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사회에서 위험을 인지 못하거나 과잉반응 하거나

독일학자 울리히 벡은 현대사회의 특성을 ‘위험사회’라는 개념으로 포착해냈다. 지금이 옛날보다 훨씬 위험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적어도 현대 도시에서 길을 걷다 들짐승에게 잡아먹힐 위험은 사라졌다. 위험사회론은 위험을 통계적으로 예측·관리하고, 사후적으로 보상할 수 있다는 근대적 ‘믿음’이 더는 성립하기 어렵다는 통찰적 인식이다. 1986년 체르노빌 원자력 폭발 사고는 20년도 더 지났지만 아직까지 피해의 범위와 규모조차 확정할 수 없다. 체르노빌 사고에 대비한 보험 상품을 내놓은 보험사가 있었다면 오래 전에 망했을 것이다.

▲ 다큐멘터리 ‘체르노빌-야생의 귀환’, 2007 포스터

오늘날 역학(疫學)적 현상도 위험사회론의 그물 안에 있다. 본디 전염병은 색깔도 소리도 냄새도 없이 퍼지는 병이지만, 가장 빠르고 광범위한 매개 수단은 공기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염병도 제트기를 타고 세계여행을 한다. 멕시코 돼지한테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종 플루로 한국 사람들 몇이 죽고, 언론은 이 얼굴 없는 저승사자 얘기를 연일 대서특필하고 있다. 문제는 신종 플루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무도 단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어느 언론은 방역체계에 구멍이 뚫렸다고 하고, 또 다른 언론은 호들갑은 절대 금물이란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9월호에는 ‘플루포비아, 불온한 진실’이라는 프랑스 발 글이 실렸다. 이 글을 보면, 신종 플루는 ‘위험성은 낮으나 정치사회적 충격은 큰’ 질병이다. 제때 처치만 잘하면 나을 수 있지만, 집단적인 공포감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현상은 위험사회의 역설이다.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과 위험의 공포에 과도하게 휩싸이는 것은 동전의 양면이다. 해마다 100만 명이 넘는 제3세계 지역민들이 무관심 속에 말라리아로 숨지지만, 발병 8개월 만에 ‘겨우’ 1200여 명이 숨진 신종 플루에 대비해 제1세계 국가들은 10억 개가 넘는 백신을 주문해놓았다.

이런 양극화 현상은 ‘자본’과 ‘시장’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제약 자본이 변형 바이러스를 만들어 퍼뜨린다는 음모론은 피해망상일 뿐이지만, 신종 플루 공포가 퍼질수록 제약 자본의 돈방석은 두툼해지게 돼있다. 언론도 이 시장의 대형유통업자다. 상업주의 언론은 쉬지 않고 위험을 전시하고 공포를 유통한다. 숱하게 품목을 갈아치우지만 진짜 위험한 (말라리아 같은) 질병은 품목에 들지 못한다. 돈이 안 되기 때문이다. 신종 플루 보도가 객관적 사실에 입각해 있으면 고마운 일이다. 다음은 프랑스 건강잡지 <상테 마가진>의 2008년 12월 12일자 기사 제목이다.

“살려주세요, 플루가 오고 있어요!”

※ 이 글은 <한국방송대학보> 제1554호(2009-09-07)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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