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0일 세계 인권의 날을 맞아 세계 각국의 저명인사 173명이 시민 사회에 대한 반민주적 탄압을 즉각 중단할 것을 한국 정부에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지난해 촛불집회 탄압에 이어 올해 더 많은 진보단체와 민주적 시민이 탄압을 받고 있다”며 “이명박 정부가 진보적 단체, 민주적 시민들에 대한 공격을 즉각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고 했다. 또 ▲용산참사 구속자 석방 ▲집회·시위 참가자를 대상으로 한 무차별 소환장 발부 중단 ▲국가보안법에 의한 탄압 중단 ▲언론노조 탄압 중단 ▲촛불집회 구속·연행자에 대한 공소 취하 및 수배 해제 등을 요구하고,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적 탄압이 계속된다면, 전 세계의 진보 단체와 민주적 시민들의 더 커다란 항의에 직면할 것임을 엄중히 경고한다.”고 밝혔다(한겨레 2009년 12월 9일치 참조). 미국의 원로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 보스턴대 명예교수가 한국의 독자에게 이름을 알린 마지막 기사였다. 그로부터 불과 두 달도 채 안 돼 날아든 갑작스런 부음(訃音)은 국경을 초월해 많은 이를 안타깝게 했다. 어느 신문의 부고 기사에 달린 한 누리꾼의 솔직한 댓글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관심조차 가지고 있지 않겠지만, 노엄 촘스키 교수님과 더불어 이 시대에 진정으로 실천하는 지성인이셨던 하워드 진 교수님의 명복을 빕니다. 단 한 번도 만나 뵌 적은 없습니다만, 앞으로도 평생의 스승으로 존경하겠습니다……”

▲ 하워드 진(1922년 8월 24일~2010년 1월 27일)
고인(故人)을 사숙(私淑)해온 수많은 이에게 하워드 진이 남긴 빛나는 지적 소산들(<미국 민중사> <불복종의 이유> <전쟁에 반대한다> <마르크스 뉴욕에 가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권력을 이긴 사람들> <하워드 진 교육을 말하다> <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하워드 진 살아있는 미국역사> <하워드 진 역사의 힘> 등)은 배타적인 권력과 부(富)가 득세하는 현실 세계의 부조리와 모순을 타파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보여준 정신적 나침반이었다. 보다 나은 세계에서 살기를 염원하며 일평생 사회적 소수와 약자의 편에 섰고, 대학 강단을 박차고 나가 거리의 활동가·젊은이·시민들과 함께 투쟁의 최전선에서 싸웠던 고인은 진정 실천적 지식인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시대의 귀감이었다. 그런 간단없는 노력과 고인이 평생에 걸쳐 추구해온 사상이 살아 펄떡거리는 활자로 고스란히 녹아 있는 대표적인 저서로 바로 이 책 <오만한 제국>을 꼽을 수 있다. 독립 선언(DECLARATIONS OF INDEPENDENCE)이라는 원제가 말해주듯 하워드 진은 이 책에서 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가진 통제수단으로서의 역기능, 선택의 다원주의를 해치는 정통 관념의 지배, 객관성과 중립의 신화,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는 모든 도그마적 사고로부터 ‘독립 선언’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미국의 외교 정책이 극단적으로 보여준 마키아벨리적 현실주의(realism)는 그레나다와 파나마 침공, 니카라과 좌파정부 전복과 엘살바도르 우파정부 유지를 포함한 중앙아메리카 정책, 이란-콘트라 사건, 베트남과 캄보디아, 피그스만 침공 등 비밀주의 대외정책을 관류하는 이념이었다. 현실에 근거해 행동해야 한다는 현실주의 관념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속임수’를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작용했고, 이런 속임수는 대외의 적보다는 오히려 자국 국민들에게 더 많이 사용됐다. 닉슨이 베트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에서, 레이건과 부시가 이란-콘트라 사건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은 행정부의 모든 의사결정과정의 정점에 있는 미국의 대통령들이 자신에게 닥쳐오는 위기 때마다 ‘나는 아무 것도 몰랐다’고 발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그럴듯한 부인’(plausible denial)이다. 하워드 진은 “최근의 미국 역사를 통해 우리는 나중의 책임회피를 위해 지저분한 일은 아랫사람들을 내세우는 통치자들의 테크닉에 익숙해지게 되었다.”고 썼다. 그러나 역사는 소(小)마키아벨리뿐 아니라 대니얼 엘스버그(Daniel Ellsberg)와 같은 소수의 반마키아벨리주의자들이 보여준 용기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마키아벨리를 거부할 것, 군주에게든 대통령에게든 굴종을 용납하지 않을 것, 공공정책의 목적이 진정 누구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우리는 정책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정의로운 일이 되는지 검토해 볼 것. 이렇게 현실에 대한 다른 사람의 설명에 회의를 품는 것이야말로 독립적인 사고의 출발점이 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인간의 길고 어두운 역사를 돌이켜보면, 반란이라는 이름보다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끔찍한 죄악이 훨씬 더 많음을 알 수 있다. 가장 엄격한 복종률 속에서 훈련된 독일 장교단은 … 복종이라는 이름으로 세계 역사상 가장 사악하고 대규모였던 전쟁행위에 동조하고 참가했던 것이다.” 영국의 소설가이자 과학자인 스노(C. P. Snow)의 이 말은 폭력과 인간본성의 관계, 역사의 이용과 오용이라는 복잡다단한 문제를 푸는 실마리가 된다. 유태인을 구하기 위한 전쟁, 민족자결을 위한 전쟁, 인종차별주의에 대항하는 전쟁,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 미국이 선전한 2차 대전의 화려한 명분은 겉보기엔 그럴듯했지만, 역사의 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정당한 전쟁’이란 결코 없었다는 것이다. 체제가 즐겨 사용하는 현실로서의 ‘법과 질서’에 대한 불복종이 2차 대전과 베트남전 내내 전쟁에 반대하고 참전을 거부하는 반전 운동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이유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1960년대에 한 하버드 법대생이 부모님과 졸업생 앞에서 한 연설은 ‘법과 질서’라는 경구(驚句) 뒤에 감춰진 위선을 날카롭게 폭로한 것이었다. “우리나라 거리들은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대학들은 폭동과 소요를 일삼는 학생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나라를 호시탐탐 파괴하려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완력을 동원해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으로부터의 위험, 또 외부로부터의 위험. 우리는 법과 질서가 필요합니다. 법과 질서 없이 우리나라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박수갈채가 끝나자 이 학생은 청중들에게 이렇게 일러주었다. “지금 말한 것들은 1932년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한 것입니다.”

▲ 오만한 제국 (하워드 진, 2001)
국가에 대한 의무와 헌신, 형벌에 대한 복종 따위로 법질서에 호소하는 국가 권력의 도그마는 전쟁이나 대량학살, 노예제 등 인류가 겪어온 끔찍한 폭력이 애국심에 호소하면서 전쟁을 요구해온 정부에 복종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점을 확인하는 순간 무력화된다. 하여 저자는 묻는다. 우리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우리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사람이 되라고 요구할 것인가. 법의 충실한 신봉자들인가, 아니면 때로는 법 테두리 내에서 때로는 법 밖에서 또 때로는 그것에 맞서서, 그러나 항상 정의를 위해서 싸우는 비판적인 인간인가. 어떤 삶이 가장 가치 있는 삶일까. 법과 질서에 대해 예의바르고 순종적이며 책임을 다하는 삶인가. 독자적으로 생각하는 자, 반역자의 삶인가. 사회의 부(富)를 소수의 경제 엘리트가 독점하면서 갈수록 심화하는 경제적 양극화로 인해 가진 돈에 따라 수직화한 계급은 나날이 공고해진다. 헌법이 보장하는 포괄적인 표현의 자유(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경찰서에서 군대에서 법정에서 그 조직을 지배하는 자들의 권력에 눌려 무시로 제한되고 있다. 대의제 정치는 많은 경우 국민의 뜻을 보기 좋게 배반함으로써 이제는 투표조차도 갈수록 보잘것없고 아무 의미 없는 행위로 치부된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런 풍경은 국가 권력의 강요와 위협, 노예근성에 절어 있는 힘 센 언론매체가 담합해 만든 합작품이다.

“거대한 권력을 소유한 자들은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자신들의 능력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미약하고 별로 위협이 되지도 않는 저항의 조짐에 대해서도 거의 히스테리적으로 반응한다.” 하워드 진은 어떤 사람이나 집단, 운동 또는 국가가 자신을 늘 격노하게 만드는 것은 한마디로 힘으로 약자를 위협하는 행위(bullying)라고 했다. 그렇다면 일견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런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저자는 그 해답을 ‘비폭력 직접 행동’이라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실천 방식에서 찾는다. 국가와 인종을 초월한 모든 사람들 사이의 평화와 연대를 꿈꿀 수 있는 세상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최초의 행동을 시작하는 것, 최초의 말을 내뱉은 것이다! 그리고 그 최초의 출발점은 공히 역사를 새롭게 배우고 인식하는 일이 될 것이다. 위대한 인물들의 빛나는 업적으로 가득한 정통 역사 교과서가 결코 말해주지 않았던 ‘죽음도 불사하고 권위에 도전했던 사람들의 수많은 용기 있는 행동들’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역사인 바, 평생을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 인권운동의 최전선에서 앞장섰던 고인의 노고에 값하는 빛나는 지적 소산들은 국경을 초월한 인류 보편적 가치로서의 정의와 평화, 민주주의를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지금, 우리 시대의 현실을 독립적으로 바라보고 사고할 수 있게 해주며 “자신들의 영향권 안으로 세계와 우리의 정신을 묶어놓으려고 드는 정부의 광기에 새로운 세대가 저항하도록 고무시”킨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역사 공부는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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