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행훈 선생을 처음 뵌 것은 지난 2005년 9월이었다. 한국언론재단이 주관한 ‘미디어기자 유럽 테마취재단’의 일원으로 운 좋게 뽑혀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 유럽 각국의 언론 상황을 돌아볼 드문 기회를 얻었는데, 선생은 풍부한 해외 체류 경험과 유창한 외국어 구사능력, 해외 언론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유럽에서의 일정 내내 취재단을 사실상 이끌다시피 했다. 4년이 흐른 지금도 좀처럼 잊히지 않는 것은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꼿꼿하게 앉아 방문 국가의 언론 자료를 꼼꼼하게 검토하는 선생의 모습이었다. 동행한 젊은 후배 기자들이 긴 여행에 지쳐 자다 깨다를 되풀이하는 동안에도 선생의 시선은 변함없이 두툼한 ‘자료’에 꽂혀 있었다.

▲ 도서 '미디어 독점' 표지
당시 유럽 테마취재의 화두는 신문과 민주주의의 미래였고, 그때의 경험은 곧이어 신문발전위원회와 신문유통원의 탄생이라는 결실로 이어졌다. 신문의 암울한 미래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민주주의에 위협이 된다는 인식에서 생겨난 프랑스 정부의 신문 지원 제도를 우리 실정에 맞게 도입한 결과였다. 만성적인 재정 압박에 시달리는 군소 신문의 숨통을 틔워줌으로써 다양한 목소리를 가진 신문들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해주자는 취지였다. 이 문제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진지한 고민은 경제사회이사회가 2005년에 작성한 보고서 ‘신문의 미래, 그 독립성과 다원성의 보장’으로 구체화되었고, 한국언론재단은 이듬해 이 보고서의 번역본을 국내에 내놓았다. 이때만큼 우리 사회가 여론 다양성이란 문제를 깊이 고민하고 값어치 있는 결과물을 내놓은 시기가 또 있을까.

작금의 언론 상황이 불과 3년 전의 이런 노력이 무색해질 만큼 시대를 거스르고 있다는 참담한 현실에 커다란 방점을 찍은 것은 미디어 법의 날치기 통과라는 희대의 사건이었다. 여당이 한창 미디어 법을 위력으로 밀어붙이느라 열을 올리던 지난해 겨울의 혹한 속에서 언론 자유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 젊은 기자들을 보며 “언론계 선배란 사람이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이 죄를 짓는 것 같아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하는 의미에서” 이 책을 썼다는 선생의 바람과 달리 현실은 더 악화됐다. 날치기 표결의 적법성 문제가 헌재의 최종 판단에 맡겨진 와중에도 정부는 그동안 줄기차게 선전해온 ‘경쟁력 있는 미디어 기업의 탄생’ 어쩌고 하는 예의 그 장밋빛 환상을 대대적으로 광고하며 법 시행을 기정사실화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3년전의 노력은 아무 쓸모없게 돼

한겨레와 경향, MBC, 소수의 인터넷 언론을 뺀 주류 언론 대부분이 미디어 법 문제에 굳게 침묵한 것도 심각한 문제였지만, 우리 보수신문에서 <뉴욕타임스>의 보수주의 필자 윌리엄 사파이어(William Safire) 같은 논객을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는 것보다 더한 비극은 없을 것이다. 이 친기업 성향의 보수 논객은 2003년 미국 연방통신위원회가 방송의 소유 규제 완화와 겸영을 허용하는 결정을 내리자, 미디어의 다원주의를 해치는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강하게 비판하는 글을 썼다. 자신이 소속된 <뉴욕타임스>의 논조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이 칼럼에서 <뉴욕타임스> 역시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사파이어는 칼럼의 한 대목에 이렇게 썼다. “나는 <뉴욕타임스>가 이 조치에 대한 나의 통렬한 비난의 글을 게재해줬을 뿐 아니라 타임스 신문사가 교차 소유를 위해 로비를 했다는 정보를 담은 스티븐 라베이턴 기자의 훌륭한 기사를 신문 1면에 보도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실로 공정성에 값하는 이런 보도 태도를 우리의 보수신문이 단 한 번이라도 보여준 적이 있는가.

마침 비슷한 시기에 똑같은 문제를 고민하던 프랑스 정부는 민주적 절차를 과감하게 생략해버린 우리와 달리 90일 동안 전 국민이 참여하는 ‘신문에 관한 국민토론’을 진행한 뒤 프랑스의 글로벌 미디어 그룹 육성 계획을 ‘당분간’ 포기하겠다며 당초 대통령이 그 필요성을 역설한 프로젝트를 전격 보류했다. 이 불편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우리의 보수신문들은 프랑스 정부의 결정을 정반대로 보도하는 만행을 저질렀다가 뒤늦게 방송통신위원회가 ‘사실’을 확인해준 탓에 망신을 톡톡히 당해야 했다. 이 책에서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미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의 경우만 봐도 답은 금방 나온다.

여론 다양성을 볼모로 기업과 막강한 보수신문에 방송시장을 거저 내주는 나라는 없다. 미국의 연방통신위원회가 대자본과 거대 미디어 산업의 로비에 굴복해 겸영을 허용한 2007년 12월의 결정에 대해 미국 전역에서 25만 명이 항의하는 편지를 지역구 상원의원들에게 보냈고, 반대 여론에 뜨끔해진 상원은 연방통신위원회의 결정을 무효화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저자의 말대로, 요는 미디어의 다양성이 신문의 가짓수나 방송 채널수가 는다 해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누가 소유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소유주가 다양해야 미디어 다원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미디어 다양성은 누가 소유하냐가 중요

정부 말마따나 미국과 프랑스도 신문과 방송의 겸영을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일정하게 까다로운 조건이 붙는다. 프랑스 정부의 글로벌 미디어 기업 육성 계획이 90일간의 열린 토론을 거쳐 무산된 과정, 그리고 미국 의회가 겸영에 반대하는 여론을 십분 수용해 정부의 결정을 뒤집은 과정은 민주주의가 절차의 미덕을 신봉해야 하는 까닭을 명명백백하게 보여준다. 정말이지 부러운 것은 그들의 민주적 의사결정 과정이다. 우리 정부가 그토록 닮고 싶었던 미국의 현 대통령은 후보 시절 자신의 선거 강령에 다음과 같이 밝혀놓았다.

“미디어 집중은 심히 유감스러운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합병에도 불구하고 미디어의 경영 상황은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수익은 감소하고 규모를 줄이는 기업이 늘고 있다. 일자리의 축소로 기자의 해직이 늘고 있다. 여기에 뉴스의 질과 다양성이 떨어지고 있다. 미리 만들어놓은 녹음 녹화된 프로그램이 현장을 직접 취재한 콘텐츠를 대체하고 있다. 그런데도 미디어 산업은 비즈니스 모델을 바꾸기는커녕 합병을 더 추진하고 그럼으로써 공동체의 장기적 필요를 희생하고 단기적인 이익만 추구하고 있다. 아직도 많은 지역인 소유의 방송국들이 수행하고 있기는 하지만 기업 이익만 노리는 거대 기업들은 지역사업과 공동체 봉사의 정신을 포기해버렸다.”

결국, 우리 정부는 미디어의 다양성을 지키겠다는 선진국과는 정반대의 길을 가겠다며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이 된다. 국회를 우격다짐으로 뚫은 여당의 방송법 일부 개정 법률안의 제안 설명은 “새로운 미디어 환경 변화에 부응하고 국제적 시장 개방 조류에 대응, 우리 방송 사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미디어 산업 발전에 적합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하여” 겸영을 허용하자고 역설한다. 하지만, 저자가 정확하게 지적한 대로, 이 제안 설명에는 기업 발전에 관한 언급만 있고 언론 발전에 관한 언급은 없다. 방송 사업 육성법이거나 미디어 산업 발전법이지 언론의 역할을 강화하는 ‘미디어 법’은 아니다.

일자리 2만여 개가 생겨난다는 등의 장밋빛 환상으로 덧칠된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의 연구보고서를 근거로 글로벌 미디어 기업의 출현을 주장하는 정부와 여당의 주장에 저자는 따가운 일침을 놓는다.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라는 것이다.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서둘러 씌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책은 잘 짜인 학술논문처럼 체계적이지 않다는 점이 전혀 문제될 게 없을 만큼 해외 학자와 언론인, 언론단체의 다양한 저술과 조사결과를 통해 미디어 소유 집중의 폐해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존경할만한 원로 언론인의 이 노작에서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은 미디어의 다양성이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노익장’이란 근사한 표현은 선생 같은 날카로운 지성과 우직한 성실함, 양심 있는 용기를 가진 분에게나 어울리는 말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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