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와 <취재파일4321>의 미필적 고의를 비판한다. ‘왜 나만 갖고 그래’ 라고 푸념할 수 있겠다. ‘남들도 그러지 않냐’고 항의하고 싶을 것이다. 어찌 하겠는가? 당신들은 자칭 ‘국가기간방송’사다. 공공연히 ‘국민을 위한 방송’이라 홍보하고, 수신료를 올리려고 온갖 꼼수를 다 쓰는, 명색이 한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 아닌가? 그러하니 ‘정명’을 강요당하는 MBC에 비해 오히려 엄격한 비평의 잣대가 사용되어야 할 것이며, 사영방송인 SBS과는 비교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판단 기준이 적용되는 게 마땅하다.

▲ KBS 시사 프로그램 '취재파일 4321'
이런 점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주 일요일 밤 시청자를 찾는 <취재파일 4321>은 심각하게 문제다.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 부실하다. 더욱 중대하고 위험한 점은, 이 특정 프로그램의 부실이 KBS의 전반적 부정(不正)을 대표 반영한다는 것이다. 거꾸로 말해, 이병순 체제하 2009년 KBS 보도국의 구조적 실패 상을 우리는 <취재파일4321>의 사례를 통해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알아 볼 수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말 대로 부분과 전체는 결코 둘이 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취재파일 4321>에 대한 결코 어렵지 않은 분석 작업을 시작해 보자. 분석이란 게 요소나 성질별로 쪼개서 살펴봄으로써 특정 대상 혹은 현상의 의미를 보다 명료하게 드러내는 작업 아닌가? 이러한 관점에서, 이 프로그램에서 7월 12일부터 지금까지 약 두 달간에 다룬 소재들을 잠시 되돌아본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대체 이 프로그램은 무엇에 관해 이야기를 하고(선택과 강조) 또 그렇게 하기 위해 무엇을 말하지 않는지(배제와 억압) 가장 기본적인 내용을 따져보기 위함이다.

성역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변죽만 울리는

이 프로그램은 ‘대한민국 FTA 10년’을 정리하고 ‘레바논에 평화를 심는’ ‘우리’ 부대를 자랑한다. ‘우주독립을 꿈꾸’다 막상 실패로 끝나자 ‘나로, 그 아쉬움을 딛고’ 재출발하자고 위무한다. ‘재래시장의 반격’, ‘수경 인삼 재배의 1년’을 소개하기도 한다. ‘조기 유학의 그늘’과 ‘영어 조기교육의 명과 암’을 연이어 파헤치며, 음원 보호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질문 던진다. ‘성매매 단속, 그 후’를 애프터서비스하고, ‘세금, 어디로 가나’ 친절히 설명해 준다. ‘클럽과 마약’ 소문, 히말라야에서 죽은 고미영씨 이야기도 빠지지 않는다.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부정과 비리, 불합리한 제도”에 관한 시청자의 제보를 기다린다고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균형 잡힌 창”이라고 프로그램의 성격을 자기 규정한다. “성역 없는 비판과 고발을 통해 맑고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고 기획 의도를 밝히고 있다. ‘공정과 균형’이라는 기본 원칙을 유지하겠지만, “사회적으로 비중이 큰 이슈를 다룰 때는 정형화된 틀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과감성까지 보인다. 과연 프로그램의 실제 수행성은 이렇게 스스로 밝힌 잣대에 비춰볼 때 몇 점이나 받을 수 있을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겠지만, 나로서는 절대 관대할 수 없다. 냉혹하게 ‘미달’ 혹은 ‘불량’의 점수를 줄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이 내세우고 있는 기획의도에 비춰 실제 성과를 따져보는 이른바 ‘내재적 비평’의 결과가 그러하다. 과연 두 달 동안 이 프로그램에서 다루어진 아이템들이 얼마나 투명 사회를 만들기 위한 ‘성역 없는 비판 고발’의 의무를 다했는가? ‘정형화된 틀’ 포기의 욕심은 두고라도, 대체 <취재파일4321>은 ‘사회적으로 비중이 큰 이슈’를 다루기는 했는가?

▲ KBS 시사 프로그램 '취재파일 4321'
‘누드와 표현의 자유’에 관해 다루면서, 훨씬 중대한 사회적 논란으로 부각한 대학과 학문의 자유에 관해서는 왜 찍 소리 하지 않는가? 한가로이 ‘여름휴가 이야기’를 다룰 여유는 있지만,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를 애도할 시간은 그렇게 없던가? ‘폭우는 잦아드는데…’라고 우려하던데, 토건 자본/권력에 의해 체계적으로 파헤쳐질 4대 강에 대해서는 어찌 걱정이 들지 않았는가? 성역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변죽만 울리는, 차라리 세상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균형 없는 창에 쉽게 관용을 베풀 수 없다.

현안과 쟁점을 기피하고, 중대사안을 외면하며, 흥밋거리를 선택 강조하면서 막상 비중이 큰 이슈를 배제 억압하는 점에서 <취재파일4321>은 정치적으로 불량하고 또 사회적으로 후지다. 정치의 복구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탈정치를 조장하며, 사회를 보호하는 대신에 사회를 해체한다. ‘해파리 떼의 습격’을 ‘공룡슈퍼의 습격’과 함께 알리고자 했고, ‘외국인 120만 시대’를 진단했으며, ‘신종 플루 확산 비상’을 외침으로써 나름대로 방역의 조처를 취했다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고의적 태만보다 총체적 실패의 일례

정말 그러할까? 사회적으로 엄청나게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는 돼지 플루, 초국적 양돈자본의 로비 때문에 ‘신종 인플루엔자A’로 이름이 바뀐 ‘신종플루’ 이야기를 해 보자. 5월 10일 “전 세계가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인간이 바이러스를 정복하는 것은 아마 영원히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는 결론으로 시작했다. 8월 23일에는 “신종플루가 대유행할 것으로 우려되는 올 가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면서, “본격적인 확산과 피해는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경고가 잇따르고” 있다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바이러스를 정복하기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말도, 피해 경고에 주목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좋다. 그렇지만 앞서 짚었어야 하는 게 있다. 돼지 플루 첫 케이스가 발견된 멕시코 라 글로리아와 그 곳에 위치한 스미스필드라는 세계 최대 양돈회사 이야기를 외면하면 안 된다. 원인을 알아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다. 지젝의 말대로, 원인이 제거되거나 원인에 관한 논의가 생략될 때 공포와 혼란, 혹은 허무와 냉소의 결과들이 판친다. 이런 점에서 <취재파일4321>의 돼지 플루 이야기는 진지한 취재와 거리 멀다.

▲ KBS 시사 프로그램 '취재파일 4321'
오히려 표피적이고 상투적인, 그래서 실체와의 면대를 가로막는 리포팅에 불과하다. 그리고 <취재파일4321>에서 발견되는, 뭔가를 비춰주면서 보여주지 않고 이야기하면서 막상 말해주지 않는 이런 트릭은 KBS가 처한 총체적 실패의 일례에 불과하다. <취재파일4321>의 실패는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KBS의 위기를 징후적으로 드러내는 점에서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권력을 방임하고 모순을 은폐하며 교통을 방해하는 KBS 위치 확인의 지표로 정확히 분석, 비판되어야 한다.

야수적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중 한 사람인 쁘리보 레비는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사회 진보를 위한 최선의 도구로 ‘이성’과 ‘토론’을 꼽았다. 과연 KBS 전체와 <취재파일4321> 부분은 이성적 토론에 기여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진보에 일조하고 있는가? 아니면, 토론의 합리성이라는 민주=정치적 규칙을 위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사회진화에 역행하고 있는가? KBS/<취재파일4321>은 침착하고 절제된 시대 증언의 언어들을 생산하고 있는가, 아니면 통념에 의존하면서 어물쩍 위기의 현실로부터 도망치고 있는가?

어떤 이는 별로 인기 없는 프로그램 신경 써 뭐하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악착같이 물어본다. <취재파일4321>와 KBS 보도국은 진실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가 아니면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가? 현실의 위기를 대충 모른 척 하고 넘어가고, 아는 것조차 성실히 알리기를 포기한 게 당신들의 자기 생존을 위한 기회주의적 선택인가? 그런 당신들에게 “파시즘은 죽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가면을 쓰고 모습을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파시즘은 새 옷을 입고 다시 나타나기 위해 변신을 꾀하고 있다”는 레비의 경고는 어떻게 다가오는가?

아우슈비츠을 외면했던 옛 독일인들을 그는 “고의적인 태만함 때문에 그들이 유죄”라고 단호하게 고발한다. 명백하고 현존하는 이 시대의 위험 상황, 우리 사회의 비상사태에 대해 알려고 하지 않고 또 알려주지 않으려고 하는 당신들에게도 이후 기억의 증인들은 똑같이 추상같은 고발장을 발송하지 않을까? 그런 역사의 소환이 두렵다면, 지젝이 제안하는 ‘미세한 차이의 정치력’을 당장 발휘하시라. 진정한 저널리즘의 무기로 ‘성역’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림으로써, 사회와의 약속을 행동으로 지키시오. 아니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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