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문건이다. 청와대가 20일 밝힌 새로운 문건 내용 개요는 충격적이다. 그야말로 권력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논객 육성 프로그램 활성화, 보수단체 재정확충 지원 대책, 청년과 해외 보수세력 육성방안이 담겨 있는 문건에 대해 청와대는 “특정 이념 확산 방안을 청와대가 직접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라고 부연했다. 권력이 나라를 운영한 것이 아니라 이념전쟁을 주도하고 정파적 대립을 추동했다는 이야기다.

이 문건들에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청년수당 지급 정책 등을 문제 삼으며 지방교부세 감액 등의 불이익 조치를 취하라는 내용도 들어있다. 실제 박근혜 정부는 시행령을 개정해 중앙정부의 통제에 따르지 않는 지자체들에 대해 교부세 삭감을 강행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었다. 박원순 서울시장과 이재명 성남시장 등은 이에 따라 헌법재판소에 권한쟁의 심판을 청구했지만 교부세 삭감은 강행됐다.

권력의 이런 행태는 이명박 정부 시절부터 노골적으로 되었다. 청와대가 최종 기획자를, 관료가 행동대장을 자처하고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이 행동대원으로 나서는 이념전쟁에 불을 붙인 것이다. 이 결과 중 하나가 최근 세계일보, JTBC 등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국정원의 정치개입 정황이다. 국가의 안보를 위해 정보자원을 통제하고 활용해야 할 정보기관이 막대한 권한을 정파적으로 남용한 것이다.

보수세력이 이런 무리수를 강행하면서 든 논리적 근거는 ‘남이 했으니 나도 할 수밖에 없다’는 거였다. ‘좌파정권’이 정치와 문화의 측면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성했으니 이를 바로잡기 위해서라도 다소 간의 불법 논란을 감수하고서라도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보수세력의 ‘설명’은 이명박 정권 때도 그랬고 박근혜 정권 때도 똑같았다. ‘적폐청산’을 내세우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섰지만 보수세력의 주장은 여전히 똑같다.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20일 오후 춘추관 대브리핑실에서 지난 정부 문건에 관련한 브리핑 하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가 문건을 공개한 것에 대한 불법 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대통령 지정 기록물일 가능성이 있는 문서들의 내용을 청와대가 대통령기록관에 이관하지 않고 마구 공개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것이다. 자유한국당은 이런 이유를 들어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을 검찰에 고발했다.

보수언론 역시 청와대 문건이 언론에 처음 보도된 날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불법 논란을 언급하고 있다. 조선일보는 21일 지면 기사에서 “자유한국당은 물론, 법조계에서도 문건 사본을 특검에 넘기고 문건 내용 일부를 계속 공개하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며 공개한 문건들이 지정기록물로 지정된 문서의 복사본일 가능성이 있고 청와대가 지정기록물이 아닐 가능성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상황의 경우 사본과 원본의 지위를 구분하는 게 의미가 없다는 등의 논리를 동원했다. 중앙일보 역시 이날 기자의 ‘취재일기’를 통해 문건 공개가 신고리원전 5 6호기 중단, 최저임금 인상, 국정과제 100대 과제 발표 등 논란이 있을만한 일정 사이에 진행됐다며 청와대가 국무회의 회의록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이전 정부의 문건만 공개하는 건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들은 타당한가? 세부적 쟁점에 대해서는 이날 한겨레에 실린 오항녕 전주대 교수의 글이 참고가 된다. 오항녕 교수는 “이번 청와대가 공개한 기록은 비밀기록도 비공개 정보도, 지정기록도 아니므로 공개 자체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수사 진행 중인 사안에 증거자료로 쓰일 기록을 검찰에 협조하는 일은 정부기관의 의무이기도 합니다”라고 지적했다. 또 오향녕 교수는 국가기록원장을 지낸 자유한국당 박찬우 의원이 “전임 정부의 대통령 기록이 다음 정부 대통령비서실에 남아 있는 이 사태는 대통령 기록 관리라는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정말 참극이고 대형사고다”라고 발언한 걸 들어 “당연히 이 참극이 왜 생겼는지 밝히고, 어떻게 해야 앞으로 대형사고를 막을 수 있을지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의원님이 가장 먼저 하실 일”이라고 썼다.

결국 이 논쟁의 쟁점은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는 청와대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채 남아있는 기록물들의 성격을 규명하는 데 있어서 ‘대통령지정기록물’일 가능성을 선제적으로 판단할 것이냐의 문제다. 공개의 적절성을 기준으로 볼 때 ‘문건이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되지 않았으므로 지정기록물로 볼 수 없다’고 하면 청와대의 주장이 맞고 ‘현재 청와대에 방치된 문건이라도 실질적인 대통령지정기록물로 간주하고 대통령기록관으로 이관해야 한다’고 하면 자유한국당 주장이 맞는 것이다. 논점을 가치판단의 문제로 옮기면 쟁점은 권력이 만든 문건을 공개하는 걸 원칙으로 할 거냐 비공개하는 걸 원칙으로 할 거냐로 압축된다.

문건의 공개가 원칙이라고 본다면 시민이 권력의 행위를 통제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일 게다. 정권이 정책 결정에 있어서의 투명성을 제고해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는 게 중요한 이유도 이것이다. 그런데 문건의 비공개가 원칙이라고 보는 건 어떤 의미인가? 지금 논쟁의 맥락에서 이 원칙은 ‘이전 정부에 대한 정치보복’이라는 ‘의도’의 문제로 치환된다. 그리고 이 ‘의도’에 관한 부분이 이 사건과 관련한 두 번째 쟁점이다.

19일 오전 자유한국당 원영섭 법률자문위원이 청와대 민정수석실 문건 등을 공개한 박수현 청와대 대변인 등을 공무상 비밀누설 및 대통령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협의로 고발하기 위해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민원실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이전 정부의 정치보복’의 극단적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촛불시위의 배후로 참여정부를 지목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정치적 논란들이 불거졌던 경험이 그것이다. 당시 수사기관은 무리한 망신주기식 여론몰이로 전임 대통령을 자살로 내몰았다. 그 때나 지금이나 같은 논리였다. ‘불순한 의도를 가진 배후가 있으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청와대의 문건 공개에 대한 자유한국당 및 보수세력의 태도는 논란이 되고 있는 바로 그 문건에 드러난 정치적 파탄들과 조우한다. 박근혜 정권의 청와대는 ‘편향적인’ 카카오톡의 샵 겁색 연관검색어를 수정하도록 압력을 가하고 “언론사로서의 위상 부여 여부와 포털의 수익 환류 제도화 추진 검토”를 했다고도 한다. 실제로 2015년 당시 새누리당의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은 ‘포털 모바일뉴스 메인 화면 빅데이터 분석 보고서’를 통해 ‘기울어진 운동장’이 된 포털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주장을 공세적으로 내놓기도 했다. 이런 인식의 근거 역시 ‘불순한 배후 세력이 공론장을 침식했다’는 위기감이었을 것이다.

어제와 오늘 신문 지상을 뒤덮고 있는 일련의 사건은 이러한 ‘불순한 동기’와 ‘배후세력’의 논리가 우리 정치와 공론장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들었는지를 드러내고 있다. 물론 민주세력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이런 한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게 사실이지만 아예 이런 논리를 내면화하고 전면적으로 권력을 남용하는데 동원한 세력의 생명연장을 보는 기분은 그야말로 착잡하다. 새 정부는 우리 정치에서 이런 현실 인식이 더 이상 발붙일 데가 없도록 최선을 다한 통치를 해야 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