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가을이었을 테다. 그즈음 시작됐던 ‘막장의 유혹’이 2009년까지 쭈욱~ 이어졌다. '막장드라마‘라는 불세출의 신조어를 탄생시킨 <아내의 유혹>은 지난 봄 막을 내렸지만, 아내만의 유혹에 섭섭해 할 이 땅의 모든 남편들을 위해서였던 것인지, 그 강도가 신체 변환으로 비할 바 없이 강해진 이른바, ’남편의 유혹‘ <천사의 유혹>이 2009년을 꽉 채우고 지난 22일 종영하였다.

이제는 패러디조차 식상해질 정도로 대중문화의 단골 인용 포인트가 되었던 얼굴에 점 하나. 그건 전 회까지의 구은재를 이제부터는 민소희로 만들어버려, 드라마 내러티브에 사상 최대의 편의를 제공했던 신기의 한 점이었다. 처음엔 점찍고 다른 사람이라 우기는 구은재가 웃겼지만, 점점 구은재의 가족은 물론 지인들은 점찍은 그녀를 그저 민소희라 부르고 모른 채 해버리니 다들 그러하니 나도 그러해야 하나 싶었다. 어디 그 뿐이랴, 불륜도 모자라 의뭉스러운 살인 미수 혐의에 사기와 협박을 일상의 기본 옵션으로 삼더니 끝에는 결국 동반자살이라는 희대의 비극까지 선보였다.

▲ SBS '아내의 유혹'
장르적으로도 <아내의 유혹>은 가뿐히 경계를 넘나들었다. 물론, 만듦새가 뛰어나 그 넘나듦이 자연스러웠단 얘기가 아니라 그냥 문자 그대로 가뿐했다는 말이다. 남편이 전 부인을 살해하려 했는데 그 여인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이는 호러물의 가장 기본적인 컨셉이었다. 복수를 위해 티격태격하며 줄다리기를 하는 과정에서 극중 인물들의 속고 속이는 게임은 추리물 혹은 스릴러물의 구조였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너무도 조악하였다. 올 한해 장르를 종회무진한 대표적 콘텐츠로 <무한도전>과 <아내의 유혹>을 꼽을 수 있을 텐데, <무한도전>이 웃음이라는 본질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모든 장르를 장치로 활용하는 어느 성취를 보여주었다면, <아내의 유혹>은 시청률의 포로가 되어 방송 연장이라고 하는 지극히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장르를 웃음으로 만드는 퇴행의 극한을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해 내내 <아내의 유혹>에 융단폭격 같은 비판이 쏟아졌지만, 그 드라마는 어떻게 시청자들을 TV로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일까? 이 우문의 답은 미스터리하지만, 어찌 보면 또 간단한 것이다. 배신에 이은 복수를 기본에 둔 <아내의 유혹>은 모든 여자들이 한 번쯤은 꿈꿔봤을, “내가 다시 태어나면, 지금처럼은 살진 않을 텐데”, “내가 다시 태어나면 어떤 남자를 만나 어떻게 멋지게 살아 볼 텐데”와 같은 가장 보편적이면서 절실한 통속성을 극단까지 몰아 세웠다.

대개의 아침드라마들이 <아내의 유혹>과 같은 보편적 통속성을 우려낸 사골 국물과 같은 형태를 갖는 현실에서 <아내의 유혹>은 2009년 갑자기 등장한 돌연변이라기 보단 세간의 평가처럼 우리 드라마 환경의 퇴행적 절정이었는지도 모른다. 너희는 욕해라, 그래도 보게 될 것이다. 시청자들이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지 알았다고 하면 우리가 너무 짠해지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 SBS '천사의 유혹'
각설하고, <아내의 유혹>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 성공에 힘입어 올 한해 막장은 무수한 ‘진화’를 이루었다. <천사의 유혹>을 비롯하여, <밥줘>, <하얀 거짓말>, <장화홍련> 등이 올 한해 끊임없이 막장의 한계를 갱신해갔다. 우선 막장계의 적자라고 할 만한 <천사의 유혹>은 더 이상 점 하나 찍어서는 시청자들의 비웃음을 살 뿐이니, 듣도 보도 못했던 ‘전신성형’을 시도했다. 그래, 너그러이 보자면 개연성 면에서는 점 하나 찍은 성형보다는 전신성형이 낫지 싶었지만 서도.... 그러면 뭐하나. 오십보백보인 것을. 복수를 위해 결혼을 하고, 남편을 죽음으로 몰고(또 다시 등장하는 살인 미수 혐의), 복수를 위해 사기에 거짓까지. 한 가지는 분명했다. 아내건, 천사건 유혹하는 건 한결같이 경박스러웠다는 것.

어찌되었건 2009년 내내 브라운관을 흔들었던 막장의 유혹은 염치에 눈치마저 모두를 상실하고 아침드라마를 넘어 저녁, 밤, 주말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시청자를 공격했다. 밥 달라는 남편의 바람은 빤빤하기 그지없고, 심지어 부부강간을 암시하는 장면까지 거칠게 없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자신을 버린 남자의 이복동생과 결혼하기도 하고, 시어머니를 내다버리는가 하면, 두 집 살림을 차린 남편을 지켜보는 칠거지악형 부인도 버젓했다. 복수와 배신을 기본으로 하는 경악스러운 설정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고, 극악하게 물어뜯고 복수 하다가도 끝내는 신기하고도 뜬금없이 갑작스럽게 용서를 하고, 결국 관계를 훈훈하게 마무리 짓는 버릇도 여전했다.

에이, 2009년 연예정산 드라마편도 훈훈하게 마무리했어야 하는걸. 그래서 조기종영의 불명예는 얻었지만 2009 드라마의 숨은 보석 <탐나는도다>, 대작 앞에서도 굳세게 버틴 <미남이시네요>, 실험적인 방식으로 구성한 <돌아온 일지매>를 비롯해서 재미와 감동 시청률까지 사로잡은 <내조의 여왕>, <시티홀> 등을 추억했어야 하는걸. 헌데, 이 마무리 또한 막장 같은 시추에이션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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