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시각 부평에서 용산행 급행전철을 타는 이들이 하차하는 역은 시간에 따라 신기하다할 만큼 다르다. 7시10분까지 타는 사람들이 내리는 하차역은 대부분 노량진역이고, 그 이후에 타는 이들이 내리는 역은 신도림역이다.

노량진은 이름처럼 해오라기(鷺)들 같은 철새들이 새로운 이주지를 찾기 위해 내리는 곳이다. 더러는 직장을 다니면서도 이곳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하는 이들이 있고, 또 대부분은 안정된 직업을 찾기 위해 이곳에서 하루 전부를 공부에 할애한다. 반면에 신도림은 직장인이 많은 강남으로 가기 위해 8시를 전후로 인산인해를 이룬다. 2호선 플랫폼으로 가는 병목 같은 그 길에서 나는 때로 멍하니 사람들을 바라보고만 있을 때도 있다.

▲ 도서 '한창훈의 향연'표지
어제 호주에 2002년 우리나라를 덮친 것보다 더 강한 황사가 닥쳤다는 기사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묵시록으로 표현했다. 세상은 그리고 직업은 20년 후, 10년 후에도 그렇게 안정적일까. 사실 안정적이지 않아도 딱히 방법이 없어 그렇게 사는 게 사람이지만 이 도심에서 우리는 제대로 살아가는 것인가를 새삼 생각한다.

물론 양재동의 사무실로 가기 위해 노량진과 신도림을 두고 언제나 고민하는 나, 역시 이름 없는 철새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곰곰이 내가 궁극적으로 가고자하는 곳이 어딘지를 물어보니 답이 잘 나오지 않는다. 오늘 이 질문을 던진 것은 지하철에서 읽고 있던 한창훈 때문이다. 어떻든 거문도의 바다 냄새도 나고, 여수나 부산의 선창 냄새도 나는 그의 글을 처음 읽었다. 중국으로 떠나기 전인 98년 한겨레문학상을 탄 ‘홍합’을 손에 들었던 기회가 있었지만 사투리가 낯설어서 그냥 내려놓았었다. 그리고 제법 나이가 들어서 그의 글을 다시 들었다. 처음에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책은 의외로 선선히 읽혔다.

‘한창훈의 향연’(중앙북스 간)은 소설을 쓴 지 20년째인 한창훈의 첫 번째 산문집이다. 그 정도 시간이면 산문집을 내기에는 좋은 시간이다. 이미 이곳저곳에 써 놓은 글도 있으니 속칭 ‘우라까이’(보통 쓴 글을 다시 꺼내어서 다시 포장하는 것에 대한 언론계 속어)하기도 좋고, 삶도 익을 만큼 익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훈은 동시대 작가들과 구분되는 자연의 냄새가 살아있다. 전남 완도나 여수에서도 한참이나 떨어진 거문도 태생인 그는 10살 때 여수로 올라온 후 바닷가는 물론이고 공사장 등에서 다양한 삶을 경험한 뼈가 굵은 작가다. 그의 창작 영역도 그러한데, 그 오지랖은 결국 작가회의 사무국장이라는 자리까지 가게 했으니 그가 상당한 내공의 소유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그의 첫 번째 산문집은 제목처럼 그의 인생을 한 판에 깔아놓은 향연(饗宴)이다. 플라톤의 ‘향연’에서 따온 제목처럼 이 책에는 그가 만난 자연, 사람, 일 등이 잘 진열돼 있다. 우선은 그의 고향 거문도에 대한 짙은 향수가 강하게 느껴진다. 풍경은 물론이고 사람들까지 잘 묘사돼 아마도 이 책을 읽은 이들에게는 짙은 향수를 줄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가장 넓은 좌판은 사람들이다. 아마도 작가가 가장 천착한 것은 사람일 텐데 작가의 여동생을 좋아했던 황준선(63페이지) 등의 갑남을녀를 비롯해 다양한 문단의 사람들을 소개한다. 평생을 한 배를 타서 티격대격하다가도 바다에서 사건이 나서 몸을 녹여야 했던 오씨 부부, 문단에서 독특한 카리스마로 유명했던 이문구나 송기원 같은 선배 작가, 유용주 박영근, 박남준 등의 푸근한 이야기를 적고 있다. 그간 문단에서는 한창훈과 이문구를 연결하는 흐름이 있었다.

사실 한창훈은 잘 모르지만 이문구는 개인적으로도 많은 관심이 있던 작가였다. 생전에는 짧게 만나 뵈었지만 돌아가신 후에도 두 번이나 보령에 찾아가 고인의 흔적을 더듬은 적이 있다. 아마 둘을 연결시키려는 것은 농촌과 도시를 오가는 소설적 공간의 유사성과 소외된 주변인들에 대한 천착일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문구에게는 한국전쟁과 유신이라는 역사적 생채기가 있었고, 한창훈에게는 80년 광주가 있다.

이 책에는 80년 광주 때 고등학교 2학년인 그가 자신보다 어린 학생이 총에 맞아 죽어가는 참혹한 광경에 대한 기억이 나타난다.(190페이지) 어떻든 둘의 같은 점도 있고, 차이도 있다. 탁월한 글발이나 역사, 지식 등은 사실 이문구 선생이 탁월할 것이고, 아무하고나 어울리는 ‘잡놈’ 기질은 당연히 한창훈이 앞설 것이다. 그렇다고 송기원의 키스를 거부할 수 있는 강단이나 작가회의 사무국장을 할 포스는 아무 작가에게나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창훈을 쉽게 볼 수도 없다.

또 세 번째 장에는 이모, 이모부 등 가족들과 살가운 기억들을 적고 있다. 또 팔불출의 기질을 버리지 못해서 딸 단하의 자랑에도 여념이 없다.

이제 노년을 제외하고 농촌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또 그곳을 배경으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쓰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자신이 됐던 자식이 됐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정적인 직장을 지향하면서 성냥갑 같은 아파트로 들어가고, 집값의 향배에 일희일비하는 게 대개의 삶이다. 사실 도시에서 살아가려면 의도적으로라도 시골의 기억을 잊으려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한창훈은 여전히 거문도에서 살면서 삶의 단편을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그래서 나나 일반 도시인들에게 한창훈은 향수 속의 한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그를 찾아가 이런 소리를 하면 세상은 다 똑 같다는 소리를 들을 게 뻔하다. 어떻든 그는 거문도에 있고, 나는 서울 강남에 있다. 그런 면에서는 너무 부럽다. 언젠가 시간이 나면 거문도에 가서 그와 술 한 잔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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