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이 정권의 상상을 초월하는 행보가 이어지고 있다. 특검의 청와대 압수수색을 사실상 무력화한 데 이어 대통령의 모든 혐의를 직접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한때 국정을 책임졌던 이 나라의 최고지도자와 그 참모들이 최소한의 공적 책임감을 갖고 있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상황이다.

6일 언론 보도에 의하면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3일 헌법재판소에 ‘소추사유에 관한 피청구인(대통령)의 입장’이란 제목의 준비서면을 제출했다. 대통령이 대리인단이 아닌 본인 명의의 입장을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것은 처음이다. 내용은 예상대로다. 연설문과 일부 말씀자료의 유출, 재단 설립과 관련한 언급 등 기초적인 사실관계 일부만 인정했을뿐 거의 모든 혐의를 전적으로 부정했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자면, 최순실 씨가 의상 준비나 말 상대를 해준 일이 있고 일부 연설문에 대해 조언을 받은 적은 있지만, 평범한 가정주부로 생각했고 여러 기업을 경영한 줄 몰랐다는 것이며,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 취임 이후부터 최순실 씨 의견 듣는 일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또, 대통령은 정호성 전 비서관에게 이런 취지로 일부 말씀자료와 연설문을 최순실 씨에게 보내라고 지시했으나 다른 자료까지 유출하라고 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문체부 인사 전횡 등은 추천받은 사람을 임명한 것 뿐이고, KD코퍼레이션이나 플레이그라운드가 최순실 씨와 관련이 있는 줄 몰랐으며 오직 선의로 지원하라고 지시했다는 내용도 포함돼있다. 미르 K스포츠 재단에 대해 대기업들에게 공익 차원에서 관심을 가져달라고 한 일은 있으나 강제모금한 바 없다는 입장도 그대로 유지돼있다. 세계일보 등을 상대로 언론 자유를 침해하려 한 적 없고 세월호 참사 관련해서는 대리인단이 제출한 입장으로 갈음하겠다는 내용도 적시돼 있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런 입장은 이 사태에 관계된 사람들이 헌법재판소 탄핵심판, 특검 및 검찰수사 등에서 증언한 내용들과 배치되거나 충돌하는 부분이 적지 않다. 단적인 예로 최순실 씨는 이미 재판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미르 K스포츠 재단의 운영에 대해 도와주라거나 잘 살펴달라는 요구를 했다고 발언한 바 있다. 정호성 전 부속비서관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 등은 지난해까지도 청와대의 주요 자료들을 최순실 씨에게 전달하고 재단 관련 업무 내용을 상의했다는 취지의 증언을 수차례 내놓은 바 있다.

이러니 보수언론도 박근혜 대통령의 입장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다. 중앙일보는 이날 사설에 “한 나라의 대통령마저 비상 사태를 책임지는 모습은커녕 일반 잡범이나 다름없이 일방적 주장만 늘어놓은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라며 “청와대에는 피의자들도 모르는 증거들이 산더미처럼 컴퓨터와 서랍 속에 무심히 놓여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청와대는 더 늦기 전에 압수수색을 허하라”고 썼다. 동아일보는 “최근까지 18명의 구속자를 포함해 검찰 및 특검에 의해 형사 처벌된 22명이 모두 억울한 누명을 썼단 말인가”라며 “그렇게 떳떳하다면 청와대의 압수수색도 거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청와대 자료를 자진해서 제출해야 한다”고 썼다.

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 11차 변론에서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가운데)을 비롯한 재판관들이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상황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이런 입장을 내놓은 것은 두 가지 측면을 노린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사태를 ‘진실게임’ 양상으로 몰고 가서 탄핵 심판을 지연시키겠다는 것이다.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은 퇴임하면서 이정미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퇴임일자인 3월 13일 이전에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요구를 두 차례에 걸쳐 한 바 있다. 이정미 재판관까지 퇴임한 상태에서 탄핵 심판 결론이 나올 경우 절차적 정당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 대리인단은 ‘전원 사임’까지 언급하며 박한철 전 헌법재판소장이 탄핵 심판을 편향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반발하기까지 했다. 이정미 재판관의 후임은 대법원장이 임명하게 돼있으나 탄핵심판에 직접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인사 조치를 쉽게 할 수 없을 거라는 전망이 힘을 얻고 있다. 이렇게 되면 최악의 경우 탄핵 심판은 사실상 표류한 채로 장기화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정치적 효과에 관한 것이다. 주요 보수언론까지 모두 최순실 씨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사건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이 모든 것을 야당과 JTBC의 ‘음모’로 받아들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청와대 경내의 상춘재에서 진행된 신년 기자간담회와 정규재TV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유사한 주장을 반복한 것은 지지자들의 믿음에 나름의 근거를 제공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에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준비서면도 이와 유사한 효과를 낼 수 있다. 세상만사를 음모로 보는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자들은 장외에서 새누리당의 대권주자들과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국무총리 등의 든든한 정치적 버팀목이 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버티는 데 필요한 최대의 무기는 헌법상의 ‘불소추특권’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나올 수 있는 것도 이 덕분이다. 탄핵이 인용되면 박근혜 대통령의 불소추특권은 없어진다. 탄핵 심판은 형사 재판과는 달리 모든 쟁점에 대한 유무죄 판단을 하지 않아도 결론을 내리는 것이 가능하다. 3월 13일 이전에 탄핵 인용 결정이 내려지면 박근혜 대통령은 민간인 신분으로 법적 대응에 나서야 한다.

이 대목에서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은 박영수 특검의 수사기간 연장 요청이다. 이규철 특검보는 6일 브리핑에서 “수사상황이 아직 부족한 걸로 판단된다”, “수사기간 연장 승인신청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밝혔다. 특검법에 적시된 1차 수사기간은 총 90일이고 박영수 특검은 지난해 11월 30일에 임명됐으므로 이달 28일을 수사기한으로 볼 수 있다 수사기간 연장 요청은 종료 3일 전에 해야 하므로 이달 25일에 이뤄질 걸로 보인다. 수사기간 30일 연장이 승인될 경우 특검의 수사기간은 3월 13일 이후까지로 늘어날 수 있다. 3월 13일 이전에 탄핵이 인용되면 결국 박근혜 대통령이 불소추특권이 없는 상태로 특검의 수사를 받아야 할 가능성이 생기는 것이다.

특검의 수사기간 연장은 황교안 권한대행이 승인해야 한다. 황교안 권한대행은 특검이 수사기간 연장을 정식으로 요청하면 그때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황교안 권한대행이 특검의 청와대 압수수색에 대응하는 모양새를 보면 특검의 수사기간 연장 요청을 승인할지 의문이다. 청와대 압수수색은 대통령 비서실장 또는 경호실장이 이에 응해야 가능한데 결국 형식논리적으로 이들에게 업무지시를 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이 발동돼야 한다. 그런데 황교안 권한대행은 청와대가 특검의 압수수색을 거부한 것에 대해 “대통령비서실장과 경호실장이 관련 법령에 따라 특검의 경내 압수수색에 응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발언했고 이러한 입장에 변화가 없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이런 현실은 박근혜 대통령이 특검의 대면조사를 편의적으로 받을 것이라는 전망도 강화한다. 과연 박근혜 대통령이 특검의 대면조사 요구를 받아들일지에 대해 회의적으로 판단하는 이들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특검의 수사기간 연장 요구를 무력화하기 위해 오히려 대면조사에 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대면조사까지 받았으니 수사기간 연장을 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박근혜 대통령은 대면조사를 받겠다는 의사를 피력하고는 있지만 조사 내용은 물론 일정, 장소 등을 모두 비공개로 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최순실 씨 일당 등의 경우처럼 수사내용이 외부에 유출되는 경우 탄핵 심판 등에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을 고려하는 것 아니냐는 해석이다. 불필요한 논란의 확대는 경계해야겠지만 대통령이 특검의 대면조사에 있어서도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만을 취하려 한다는 비판 역시 피해갈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결국 종합해보면 대통령과 정부, 여당이 똘똘 뭉쳐 ‘조중동’을 포함한 기성 언론 및 정치 전체와 꼴사나운 싸움을 지속하는 형국이다. 7일 일부 언론은 새누리당 지도부가 지난달 말 박근혜 대통령에게 자진 탈당을 건의했다고 보도했다. 새누리당 정우택 최고위원은 이에 대해 ‘대통령이 자진탈당 하지 않더라도 당 윤리위가 제명 등을 결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본 방침을 청와대에 전달한 것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새누리당의 대권 주자를 자처하는 이인제 전 최고위원은 이날 YTN라디오와의 전화 연결에서 “참 비겁한 행동”이라며 “아들이 잘못했다고 호적에서 파내면 그게 아들이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결국 ‘이대로 가자’는 것이다. 대통령의 탄핵을 둘러싼 모든 정황을 ‘음모’라고 주장하고 싶거나 그렇게 믿는 사람들에 의해 정부와 여당이 지배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이게 국내총생산 11위로 ‘선진국’을 자처하는 한국의 정치 현실이라는 사실을 과연 세계의 그 어느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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