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길 때문에 오래된 기억이 떠오릅니다. 고등학교 다니던 1980년대 초 기억이니 꽤 오래된 기억입니다.

대학입시에 없는 과목인 음악은 우리들에게 시간 때우기 급급한 과목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내신 성적이 있어 실기시험과 이론시험을 소홀히 할 수도 없었습니다.

실기시험이 1학년 땐 하모니카 연주, 2학년 땐 기타연주, 3학년 땐 피아노 연주였습니다. 하모니카는 그래도 종종 실물을 보기도 하니 다행이지만 기타나 피아노는 음악실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하지 않은 악기였습니다.

하는 수 없이 기타는 널빤지에 모형을 그려서 연습하고 피아노는 책상에 건반을 그려서 어눌하게 연습하던 기억이 납니다. 극소수를 빼고는 피아노는커녕 기타도 살 형편이 되지 않는 시골학교에서 겪는 이질감이 음악실기시험이었습니다.

▲ ⓒ지리산길(www.trail.or.kr)

두 번째 기억은 5년 전 시골중학교 음악회입니다. 한 해가 끝나갈 즈음 동아리 활동에서 익힌 실력으로 작은 음악회를 엽니다. 산중 작은 마을에 전교생 서른명 남짓한 시골중학교와 대안중학교가 있습니다.

대안중학교는 거의 도시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이고 시골중학교는 도시로 나갈 형편이 안 되는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입니다. 대안중학교 아이들은 드럼에 전기기타,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그룹연주로 시작부터 시끌벅적합니다. 뒤이어 바이올린, 플롯, 피아노 개인연주에 댄스공연까지 다양하기도 합니다. 몇 순을 이렇게 돌고 시골중학교 아이들 차례가 되었습니다.

내심 이 아이들은 무슨 악기를 들고 나올까 궁금했는데 흰 티에 청바지를 입고 나온 아이들은 맨손이었습니다. 무대에 서는 것이 어색한 듯 ‘우리도 많이 격려해 주세요’라는 말을 남기고 말없는 ‘수화공연’을 했습니다.

전북 인월에서 시작해 산내를 거쳐 등구재 넘어 경남 마천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둘레길이 개통되고 많은 사람들이 다녀갑니다. 지리산 둘레길은 높은 산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이 아니고 지리산 골골이 사는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을 잇는 샛길입니다.

지금은 찻길이 마을과 마을을 잇고 사람과 사람을 잇고 있어 명맥이 없어진 길입니다. 이 길을 다시 살려 사람들을 걷게 만든 지리산 둘레길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산중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길은 논밭 다니는 길이고 이웃마을 다니는 길이지만 도시사람들에겐 특별한 길일 수 있습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숲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움일 수 있으며 느릿한 걸음은 앞만 보고 뛰어온 삶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일 수 있습니다.

골골이 사는 사람들을 잇던 길이 찾아오는 사람들의 길이 되면서 도시와 산촌이라는 부조화가 생깁니다. 산골에 남은 주름살투성인 할머니와 배낭 맨 여행자! 호기심으로 꺾은 고사리, 호박 때문에 일부 구간을 폐쇄하는 마을사람들과 길을 막는다고 불만인 여행자들! 누구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농촌과 도시 그 자체가 부조화인 게 지금 우리들 모습입니다.

지리산 댐으로 물에 잠기는 마천사람들의 아픔을 걷는 사람들에게 함께 하라고 할 수는 없어도 ‘오얏나무 밑에서 갓 끈 고쳐매지 말라’던 우리 선조들 지혜처럼 그 길을 밟으며 걸을 때 그곳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겸손한 마음으로 걸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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