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 관광 홍보를 책임지는 기관의 수장이 됐다. 전 정권에서 충분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현 정부에서도 정부에 공치사를 한 것으로 알려진 그의 출세는 관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내가 그에 대해 거론한 것은 다름 아니라 한 사람이 다른 나라를 어떻게 잘 이해할 수 있는 가에 대한 느낌 때문이다. 그도 한국에 있으면서 한국 문화나 인상을 담은 책을 내기도 했는데, 사실 그의 한국 문화에 대한 이해도는 좀 한계가 있을 듯하다.

사실 외국인이 명동을 걸으면서 옛날에 미쓰코시 백화점이던 신세계 백화점을 보면서 이곳을 소재로 한 이상의 ‘날개’를 언급하고, 한국은행에서는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을 이야기하고, 중앙우체국에서는 채만식의 ‘태평천하’ 등을 이야기한다면 얼마나 놀랄 일인가. 물론 남산 한옥마을이나 그 근처에 자리했던 안기부의 악령까지 들이대면 더 놀랄 일일 것이다.

▲ 도서 '런던을 속삭여 줄레' 표지
그런데 국내의 한 라디오 피디가 런던을 이렇게 설명한 책이 나왔다. CBS 정혜윤 PD의 ‘런던을 속삭여 줄레’(푸른숲 간)가 바로 그 책이다. 사실 유럽이나 미국 등에 대한 추종은 익히 알려져 있고, 이주헌 등 다양한 문화 평론가들이 그곳의 문화를 소개한 글이 있기에 신비할 것도 없지만 어떻든 이 책은 현장에 대한 체화도가 남달라 놀라게 하는 책이다.

이 책은 작가가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나 대영박물관, 런던탑 등 8곳을 방문하면서 그곳의 사람과 흔적을 기록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정혜윤 PD를 만나게 됐지만)그가 이미 상당량의 독서와 꼼꼼한 정리로 인해 충분한 데이터베이스를 갖고 있었고, 그 힘이 이번 책에 유감없이 발휘된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이 책은 한 도시의 기행집이지만 사실 조금만 형식을 바꾸면 소설이라고 해도 무방하다고 할 수 있는 좋은 ‘글 솜씨’를 느낄 수 있다. 자신이 주인공이 되고, 그녀에게 상처를 남긴 한 남자가 들어있다면 소설이라고도 할만하다. 책에 대해서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고, 소설을 쓰려는 꿈이 있는 나에게는 정 PD가 부러운 재주를 가져서 질투까지 나지만 내가 이 세상에 뛰어난 이들을 모두 질투할 만큼의 여유가 없기에 포기해 버린다.

한 공간에 대한 그녀의 해석은 탁월하다. 개인적으로 ‘희랍인 조르바’를 인상적으로 읽어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에 호기심이 있었는데, 작가는 런던 공습소에서 떨던 카잔차키스의 묘사에서 단테 ‘신곡’의 <연옥편>을 불러오는 센스를 보여준다.(91페이지) 또 대영박물관에서는 그곳을 찾았던 마르크스와 간디, 레닌, 버나드 쇼, 헨리 무어를 동원해 이 공간에 대한 의미를 확장해 간다. 또 고양이와의 접선을 다룬 에피소드를 프롤로그로 선택한 자연사 박물관 편에서는 그녀가 도가(道家)가 가진 사물의 비의에까지 접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녀의 글이 맛깔스러운 점은 근현대를 넘나드는 소설이나 시는 물론이고 이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자연스럽게 녹아있다는 것이다. 트라팔가르 광장에서 넬슨의 돌사자와 ‘아웃오브 아프리카’의 인물들을 연결시켜 얼핏 억지스러운 것 같으면서 고개를 끄덕여지게 하는 게 작가의 가장 큰 힘이기도 하다. 어떻든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가지고 작가들이 창조적인 독립성을 갖기 힘들다는 것을 역설하는 것을 보면 그녀의 인용 능력에 놀라움을 표하게 된다. 어떻든 그녀는 에필로그에 친절하게 관련된 책을 소개했는데 130여권쯤 된다. 물론 이 책을 읽어보고 런던에 가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어떻든 이 책을 기준으로 마음에 드는 작가들의 책 몇 권을 더하면 아는 만큼 보는 즐거움은 더 커질 것이다.

또 책의 에필로그에는 ‘런던에서의 나의 메모’가 있어 여행자들에게 좋은 정보 제공한다. 이 책에다가 괜찮은 여행 가이드북이 하나 있다면 더 없이 좋은 여행이 될 같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책이 내 눈에 들어오는 데는 좀 시간이 걸렸다. 작가의 취향도 고려되었겠지만 좀 난잡한 표지 디자인에 최근에는 본 기억조차 없는 흑백 사진, 약간 작은 활자는 책에 대한 접근 자체를 막는 부작용이다. 개정판이 나온다면 이 부분은 좀 보강해 주는 게 독자들에게 그를 알게 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정혜윤 작가는 지금도 CBS 라디오 피디로 활동하고 있다지만 적당한 시점에서 소설가로 데뷔하는 게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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