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고대의 철학자 장자는 당시 난무하던 궤변론자들의 주장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있을 수 없는 일을 마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자들’이라 했다. 예나 지금이나 그럴싸한 말로 거짓을 감추는 궤변은 순진한 사람들을 현혹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최근 이 나라에는 궤변이 난무하고 있어 장자의 비판이 무색해질 지경이다.

▲ 장자(莊子)
장자에서 지적하는 궤변 중 대표적인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시간을 거꾸로 흐르게 하는 명제로 “오늘 월나라로 갔는데 어제 도착했다”는 말이 있다. 당연히 말은 되지만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장자 또한 이 명제를 두고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고 우기는 오류’라고 규정하고 고대의 성인 우임금이 나타나도 이런 사람을 바로잡을 수 없을 것이라고 비꼬았다. 이와 비슷한 명제로 그리스의 철학자 제논이 “나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고 주장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는 시간의 연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잘게 나누어 흐름을 정지시켜 버리는 궤변인데, 장자가 지적한 궤변은 시간을 아예 거꾸로 돌리는 역주행 궤변이다. 그런데 지금 이 나라에 그런 일이 실제로, 그것도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면 믿겠는가.

예컨대 ‘녹색성장’이라는 형용모순의 기치 아래 MB정부가 추진하는 대운하 또는 4대강 사업의 타당성을 주장하는 이들의 견해를 들여다보자. 이들은 “운하를 만들어 배를 띄우면 물이 깨끗해진다”고 한결같이 주장한다. 더욱이 수량을 많이 확보하기 위해 물을 가두어 두는 보를 수십 군데 설치한다는데 아무래도 “고인 물은 썩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성싶다. 아마 이들이 강이 아니라 산에 손을 대면 “나무를 베어내면 공기가 맑아진다”고 주장하지 않을까.

작은 것을 크다 하고 큰 것을 작다 한다

▲ 112층 제2롯데월드 조감도.ⓒ 롯데
장자가 이야기하는 또 다른 궤변으로 크기에 대한 기준을 혼란시키는 ‘가을 털과 태산’의 궤변이 있다. 예컨대 “가을 털이 가장 크고 태산은 가장 작은 사물이다”라고 하여 작은 것을 크다 하고 큰 것을 작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명제를 입증하기 위해서는 큼과 작음에 대한 기준의 상대성을 적시하는 고도의 논증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그런 논증 없이도 누구나 한 가지 사례만 이야기해도 듣는 이의 고개를 끄덕이게 할 수 있다. 이 정권은 본래 성남 비행장의 전투기 이륙에 지장이 있다는 이유로 불허되었던 제2롯데월드를 허가해주었는데 제2롯데월드의 높이는 555미터이다. 그런데 비행장 인근 성남시의 고도제한은 45미터이다. 곧 높이 45미터 이상의 건물을 지을 수는 없지만 높이 555미터짜리 건물은 지을 수 있는 게 이 나라의 높이에 대한 기준이다. 그렇다면 태산이 작고 가을 털이 크다고 주장하는 것보다 더 어이없는 궤변이 아닌가.

장자는 또 “흰 말은 말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궤변론자들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런 일도 이 나라에서는 “위장전입은 범법행위가 아니다”라는 말로 간단히 대치시킬 수 있다. 그리고 장자는 “혁대 고리를 훔치면 사형당하고 나라를 훔치면 제후가 된다”고 당시의 세태를 비판했는데 이 말도 이 나라에서는 그대로 통한다. 최근 고위 공직에 추천된 이들의 행적에서 드러난 공개된 불법행위를 보면 이건 유전무죄 무전유죄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고위직에 추천되려면 큰 죄를 지어야 한다”는 주장도 가능할 법하다. 그도 그럴 것이 총리지명자를 비롯하여 법무장관, 대법관, 검찰총장 내정자 등 법을 가장 잘 지켜야 할 사람들이 각종 불법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최근 SBS 방송사의 토론에 참여한 보수논객들은 도리어 국회의 인사청문회가 헐뜯기로 흘렀다고 비난하면서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는가 하면 아예 위장전입 정도는 문제 삼지 말자고 대놓고 불법 옹호 발언을 내 놓기도 한다.

이쯤 되면 패러디의 대가인 장자도 울고 가지 않을까 싶다.

▲ 안동지역 낙동강 둔지 정비 사업 현장. ⓒ 초록의공명(지율)

수레바퀴 자국에 고인 물은 말라가는데

게다가 최근 이명박 정권의 이른바 ‘서민행보’를 보고 있자니 장자의 우화 한 토막이 더 생각난다. 장자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날 장자가 바쁜 일이 있어서 길을 떠났는데 도중에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돌아보았더니 수레바퀴 자국 물 고인 곳에 붕어가 한 마리 있었다.
장자가 이렇게 물었다.
“붕어야. 붕어야. 거기서 뭐하니?”
장자를 본 붕어는 이렇게 말했다.
“여보시오. 길손! 여기 물 한 바가지만 부어주시오. 그러면 내가 살 수 있겠소”
장자가 살펴보니 물은 거의 말라가고 있었다.
당장 도와주고 싶었지만 갈 길이 바빴던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이보게. 내가 지금은 바빠서 도와줄 수가 없네. 그러니 조금만 참고 기다리게. 내가 사실은 오나라 왕을 만나러 가는데 일이 잘 되면 오나라 서강의 물을 거꾸로 흐르게 해서 그대를 맞이하겠네. 그러면 되겠지?”
붕어는 화를 벌컥 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몸 둘 곳이 없어져 당장 한 바가지의 물이 있어야 살 수 있는데, 당신은 먼 훗날의 강물을 말하는군요. 그렇다면 당신은 일찌감치 건어물 가게에서 나를 찾아보는 게 빠를 게요”

사실 장자의 이 이야기는 장자 스스로 배가 고파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러 갔다가 거절당한 이야기를 빗댄 것으로 ‘말라가는 수레바퀴 자국 안의 붕어’라는 뜻인 ‘학철부어(涸轍鮒魚)’라는 말은 여기서 비롯된 고사성어이다. 예나 지금이나 서민들의 신세가 고단하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얼마 전 이명박 대통령은 재래시장을 둘러보다가 상인들이 대형마트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 하소연하자 그들에게 농산물 직거래와 인터넷 상거래를 통해 이익을 창출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야후와의 인터뷰에서 내년에는 경기가 회복될 것이라고 하고 각종 경기지표를 들면서 한국경제가 빠른 속도로 회복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미 ‘학철부어’의 신세에 놓인 서민들에게 그런 지표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게다가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현재의 고통을 참아내자는 사탕발림은 옛날 독재정권이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40년도 더 된 버전이다. 그러니까 개발 독재가 한창이던 70년대에도 재무장관이니 국무총리니 하는 이들이 나서서 우선 대기업에 혜택을 주어서 파이를 크게 한 뒤에 분배를 하는 것이 나라 전체를 위해서 옳다고 주장했다.

국민들은 그 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 동안 참고 또 참아 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던 세력들이 지금도 여전히 국가경쟁력 운운하며 아직도 분배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체 몇 년이 지나야 분배에 적당한 시기가 도래할까. 그리고 파이를 얼마나 크게 키워야 한단 말인가. 앞으로 이 나라의 경제가 성장한다면 반가워할 일이다. 문제는 그 사이 마실 물조차 없는 서민들이 지금 숨을 헐떡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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