파트가 가장 유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건물은 철근이나 유리 그리고 시멘트로 이루어졌다. 이런 재료들이 값싸고 다루기 쉬웠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이런 재료들을 통해서 미래에 다가오는 사회주의 미적 감각과 윤리적 이상을 표현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에게서 시멘트란 거칠지만 따뜻한 사회주의를 의미했다.

그는 같은 공장에 함께 일하는 노동자 집단을 위해 아파트를 지었다. 그래서 아파트는 전원이 아닌 공장 근처에 세워져야 했다. 비록 팔랑헤의 전제였던 공동체 개념은 무너졌지만 그는 여전히 동질적인 집단의 공동생활을 전제로 하였다. 그는 공동의 취사, 공동의 세탁, 공동의 육아 및 교육, 사회적 교류와 스포츠 및 오락의 장소들, 그리고 공공의 서비스를 위한 장소를 마련했다.

물론 그는 푸리에처럼 남녀의 결혼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개별 주거의 독립성을 보장했으나, 주거의 다른 기능이 거의 사회화되었으므로, 개별 주거는 이제 잠자는 장소로 축소되고 말았다.

침대의 신을 위하여

이렇게 아파트는 공동체의 이념을 안고 출현했다. 그것은 과학에 기초했지만, 목적은 유토피아이었다. 50년대 그리고 60년대를 거쳐서 아파트는 전 세계적으로 건설되었다. 사회주의 국가는 물론하고 자본주의 국가 역시 아파트 건설에 주력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토피아가 실현되었다. 그러나 지상의 세계에로 내려오기 위해서 아파트는 우선 날개를 버려야 했다. 그래서 아파트는 우선 공동체적 삶의 이념이라는 왼편의 날개를 잘라내기로 했다. 그래도 과학적 기능주의와 경제성이라는 오른편 날개는 남았다.

70년대 초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속하게 상승하자, 아파트에 남아있던 나머지 날개도 잘려나갔다. 아파트는 채광과 통풍에서 유리했지만, 대신 보온과 단열에서 지극히 불리했다. 아파트는 이제 ‘베드타운’이라 불리었다. 그것은 그저 잠자리로 전락한 벌집 아니 개미집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70년대 이르면 서구에서는 마침내 아파트 폭파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바로 이때쯤이다. 서구 사회에서 생존의 위협을 받던 아파트가 살길을 찾아 망명한 끝에 안착한 곳이 한국이었다. 서구에서 추방당한 저임금 공해 공장들을 따라 아파트도 함께 기어들어왔던 것이다. 박정희식 억압하에 고통당하던 노동자들에게 아파트가 보상으로 주어졌다. 남자들은 아파트를 위해 정관수술을 하였고, 열사의 중동을 헤매면서 강남의 아파트를 꿈꾸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불과 40년도 되지 않아 거의 대부분의 국민이 아파트에 거주하게 되었다.

이 아파트에 대한 한국인의 지극한 사랑의 원천은 어디에 있는가? 많은 사람이 여러 가지로 분석하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다들 핵심을 놓쳤다. 한국인이 아파트를 사랑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침대를 모시기 위해서이다. 나는 이것을 학생들에게 물어보고 알았다.

내가 학생들에게 소원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집 나가는 거요’ 하고 대답한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집에 가면 ‘숨이 막힌다’고 한다. 그들이 부모와 그렇게 사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왜 그러냐 했더니, 문제는 바로 거실이었다. 거실에 부모들이 항상 앉아 있다. TV를 보든 음식을 먹든 소파에서 잠을 자든. 그것은 부모의 시선이 항상 학생들의 목덜미 뒤에 꽂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부모의 자리는 안방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부모는 왜 안방을 나와 거실에서 사는가? 그건 또 이유가 있다. 안방에는 침대가 모셔져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는 아이들을 위한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들의 부모를 위한 것도 아니다. 아파트는 오로지 침대를 위한 것이다. 온돌방 위에 올려져있는 서구적 침대, 정말로 초현실주의적인 발상인데, 그것은 우리가 꾼 꿈이 아니다. 이것은 침대가 우리로 하여금 꿈꾸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는 침대의 신을 위해 봉사하는 신민들이다. 침대 때문에 안방이 넓어졌고, 침대 때문에 부부가 거실로 추방되었고, 아이들은 방 안으로 유폐되었다. 아파트는 모텔이 되어 가고 있었다.

폭탄이 터진 이후

아파트 버블이 터진 다음, 사람들은 모두 디스토피아를 예상할 것이다. 무슨 핵겨울이나 대홍수처럼 말이다. 사실 표면적 모습만 보면 그럴 것이다. 더 이상 재건축되지 못하는 불임의 아파트. 그 아파트 벽면은 갈라져서 때우고 또 때워도 그 주름을 다 지울 수는 없으리라. 섀시는 비바람에 붉게 녹슬었고, 배관은 낡아 속에 든 오물이 고름처럼 줄줄 흘러내릴 것이다. 문틀이 비틀어져 문짝과 맞지 않으니 작은 바람에도 문짝은 털컹거리며 사람들은 방 안에 숨어 어떤 비밀 이야기도 할 수 없으리라. 윗집의 화장실 물 흐르는 소리와 아랫집 부엌의 음식 냄새가 벽을 넘고 층을 넘어 들어올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기 싫으면 서울 잠실에 아직 철거되지 않은 낡은 아파트를 방문하면 생생하게 눈으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난 이런 모습을 디스토피아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새로운 희망이 출현하는 종말의 나날일 것이다.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마침내 아파트를 버릴 것이고, 마치 상처 속에서 간간이 성한 살이 돋아나듯 새로운 주거들이 지어질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야 하니 아파트가 종말에 처했다고 길바닥에서 주거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새로운 주거의 형식이 어떤 것인지 나도 아직 모른다. 저밀도 집합주택일까, 전통 가옥일까? 흙집일까? 모른다. 그런데 적어도 하나 확실한 것은 있다. 그것은 마당의 부활이다. 아파트는 마당이 없다. 방이 갇혀 있는 곳이라면 마당은 열려 있는 곳이다. 방이 사적인 곳이고, 침대를 위한 곳이라면, 마당은 공적인 곳이고, 만남을 위한 곳이다. 자연과 만나든 이웃과 만나든. 아파트가 억압한 것이 마당이라면, 억압된 것은 끝내 다시 귀환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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